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지역교회의 영접
영접이라는 주제보다 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지역교회의 실천과 관련된 주제는 드물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최종적인 책임은 개별적인 지역교회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한 지역교회가 다른 모든 문제에서는 주님에 대하여 책임이 있고,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교회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고 가르칠 수 없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원하고, 그리고 같은 마음을 가진 다른 지역교회들과 교제를 원하는 사람들은 영접에 있어서 고의로 다른 지역교회들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들은 믿는다.
이러한 무시의 나쁜 경우는 성경적인 이유로 다른 지역교회로부터 출교된 것으로 알려진 사람과 아직도 징계 중에 있는 사람을 지역교회가 영접하는 것일 것이다.
이 책 전체를 통하여 종종 지역교회의 영접에 관하여 언급했다. 이 장의 목적은 이 주제의 여러 측면들을 함께 모으는 것이다. 지역교회로서 우리는 적어도 다섯 가지 모양으로 영접을 한다.
① 지역교회에 영접된 적이 없는 믿는 자의 최초 영접(행
② 거주지를 옮기거나 필요에 의하여 다른 지역교회로 가야 할 믿는 자의 영접(행
③자기 본 지역교회가 아닌 다른 지역교회에 짧은 시간 동안 보내기 위하여 방문자로 오는 믿는 자의 영접(롬
④ 징계로 출교되었던 자가 지역교회로 되돌아오는 회복된 믿는 자의 영접(고후
⑤ 교사들과 그들의 가르침의 영접(행
지역교회의 장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권위로 가지고 있다. 우리는 디모데전서
우리가 강조하는 첫 번째 요점은 최초의 영접은 만찬에 대한 것이 아니고, 모임에의 영접이라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지역교회 교제의 가장 큰 특권 중 하나이다. 그것은 주의 만찬이지, 어떤 사람들이 제시하는 것 같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의 상(겨)이 아니다. 고린도전서를 주의 깊게 읽으면, 그 안에서 가르친 주님의 일의 중요성을 확증할 것이다(이 책의 5장을 보라). 그것은 레위기 3장의 화목제(和睦祭)의 상(床)도 아니다. 화목제는 분명히 화목에 대한 죄인의 감사와 연결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믿는 자들이 구원 받자마자 이 기쁨을 누린다.
우리들이 강조할 필요가 있는 두 번째 요점은 영접은 상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교제라 불릴 수 없는 것이다. 지역교회와 그 가르침들, 그리고 실행들을 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을 영접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본을 따라 하는 것으로 여길 수 없다. 교제와 영접은 서로 경험하는 것이며 누리는 것이다. 이 상호 영접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지역교회는 교파주의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간증)이다. 지역교회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그가 있던 교파교회로 되돌아간다면,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왜 이러한 가르침이 필요한가? “만약 모든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몸된교회 안에 있다면, 모든 믿는 자들은 어느 지역교회에나 영접되어야 한다”라고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만약 이것이 독자의 의견이라면, 우리는 이 점에서 3장으로 돌아가 영적인 몸(몸된교회)과 지역교회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주의 깊게 읽을 것을 권한다. 몸된교회(한 몸)에 대한 그들의 신념에 기초한 영접의 형식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생활이 깨끗하고, 가르침이 순전하며, 본 지역교회에서 징계 가운데 있지 않는 자를 영접한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3장에서 지적된 것처럼, 거기에는 지역교회 장로들이 완전히 낯선 사람이 이 요구들에 부합되는지 어떤지를 어떻게 알 것인가라는 큰 문제가 남아 있다. 우리는 성경이 이 주제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게 말하고 있으므로 성경 그 자체가 말하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신약성경에서 지역교회들이 놓여졌다. 지역교회들은 지리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 지역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증거(간증)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정기적으로 모이는 주어진 지역에 있는 믿는 자들로 형성되어 있다. 성경에는 그들이 우연히 혹은 간혹 만난다는 암시는 없다. 믿는 자들의 집단적인 증거(간증)에 관해서는 가끔이라는 것은 없다(고전
그런 질문에 대하여 종종 주어지는 대답은, 신약성경 시대에는 이상적인 조건들을 가져, 믿는 자들은 모두 한 지역교회의 교제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 비해서, 오늘날은 매우 다르며, 믿는 자들은 많은 조직들과 체제들로 나누어지고 흩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대답 속에는 신약성경의 기준을 쓸 수 없다는 추론이며, 혹은 혼란한 시대에 적용될 의도가 아니었다는 암시 혹은 더 심하게 우리들의 환경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만약 우리들이 신약성경을 우리의 절대적인 권위로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디에 호소할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만약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적용될 수 없다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권위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세상 바로 끝까지 모든 시대에 걸쳐서 온전히 충분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교파적인 체제로부터 우리를 불러내셨는데 다시 그리로 자진해서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불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르침을 받고도 그 가르침을 거절하는 사람들과 결코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 차별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큰 인내와 친절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실천과 교훈으로 가르치기를 노력해야 한다. 배우기를 원함이 있는 그곳에 배우지 못한 자의 방[혹은 자리: 한글 개역성경에는 “무식한 처지(고전
1) 최초 영접
예루살렘에 있었던 최초의 지역교회는 매우 축복받았다. 그 가운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많았고, 이 지역교회에서 그들은 큰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큰 은혜가 그들 위에 있었다(행
2) 배우지 못한 자의 자리(한글 개역성경에는 ‘무식한 처지’)
고린도전서 14장 16절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the room of the unlearned)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는 성경에서 뒷자리를 말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구절의 올바른 해석은, 말하는 방언에 대해서 배우지 않은 자이며, 지역교회의 교제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상관없다는 것이라는 말도 듣는다. 나는 이것이 뒷좌석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성경이라고 믿지 않으며, 이것이 이 구절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라고 믿지도 않는다.
이 서신에서 바울이 마지막까지 완전한 전개 없이 한 주제를 소개하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드문 일이 아니다. 한 예는 지역교회 집회에서의 자매들의 참여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절에 있는 ‘무식한(unlearned)’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만일 그것이 방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한다면, 지역교회의 다른 사람들은 방언을 알아듣는데 그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로 나머지 지역교회 사람들과 구별되게 된다. 그러나 나머지 지역교회 사람들은 한 형제가 영으로 축복할 때 말하는 방언을 이해했는가? 14장의 2,4,6,9, 11 그리고 19절을 주의 깊게 읽으면, 아무도 방언을 알아듣지 못했다(2절)는 것을 보이는 데에 상당히 유익하다. 사실 방언을 말하는 자도 방언을 이해하지 못했다(l4절). 이것은 매우 딱한 일이다. 왜냐하면 배우지 못한 자의 좌석(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는 방언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는 지도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언을 모르는 것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방언을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25절). 이것이 그가 믿지 아니하는 자와 연계되어 있고 ‘온교회’의 지체가 아니라는 곳인 23-25절에서 나타난 의미이다.
‘무식한(unlearned)’이, 자의적인 지식의 정도가 지역교회의 출입문이라는 것을 시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무식한 자(the unlearned)가 교제를 위하여 준비할 것을 배워야(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전
뒷좌석은 이 한 구절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어떤 사람들은 “왜 만찬에서만 ‘뒷좌석’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그 이유는 고린도전서
‘뒷좌석’이라는 표현은 썩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지역교회의 ‘교중 사람들’과 ‘외인들’ 사이에 경계선이 분명하다면 위치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들 가운데 다수는 건물 앞에 ‘뒷좌석’이 있었던 건물에서도 주님을 기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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