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여기서의 문제는 물론, 교회의 집회에서 통역이 없이 방언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떤 일이 그저 습관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세움을 입지 못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 절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외국어로 말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청중 속에는 연로한 때문이든, 뒷자리에 멀찍이 앉았기 때문이든, 듣기가 어러운 사람들이 늘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에게는 말하는 사람의 음성이 너무 작아 이야기의 흐름을 놓친다는 것이 큰 실망거리입니다. 사랑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므로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합니다.
사랑은 또한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멧세지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멧세지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사람들이 듣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복잡하고 모호하고 난해한 논조를 사용한다면, 우리는 본래의 목적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한 설교자가 말씀을 전하기 위해 통역인을 데리고 극동지역을 방문했습니다.
그의 멧세지의 첫마디는 “비록 모든 것은 구체적인 영역과 추상적인 영역의 두 범주로 나눠지지만····”이었습니다. 그러자 통역인은 이가 빠진 할머니들과 어리둥절해하는 아이들로 이루어진 청중을 내려다보며 “저는 여러분에게 주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미국에서 건너왔습니다”라고 통역을 했습니다. 그 때 이후로 줄곧 멧세지는 천사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기독교 잡지의 기사에서 저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우연히 접했습니다:
“통시적인 목록의 표준 자료, 선택적이 아니라 실존적인 적합성을 지닌 작품; 정상에 이른 의식의 연속체; 정경적인 확증의 언어; 한계수준의 전형적인 우연성 “이러한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문구를 이해하도록 강요받는 사람들은 얼마나 가련한지요! 우리 모두 그러한 말로부터 건짐을 받기를!
TV나 레디오의 일반 프로그램은 초등교육 수준의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편성된다고 합니다. 구속의 멧세지로 세상 끝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명심해야 할 점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받으신다는 멧세지를 분명하고 평이하게 전해야” 합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1만 마디를 하는 것보다 이해할 수 있는 다섯 마디를 하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
(1995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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