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적인 질문들
질문 : 어떤 신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장기간 모임의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변 : 이것은 슬픈 상황입니다. 이와 같은 질문을 보면서 그 신자가 모임의 교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지침은 히브리서 10:25절에서 발견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이 말씀이 쓰여지던 당시에 집회 참석에 충성되지 못했던 어떤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강조점은 “권하여”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우리는 피차에 격려하고 권해야 하며 특히 연약한 신자들에게 그렇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신자들이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충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모임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듯 보입니다.
무질서한 삶을 다루는 또 다른 구절은 데살로니가후서 3:15절에서 발견됩니다. 이 구절이 징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징계의 실시가 필요할 때까지는 그 상황을 바로잡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믿음의 길에서 이탈한 신자의 경우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로들이 그를 방문할 것입니다. 만일 이 신자가 모임을 향한 그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또 계속해서 집회에 불참한다면, 편지를 쓰도록 권합니다. 편지의 내용은 모든 신자들이 그를 그리워하고 있으며 그의 회복을 위해 많은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모임은 그 신자가 스스로를 여전히 교제 가운데 있다고 보는지 아니면 스스로 모임을 멀리 떠났는지를 알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자신을 교제 “안에” 있는 자로 여기려 한다면 그는 집회에 참석함으로써 교제를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만일 이러한 요구가 일정 기간 동안 무시된다면 그를 교제 “밖에” 있는 자로 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그 신자와 모임에 알려야 합니다.
만일 시간이 지난 후에 이 신자가 다시 나타나서 교제 안에 들어 오고 싶어 한다면 그는 장로들에게 그러한 요청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장로들은 그의 소원이 진심인지를 분별할 것입니다.
질문 : 형제가 두세 명 뿐인 작은 모임에서 때로는 한 형제만 집회에 참석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 형제 혼자서 집회를 인도해도 될까요?
답변 :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이상적인 상황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모임의 간증을 위하여 집회는 열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몇몇 충성된 자매들은 집회에 참석하기 때문에 짧은 시간이라도 집회를 갖는 것이 좋습니다. 1시간 혹은 1시간 30분의 집회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집회 시간을 얼마나 가질지는 여건을 따라서 결정하면 됩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집회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찬송을 몇 곡 부릅니다. 그런 다음 그 형제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는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또는 떡과 잔을 위하여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와 성경읽기를 위한 주중 집회일 경우라면 그 집회는 찬송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형제가 찬송을 잘 선창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런 후에 그 형제는 모임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픈 이들과 궁핍한 이들을 위해서, 주님의 일을 위해서, 그 외의 기도제목들을 놓고서 말입니다. 그는 유일한 형제이므로 성경읽기 집회를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에 하나님 말씀의 한 부분을 읽고서 격려의 이야기를 몇 마디 할 수 있습니다. 함께 모여 짧은 시간만 집회를 갖더라도 그것은 모임의 간증을 유지하는 데에 기여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때때로 보듯이 주님께서 그 작은 모임의 교제에 성도들을 다시 더하시는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형제가 목사와 같이 집회들을 주관하지 말아야 함을 압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목사처럼 행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한 간증으로서 모임 집회들을 지속적으로 갖는 문제입니다.
질문 : 복음집회를 열었는데 구도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래도 그 집회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나요?
답변 : 복음 메시지보다 더 좋은 메시지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집회는 공적 집회이기 때문에 그 강조점은 복음에 있어야만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이들이 그 집회에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을 경우 그 메시지는 신자들에게 더욱 초점이 맞추어질 수 있겠지만 그럴 때에도 그 메시지에는 복음이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 증거는 두 가지의 목적을 갖습니다.
* 그 메시지가 구원받지 못한 이들의 마음에 도달하여 그들을 구원받게 하는 것.
* 그 메시지가 구원받은 이들의 마음에 도달하여 구원받은 즐거움이 커지게 하는 것.
회개의 시편인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주님께 하나님의 구원의 즐거움을 자신에게 회복시켜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에서 불순종의 죄가 범해졌을 때 기쁨이 사라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각 신자가 하나님의 구원의 즐거움을 간직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데 말입니다. 이 즐거움은 복음 메시지를 듣는 것을 통해서도 다시 얻어질 수 있습니다.
