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지역교회의 영적인 의존관계(Ⅲ)
-제사장직에 있어서-
1) 봉사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하심
모든 믿는 자들의 제사장직에 관한 소중한 진리는 종교개혁 때 회복되었다. 가톨릭의 잘못을 깨닫고, 마르틴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다 제사장들이다. 이에 반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 말하고, 권위 없이 사람의 전통과 습관으로 말한다’라고 썼다. 성경의 빛에서 보면, 프로테스탄트 체제 안에서 전문적인 성직자주의가 일반적으로 사제직을 대신하고, 성직자와 평신도 제도가 여느 때와 마찬가지일 정도로 기독교계에서 견고하게 확립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하나님의 일에서 전염병과도 같은 모든 전문 성직주의와 형식주의를 피하기를 얼마나 주의해야 되겠는가! 그것은 우리 발이 걸리기 쉬운 올무와도 같이 여겨진다.
물론 마르틴 루터가, 믿는 자들은 모두 사제 같은 중보자 없이 주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우리는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 신약성경 제사장직의 정의
구약성경에는 제사장 가족이 있었으나, 신약성경에는 모든 믿는 자들은 거룩한 제사장들의 부분을 이루며 제사장의 나라이다(계
히브리서 5장 1절에 있는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은 우리들의 제사장직에 대한 이해에 대단히 유익한 말씀으로, 우리들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① 그는 사람이었다
②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③ 하나님께 속한 일에
④ 사람을 위하여
⑤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히브리서 5장 1절은 그 자신의 죄와 백성들의 죄 둘 다에 대한 속죄제를 드린 것이 추가되었다. 죄를 위한 많은 제사들과 우리의 대제사장의 일 사이의 큰 대비는 히브리서의 주요 주제이다. 우리 주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음에(히
우리들은 출생의 권리로 인한 거룩한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지성소 안의 모든 것
주님 보혈로 정케했네
주님 보좌 앞에서 주님 자녀 엎드려
우리 하나님 예배하네”(lames G. Deck)
3) 제사장들의 집단적인 특징
마르틴 루터가 이해했던 것처럼, 우리가 자녀로서 아버지께 나아가고 주님의 비밀한 임재에서 우리 무릎을 꿇을 때, 휘장 안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늘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다. 그러나 제사장직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히브리서 5장 1절 안에서 우리들에게 준 정의에 따라,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있는 봉사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벧전
이것은 기도와 찬양에 대해 사람이 세운 모든 제약(制約)들이 제사장직의 기능에 있어서 성령의 엄위한 지배를 방해하는 그 이유이다. 한 사람이 목사 혹은 사제로 임명된 곳에서 신약성경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불가능하다. 만약 성령이 예배에서 믿는 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 한 사람이 제사장으로 기능하고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한 조건 아래서 제사장직이 기능할 여지가 없다. 니골라당에 대하여 주님으로부터 사용된 말이 놀랍지 아니한가! 니골라당은 간단하게 평신도를 다스리는 자라는 의미이다. 주 예수님께서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라고 우리들이 아는 것처럼, 성령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가운데 제사장들을 감동시킨다. 즉 성령은 자매들을 예배에서 결코 목소리를 내도록 감동시키지 않을 것이다. 고린도에는 많은 무질서가 있었다. 고린도전서
4) 은사와 제사장직의 구별
우리가 9장에서 본 대로, 집사의 일은 실제적이거나 영적일 수 있으나, 지금까지 신약성경에서 기술된 대부분의 집사 일은 영적인 것이다. 이 집사의 봉사는 은사의 실행을 포함한다. 이것은 전도자 혹은 교사의 수고일 수 있으며, 양 무리를 돌봄에 있어서 목자의 일의 측면을 포함한다. 집사의 일은 구약의 레위적인 본에 상응하며, 하나님의 부르심과 특정한 사역에 부합됨을 포함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의 실행이 다.
