요한계시록 강해(12)
6장
어거스트 반린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인을 떼는 것은,
인은 세상에 임하는 그 심판의 일반적인 면모를 보여주며, 나팔은 특히 이스라엘 민족과 관계가 있으며, 그리고 대접은 배도한 기독교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분출을 보여줍니다. 인에는 “어린양”이, 나팔에는 “천사들”이, 그리고 대접에는 “하나님”이 특별히 관련되어있습니다.
인, 나팔, 대접은 모두 유사한 배경으로 마감됩니다. 일곱째 인의 끝 무렵에 한 천사가 그 제단이 놓인 성전을 암시하는, 금 제단에서 향을 채우고 있으며(
인 기간에는 어린양과 그분의 성도들이 나타나는 반면에, 나팔 기간에는 어린양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천사들이 출현하는데 이는 나팔들이 이스라엘과 관계가 있음을 암시해 줍니다(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항상 천사들을 통해서 다루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분의 교회와 관련하여 그렇게 하시듯이 그분의 성도들에게 가까이 하시는 것은 오직 은혜가 다스릴 때만입니다.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저는, 이 7년간의 환난기 전체를 당시에 지상에 있는 세 부류, 즉 이방인과 유대인과 배도한 교회에 적용되는 것으로 본다면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움 주리라 생각합니다.
이 일곱 인 중 앞에 나오는 넷은 각각 네 생물 중 하나에 의해 소개되며 나머지 셋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일곱가지 비유도 앞의 넷과 뒤의 셋으로 나뉘는데 아마도 여기의 경우와 그 이유가 같을 것입니다. 앞의 네 인은 마태복음 13장의 처음 네 비유처럼 보다 공개적이며 사단의 활동성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뒤의 셋은 마태복음 13장의 그것처럼 보다 은밀하고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7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거의 항상 4와 3으로 나뉘는데, 4는 세상 사건에 나타난 사단의 활동을 보여주며 3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여줍니다.
인을 뗀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늘에서만 알려진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이는 오직 하늘에서만 인을 떼는 것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악에 대한 심판관임을 깨닫는데 매우 더딥니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타인이나 사단의 탓으로 돌리기를 좋아합니다. 이 심판들 중 어느 것도 그리스도께서 각 인을 떼실 때까지는 행해질 수 없습니다. 심판은 그분의 지배 아래 있으며, 그분께서 명을 발하실 때까지는 이 세상에 부어질 수 없습니다. 아울러 우리가 저 위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부어질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 소리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이에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더니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이 말 탄 사람들의 장면의 정확한 의미를 교리화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첫번째 그림이 평화롭고 피흘림이 없는 정복을 묘사하고 두번째는 난폭하고 분명 유혈이 낭자한 전쟁을 묘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첫번째 말탄 자는 확실히 어떤 이들의 생각처럼(이 말 탄 자처럼 그분도 계시록
이 흰 말을 탄 자는 풍부와 평화의 때를 암시할 수도 있는데(살전
“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내가 네 생물 사이로서 나는 듯하는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 하더라”(
분명 여기에 암시된 저주는 전쟁과 그에 따르는 재난 뒤에 오는 기근의 저주입니다. 검은 말 역시 이 사실을 암시해주는데 이는 예레미야애가
부유한 자들은 어느 정도 이 저주로부터 피하는데 이는 감람유와 포도주(부자들의 소유-렘 31:12)는 아직 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섯째 인이 떼지면(15절) 부자들도 그들의 운명을 거둘 것입니다.