질문 : 다수의 모임들이 수양회를 주최하는 것이 옳은가요?
답변 : 어떤 경우에는 다수의 모임들이 수양회를 주최하기도 하는데 이 모임들 간에 좋은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만 하다면 이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수양회를 주최하는 모임들 가운데서 어떤 형제들을 강단에 세우느냐의 문제를 놓고서 견해 차이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지역교회의 자치권에 관한 성경의 원리를 생각해볼 때, 우리는 다수의 모임들이 수양회를 주최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수양회는 주최하는 모임의 장로들의 감독 아래 열리는데 다수의 모임들이나 많은 모임들을 대표하는 형제들의 무리는 그 권한을 가질 수 없고 만약 그들이 그러한 권한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지역교회의 자치권을 부정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 지역에 모임들이 더 있나요? 그 모임들도 참여하여 수양회 기간 동안에 식사 제공 및 다른 필요한 일들을 돕는다면 그것은 교제의 훌륭한 표현이 됩니다. 그러나 수양회를 주최하는 책임은 한 모임에서 져야만 합니다.
질문 : 모임들 간의 교제는 어느 정도까지 나누어야 하나요?
답변 : 모임들이 성경의 모본을 따르면서 상호간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축복된 일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롬
이것은 로마라는 도시의 모임들 간에 교제가 나누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로마서 16장에서 우리는 로마에 한 모임 이상이 존재했음을 알게 됩니다. 어쩌면 심지어 세 모임이 존재했을지도 모릅니다.
골로새서 4:16절 역시 우리에게 모임들 상호간의 교제를 보여줍니다.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에 보면 접대는 당시에 커다란 봉사였습니다. 많은 모임들이 아시아로부터 유럽까지의 긴 “교역로”에 걸쳐 있었고 당시의 경제 활동을 감안할 때 분명 여러 모임들 간에 활발한 접촉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 모임은 다른 모임들과 교제를 나눌지의 여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모임의 일들이 비성경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그 모임과 거리를 둘 수 있는데 이것은 절대로 그 모임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아닙니다. 지역교회의 교제는 구원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고 교리적인 진리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모임의 장로들은 하나님 말씀의 원리들을 보존하면서 양무리를 보호할 책임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과거에 심각한 잘못들이 범해졌습니다. 어떤 영향력 있는 형제들이 상호 교제의 문제에 있어서 다른 모임들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어떤 모임이 그들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할 경우 그들은 그 나라 전체의 다른 모임들에게 그리고 심지어는 다른 나라들의 모임들에까지 편지를 보내서 억지로 입장을 취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편지들은 과거에 보내졌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에도 보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임들의 교제권을 유지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한 가지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각 지역교회의 독립성에 대한 완전한 부정입니다. 모임들을 묶어서 연맹을 결성한다면 우리는 분파적인 방식으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 : 출교를 할 경우에 다른 모임들에게 그 사실을 문서로 알릴 필요가 있나요?
답변 : 이와 같은 종류의 실행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해를 끼쳐왔습니다. 어떤 교제권의 모임들은 자신들에게 이른바 “몸된교회”의 정결함을 감독할 책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지역교회의 교제로부터 출교된 신자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그 지역교회의 교제로부터 출교된 이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된교회에서도 출교된 것일까요? 성경은 오순절 날 성령님의 강림 이후 그분의 백성을 위한 주님의 재림 때까지의 모든 거듭난 신자들은 그분의 몸된교회에 속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한 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입니다!
왜 출교 공문을 사방으로 보내야 하나요? 이 편지들을 보낼 경우 가까운 지역의 모임들에게 보내야 하나요, 아니면 나라 전체의 모임들에게 보내야 하나요, 아니면 전 세계의 모임들에게 보내야 되나요?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요? 모임들은 조직적인 교제를 형성하고 있지 않습니다! 각 지역교회는 독립성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인간의 조직적인 중앙 통제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몇몇 모임들이 소수의 영향력 있는 형제들에게 다소간 통솔을 받지만 각 모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단위로서 그 모든 활동들에 대하여 주님께 책임을 집니다.