몇 가지 이유에서 어떤 사람들은 집사의 일과 제사장의 일을 혼돈하고 있다. 신약성경에 있는 제사장들은 은사와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구원 받은 모든 사람들의 생득적 권리이다. 제사장들의 기능을 제한하는 것은 은사의 부족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따뜻한 마음의 결여이다. 어떤 사람들은 공적인 사람들이며, 지역교회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들을 표현하는 데 더 쉽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예민하게 자기자신의 부적절함을 느낄지 모르며, 다른 사람들이 기도나 찬양에 자기보다 더 잘 참여할 수 있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그 자신의 영으로 누릴 수 있다. 그의 감사의 목소리 표현은 하나님께 더 향기로울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길고 연습한 감사보다 성도들의 영혼을 더 울리게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그리스도께 예배할 가치를 인정하는 마음이 필요하며, 그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하도록 성령이 감동시키는 영혼이 필요하다(빌
5) 제사장 봉사와 레위인 봉사 사이의 관련
민수기 3장과 4장 같은 장들을 무심결에 읽는 것만으로도 제사장의 봉사가 레위인들의 봉사보다 우선권을 가지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레위인의 봉사는 결코 혼자서 할 수 없다. 우리들을 위한 분명한 교훈이 이 안에 있다. 지역교회의 복음 증거의 부분으로 복음 전함에 책임 있는 형제들은 레위인의 봉사 안에서 직분을 수행한다. 그들은 제사장 직분을 또한 수행했는가? 그의 제사장직에 대하여 일관되게 행하지 않는 사람이 복음을 전한다거나 가르친다면, 그것은 의심스럽다. 만찬 상 ‘찬미의 제사’에서 목소리를 내지 아니하고서도 복음을 전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비성경적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복음집회 전 기도집회에서 우리는 종종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에 지적(知的)으로 동참하는 많은 형제들을 보고 감명을 받는다. 이것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만찬에서는 들리는 목소리의 횟수가 그렇게 적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빈곤과 예배의 부족의 강한 증거이다. 다른 한편 구원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 하나님께 단순하고 마음에 와 닿는 감사의 표현을 듣고 얼마나 자주 우리 마음이 감동했던가! 그러나 우리 자신의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에 따라 드릴 것이 준비되어야 한다.
6) 신약성경 제사장들의 제물
다시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우리들의 예들을 끌어온다.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지니라(출
이 구절은 집단적이며 또한 개인적이다. 또한 이 구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라이든가 “드리라”와 같은 신약성경에서 제사장들과 관련되는 주요 표현들 몇몇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모든 제사들은 우리 자신이라는 이 제물에 기초한다. 우리는 종종 아이작 와츠(Isaac Watts)에 의하여 씌어진 가사를 노래할 때 감동 받는다.
“만물이 모두 다 내 것이라 하여도
그 얼마나 작디작은 제물이련가
놀라워라 그 사랑 하나님 사랑
내 마음 내 생명 내 모든 것 원하시네”
우리들이 우리 자신을 드렸을 때, 찬미의 제사가 따를 것이다(히
우리는 감사의 가장 단순한 표현을 인정해야 하는 한편, 그리스도를 아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영광으로 들어가며, 예배에서, 주님 자신의 인격의 뛰어나심과 주님의 사역이, 죄 용서의 축복과 영생의 확신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것보다 더 높게 일어나야 될 것을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우리가 받은 그 무엇으로 차 있는 것이 예배의 높은 수준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기쁨과 주님의 사역의 가치가 참된 예배의 높은 수준이며, 이 시대에 저 성령의 활동이 그것을 인정한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요
우리들이 집단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은 또한 제사장적인 기능이다. 다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아버지 앞에 들어가는 것과 지역교회 기도집회에서 집단적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둘 다 굉장한 특권이다. 그러나 그 둘은 구별된다. 시간은 이 두 특권 안에 있는 한 요소인데, 반대의 의미에서 그렇다. 하나님과 홀로 함께한 시간을 대신할 것은 없다. 기도에서 하나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우리들 가운데 매우 적다. 그래서 기도집회에서 우리들의 연약함을 고백하는데 시간을 써버린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역교회의 기도집회에서 만날 때, 우리는 간결하게 핵심을 기도해야 한다. 우리들의 기도는 분명해야지, 많은 것을 산만하고 길게 해서는 안 된다. 5분이 넘는 기도는 분명히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도들을 피곤하게 하고, 그 목소리에 대하여 귀를 닫게 할 것이다. 지역교회의 기도집회에서 형제들이 적으면 산만한 기도를 오래 기도하는 것보다 한번 이상 기도하는 것이 더 낫다. 만약 몇몇 형제들이 그다지 길게 기도하지 않고 한 기도로 모든 필요에 대하여 하나님께 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마 더 많이 기도에 참여하려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은 것을 기도하도록 격려 받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긴 기도가 몇몇 형제들의 지역교회에서 하는 평균 기도시간보다 휠씬 더 짧다. 주님께서는 공적인 기도를 길게 하라고 명하지 않으셨다(마 23:148), 막
기도의 참된 의미는 이 책에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주제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 이라(요일
이 고찰이 신약성경 제사장들의 위대한 특권에 더 풍성히 우리들을 들어가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주시기를 빈다.
8) 한글 개역성경에는 없음. 그러나 난 하에 ‘어떤 사본에, 14절에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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