네 생물 사이로서 한 음성이 들리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으로서, 이들 재앙이 아직 일어나지 않고 다만 무한한 공의에 의해 명령되고 부과되는 단계임을 보여줍니다. 이 가련한 그리스도 없는 세상은 얼마나 두려운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저희가 땅 사분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이 네째 인은 에스겔
우리는 이들 인에서는, 뒤에 나오는 나팔과 대접의 경우처럼 자세한 심판 내용을 보지 못합니다. 여기서는 다만 세상을 황폐케 할 그 두려운 슬픔과 심판의 날에 대한 일반적이고 개괄적인 소개만을 대하게 됩니다. 슬프게도 인간이 소망하고 꿈꾸는 우주적인 평화가 아닙니다. 적어도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의를 배우게 될 때까지는 그러합니다. 죄인들이 이 세상에서 취해져 지옥에 던지워질 때까지는 그러합니다. 그때 그분의 지상 성도들이 나라를 취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공의와 위엄으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평화가 이 땅에서 영원한 실재가 된다니 얼마나 즐거운 날이 될 것인가!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각각 저희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신원(伸寃)을 호소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확실히 이 은혜 시대의 순교자들이 아닌데, 이는 은혜 시대 순교자들의 입에서는 아무 신원의 요청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주님처럼 그들의 대적을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상 백성인 이스라엘의 입에서는 하나님이 성도들의 대적에게 보복하실 것을 요청하는 간구들이 종종 발견됩니다. 소위 시편의 탄원시들을 보면 그들을 증오하고 압제하는 자들에게 보복하실 것을 하나님께 부르짖는 호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차례 그들은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라는 간곡한 호소를 발합니다. 어느 때까지 악이 승리하고 의가 고통을 당해야 할까요? 많은 시편들이 이스라엘의 큰 환란기와 그 두려운 날에 당할 그들의 고통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본문에 나오는 성도들은 장차 지상에 임할 7년간의 환란기의 전 3년 반 동안 죽임을 당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나머지 성도들 역시 순교로 죽임을 당할 때까지, 즉 “큰” 환란으로 불리우는 기간의 후 3년 반 동안 기다리라는 분부를 듣습니다. 그들의 고통은 극심하겠으나 그 보상은 그에 비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그들 순교자들은 지상 축복뿐만 아니라 천국의 영광과 영예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이 표현들이 상징적인 것인지 아니면 문자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항상 확신있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해, 달, 별 등과 같은 천체들이 자주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해”와 방패로 묘사되어 있습니다(시 84:11), 요셉의 모친은 해에 비유되었으며, 별은 종종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로 보아 본문에 나타난 묘사들은 장차 올 두려운 날에 모든 통치 세력(해와 달)과, 강한 나라들(산) 빛 보다 작고 격리된 나라들(섬)이 무너질 것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날에는 피흘림과 파괴를 동반한 가공할 정치적인 붕괴(“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위적이고 정치적인 재앙과 함께 지진, 기근, 온역 따위의 자연적인 재난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날 것임을 의심할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하나님을 찬양하게도 여러분과 저는 이곳에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땅에 거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 땅을 지나치는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본향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저 하늘 위입니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한 오래된 찬송시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저들은 바위와 산에게 기도할 것이네,
저들은 기도했으나 그러나 그 기도는 너무 늦어버렸네”
본문은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실 이 대규모 기도 집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배도한 유대인과 이방인을 위한 은혜의 때는 마감될 것이고, 대적들을 삼킬 심판과 무서운 진노를 떨며 기다리는 두려움만이 남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문명은 일시에 무너져 산산조각 날 것이며 지상 평화에 대한인간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인간은 은혜가 아닌 심판이 하나님의 완전한 의의 통치를 시작케 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나라는 사회적인 개선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룩한 진노 가운데 모든 불신자와 거역자를 취하여 마침내 불못으로 그들을 던져 넣으심으로써 세워질 것입니다.
많은 구약성경 구절들이 본문에 묘사된 장면을 예고해 줍니다. 사실 본문은 이사야, 요엘, 학개 둥의 선지자들의 글에서 직접 인용한 표현들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34:4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오, 반석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피난처를 발견한 자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본 자들, 여기에 나오는 자들처럼 그 얼굴로부터 숨는 대신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는 그러한 자들인 우리의 장래는 얼마나 복스런 것인지!
“그들(혹은 “그”)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6:l7)
우리는 “어린 양의 진노”라는 이 놀라운 역설적인 표현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진노와 어린 양은 조화를 이루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어린 양처럼 비공격적인 짐승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 “어린 양”이 상징하는 그분-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 –보다 더 인자하고 온유하고 동정적인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복스런 분은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러나 실로 이 그리스도를 거절한 세상에 그 진노를 쏟아부으실 이는 그토록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 자신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장차 올 진노는 성경에 “하나님”의 진노로 언급되어 있지만, “저희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실” 이는 예수님이심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살후
그분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에도, 비할데 없는 사랑으로 인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바로 그 구주께서 또한 지옥의 두려움을 말씀하시고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갈 곳이 있음을 죄인들에게 경고하신 분이기도 했습니다. 죄인들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 한 마리 어린 양으로서 도수장으로 끌려가셨고, 그 무서운 고통과 수치에 자신을 굴복케 하신 그분이 그분의 사랑을 비웃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는 모든 이들을 두려운 진노 가운데 심판하실 바로 그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마십시오. 즉, 어린 양의 진노는 두려운 일이 될텐데 그것은, 사랑-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비웃는다는 것은 영원한 파멸만을 의미할 뿐인 까닭입니다. 그날에 누가 능히 서리요? 오직 영원한 반석 위에 견고히 서 있는 자들만이 그러합니다. ♠
(199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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