출교된 신자가 다른 모임에서 교제하지 않을 것을 무엇이 보장해 주나요? 그 대답은 아주 명쾌합니다. 천거서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명령을 계속 따르면 됩니다! 천거서에 대한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이동 중인 성도들이 자기 모임의 천거서를 지참하고 다니면 다른 모임들에서도 즐거운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질문 : 때로는 모임 안에 분열이 일어나서 두 무리의 신자들로 나뉘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다른 모임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답변 : 이것은 모임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비극적인 일들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모임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나 다른 모임들이 한 무리의 신자들을 출교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들은 무엇으로부터 출교된다는 말입니까? 전 세계적인 교제권을 믿는 어떤 모임들은 이와 같은 비성경적인 방식으로 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임들은 조직적인 교제를 형성하고 있지 않습니다. 각 모임은 그 자체가 하나의 단위이며 다른 모임들과 관련하여 어느 모임과 교제를 나눌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모임이 성경의 진리에서 고의로 벗어나려 함을 알게 되는 경우라면, 그 모임의 형제들은 그곳에서 떠나기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분열이 발생하면 어떤 모임들은 그 문제에 관여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문제가 그 지역교회 안에서 해결되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문제가 악화될 경우 잘못은 양면 모두에게 있고 모임들이 다른 모임의 문제들에 간섭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도와 달라는 요청이 온다면 신뢰할만한 형제들 몇 명이 그 문제를 의논할 수는 있습니다. 여기에는 위로부터 오는 많은 지혜가 필요하며 이 형제들은 그들의 접근에 있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편파성을 배제한 마음과 그 성도들을 향한 커다란 사랑을 가지고서 불화의 모든 요소들을 하나님 말씀의 빛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문제마다 원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문제의 안타까운 확대에 초점을 맞추는 일을 막기는 어려우나 유일한 해결책은 그 문제의 원인에 집중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안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엎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분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순종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질문 : 어느 형제가 다른 모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올바른 일인가요?
답변 : 만일 그 형제가 유익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영향이 될 것입니다. 모임들은 유능한 형제들의 사역으로부터 유익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만일 한 형제가(주님의 일로 천거 받았든 천거 받지 않았든) 정치적인 상황을 조성하려는 그릇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위험스런 일입니다. 외부의 형제는 다른 모임들을 향해서 그 성도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섬김을 행할 뿐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모임의 내부적인 문제에 개입하도록 초청을 받은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각 모임은 자치권을 갖고 있는 하나의 단위이며 따라서 모든 활동들에 대하여 주님께 책임을 집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8:21절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질문 : 재정의 사용은 장로들이 다루어야 하나요, 아니면 모임의 모든 형제들이 다루어야 하나요?
답변 :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직접적인 대답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재정을 다루는 것은 커다란 책임이 따르는 문제임을 압니다. 떡을 떼는 집회 후에 적어도 두 명의 형제들이 재정을 처리해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한 사람은 들어온 헌금을 은행에 넣어두는 일을 책임지며 다른 한 사람은 장부 기입을 담당합니다. 일은 언제나 투명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이 좋음을 우리는 압니다. 따라서 재정을 맡은 두 형제는 오전 집회 직후에 은밀한 곳에서 그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신자들이 공개적으로 보는 데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이것은 불신의 문제가 아니라 집합적인 책임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재정을 주의 깊게 다루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그는 성도들에게 연보에 대하여 가르쳤는데 거기서 우리는 주목할 만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재정 문제를 높은 수준의 영적인 문제로 끌어올렸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는 연보의 태도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는 연보를 마땅히 영적으로, 자원함으로, 기꺼이, 비례적으로, 후하게, 결심을 따라서, 즐거움으로 드려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연보는 심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둘 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고후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연보”를 예루살렘에 보낼 때, 사도 바울은 책임 있는 방식으로 이 일을 다루었습니다.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형제를 디도와 함께 보냈는데(고후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재정의 사용은 장로들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모임의 연보이기에 모든 형제들을 거기에 관련시키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자매들 역시 어떤 필요를 알게 될 경우 장로들에게 그것을 알려야 합니다.
모든 형제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모임들이 있습니다. 보통은 떡을 떼는 집회 후에 모여서 재정의 사용에 대해 결정을 내립니다. 이것은 짧은 시간이지만 커다란 중요성을 갖습니다. 이때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형제들의 마음이 훈련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의논은 주님의 마음을 아는 지혜를 달라는 기도로 시작되어야 하며 재정 사용에 대해서 주님의 축복을 구하는 기도로 끝나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았고 받은 그것을 주님께 드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질문 : 재정 사용의 내용은 무엇인가요?
답변 : 재정 사용은 다음과 같은 용도에 쓰입니다.
(1) 집회소나 건물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 보험료, 전기세, 가스비, 임대료, 세금 등등.
(2) 교회학교나 전도에 들어가는 비용.
(3) 정기적으로 모임에 유익을 주는 주님의 종들을 위해서.
(4) 모임을 돕기 위해 비정기적으로 멀리서 오는 주님의 종들을 위해서.
(5) 먼 지역에서 주님의 일에 수고하는 주님의 종들을 위해서.
(6) 육체적인 이유 때문에 더 이상 섬길 수 없게 된 주님의 종들을 위해서.
(7) 주님의 종들의 과부들.
(8) 양로원, 병원, 진료소, 학교, 출판 사역, 라디오 사역 등을 지원.
(9) 집회소, 의료 센터, 학교 등의 건축을 지원.
(10) 자연 재해들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 돕기.
이 목록은 우선순위를 따라서 적어놓지 않았습니다.
만일 상당한 액수의 돈이 건축 계획이나 구제 사역에 들어간다면 최소한 두 명의 형제들이 책임을 지고서 그 일을 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고린도후서
질문 : 전임사역자를 천거하는 일이 필요한가요?
답변 : 우리는 지역교회에 속하지 않은 주님의 종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역시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천거되었습니다”(흠정역, 행
질문 : 이러한 모임은 다른 주님의 종들보다 자신들이 천거한 그 일꾼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줄 의무가 있나요?
답변 : 사도 바울은 안디옥 모임의 천거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가 그 모임에서 지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는 천거한 모임이 자신들이 천거한 일꾼에게 최대한의 지원금을 제공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히려 마게도냐의 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고후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모임들은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주님의 종들에게 지원금을 보내 주는 일에 있어서 선택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각 모임은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자유롭게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 역시 자신의 본 모임에서 실행하는 이와 같은 동일한 원리들을 계속 지켜야 합니다. 선교지에 있는 주님의 종이 본 모임에 있을 때와 달라지면 때때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질문 : 선교사와 그를 천거한 모임 사이에 이른바 휴가 기간을 상의해야 하나요?
답변 : 어떤 모임에서 선교사를 천거하면 그것은 그 모임의 형제들이 그 주님의 종을 완전히 신뢰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는 자신의 모든 활동들에 대해 무엇보다 주님 앞에서 책임을 집니다. 휴가 기간이 필요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그 모임은 주님께서 선교지에서 행하신 소식을 듣습니다. 그런 다음 그 선교사가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지만 이 때 그는 부르심을 따라 선교지에서 보낸 시간이 짧지 않아야 합니다. 선교의 초창기에는 본국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선교사들이 있었지만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선교지에서 최소한 5년을 보내 후에 휴가를 갖는 것이 보편화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시대가 변하여 비행기로 여행하는 일이 쉬워졌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결코 실현 가능성의 문제가 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의 문제여야 합니다!
질문 :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답변 : 주님의 종은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천거됩니다”(행
한 형제를 주님의 일로 천거한다고 해서 천거한 모임이 그의 지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부르심이 진실로 하나님에게서 왔다면 모든 필요가 채워질 것입니다. 주님의 종을 보살피는 것은 주님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분의 종들을 어떻게 돌보셨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수많은 예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기적적인 공급까지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의 종들에게도 생활비가 부족한 시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 처할 때조차 그 문제의 해결이 사람들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는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커다란 물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이 여전히 실천 가능한가?”입니다. 물질주의는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지 못합니다. 그것은 또한 모임들과 주님의 종들에게도 역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믿음으로 살고 있지 못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현시대의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님께 구하는 기도를 드린 적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에서 살았던 세대들의 주님의 종들은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물질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세대의 종들도 곳곳에서 그와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볼 때 우리는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고, 따라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실제적인 영적 의미를 띠지 못할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삶의 모든 면에서 주님을 전폭적으로 의뢰하도록 주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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