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주권을 나타냄
-교회의 머리 되심-
다음 두 가지 물리적인 요소는 잡히시던 날 밤에 주 예수님으로부터 택하여졌으며(고전
마지막 두 가지 물리적인 것을 다른 것들과 연결시키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여자들의 가리운 머리는 침례와 주의 만찬에 비하여 중요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은 진리이다. 하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분명하게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그것들과 연결시킨다. 이 장은 그 서신의 새로운 부분을 드러낸다. 바울은 개인적인 자유의 영역을 다루었으며, 믿는 자들을 안내하는 영적인 원리를 주었다(고전 7장-9장). 11장을 시작하면서 즉시 바울은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절)”라고 하여 개인적인 자유의 생각을 제거한다. 이것은 명령이다. 이런 종류의 말은 2절과 16절에도 보인다.
어린이들에게 교훈들이 주어지면, 그들은 자주 왜라고 묻는다. 그들의 지적 성장은 대답과 이유를 찾는다. 이것은 건전하며, 지혜로운 부모들은 인내를 보이며 이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주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자녀들이 왜라고 물으면, 그들은 때때로 꾸중들으며, 만족스러운 대답을 거의 얻지 못한다.
영적인 영역 안에 세 종류의 ‘이유’가 있다.
① 말씀적인 명령으로서의 이유
② 영적인 의미로서의 이유
③ 신실한 동기로서의 이유
내가 아주 어린 그리스도인이었을 때, 첫
번째 ‘이유’가 나를 만족시켰다. 성경이 그것을 말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순종은 모든 하나님의 참된 자녀들에게 성령으로 기록된 영적인 법칙이다. 그것은 거룩한 생활의
매우 분명한 영적인 표시이며, 그 중요성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믿는 자가 여기서 멈춘다면 그는 대단히 많은 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우리는 두번째 ‘이유’로 위협을 느껴서는 안 된다. 순종은 성경적인 명령으로서의
이유에서 선언되어졌다. 그러나 올바른 인식과 성경적인 이해는 영적인 의미로서의 이유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 세 번째 종류의 ‘이유’는 신실한 동기로서의 이유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명령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요
첫 번째 이유가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며, 다른 이유에 대한 대답을 방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애석하게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위험한 태도이며, 율법체제로 실제적인 거룩에 도달하려는 시도에 매우 가까워진다. 이것은 로마서 7장에 나타난 사람의 잘못이었으며, 그 사람은 율법주의는 결코 참된 영적인 것을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을 결국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어린 그리스도인이었을 때, 나는, 지역교회가 함께 모일 때 여자들의 머리에 너울을 쓰는 이유를 아는지 질문 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한 첫 번째 ‘이유 에 대한 대답은 알았다. 그러나 가린 머리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해야 했다. 그 질문을 한 그 사람은 참된 목자였다. 그날 그는 나에게, 모든 성경 안에 있는 가장 위대한 진리 중에 하나인 모든 만물에 있어서 주 예수님의 머리되심의 진리를 소개했다. 나는 그 때 내가 그 영적인 의미로 들어갈 때만 하나님의 계시를 올바르게 분별하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그 교훈의 충격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머리 되심의 중요성은 고린도전서 11장
가르침의 질서 안에서 보여질 수 있다. 바울은 세상조차도 비난하는 무질서(고전
사람 되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머리 되심의 원리는 성경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창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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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와 그림자 안에 있어서의 머리 되심. |
에베소서 |
1: 19-23 |
인격과 그 목적에 있어서의 머리되심. |
고린도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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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에 있어서의 머리되심. |
골로새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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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함에 있어서의 머리되심. |
히브리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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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그 능력에 있어서의 머리되심 |
고린도전서 11장 3절은 머리 되심의 실행을 이해함에 있어 열쇠이다.
①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 동등이 없음
②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다. - 동등과 순종
③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다. - 동등, 하지만 순종
첫째 원리: 남자의 가리지 않은 머리는 지역교회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을 가르친다(5절과 7절).
둘째 원리: 여자의 가려진 머리는 지역교회는 사람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리가 아님을 가르친다(5절과 7절).
셋째 원리: 여자의 긴 머리카락은 주 예수의 머리 되심에 대한 지역교회의 순종을 가르친다(6절, 10절, 15절).
여자의 머리가 언급될 때, 우리는 3절로 돌아가서 여자의 머리가 남자의 상징인 것을 배운다. 남자의
머리가 언급될 때, 우리는 우리의 중심 구절로 돌아가서 그리스도가 묘사되는 것을 배운다. 이것은, 우리가 7절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해진다. 열쇠로써 3절을 사용하여, 가리지 않은 남자의 머리는, 지역교회가 모일 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며, 그리스도만이, 가려지지 않은 그의 영광 안에서 드러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자연인은 아무리
그 은사가 크더라도 또는 그 자연적인 학식이 위대하더라도 거기에서 드러나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분명히 주 예수의 뛰어나심의 위대한 원리와 연계되어 있으며(골
우리가 여자의 머리에 있는 두 가지 가리움으로 돌아갈 때, 동일하게 중요한 진리를 배운다. 바울은 여기서
머리 되심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바울은 이 점에서, 여자의
잠잠함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
서신서 안에서는, 14장 34절에서 다룬다. 고린도에 있는 지역교회에 무질서가 있었으며, 이것은
바로잡음이다. 하나님의 질서에 호소함으로 바울은 창조로 돌아간다. 태초에 땅의 모든 피조물 즉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보편적인
주권이 사람에게 주어졌다. 사람은 거역으로 이 주권을 잃었다. 그러나
창세기
이 나중 구절은 아담의 죄가 하나님의 목적을 바꾸지 않았음을 보인다. 그것은 영원한 목적 안에서 사람(the Man)이 보편적이고
영원한 주권을 가질 것이라는 것이다(엡
3절에 따라, 남자를 나타내는 여자의 머리는 너울로 가려야 한다. 남자는 지역교회 안에서 드러나서는 안 된다. 거기는 육적인 가운데서 영광을 드러낼 여지가 없다. 자매들의 가리워진 머리는, 지역교회의 모임을 자신을 드러내는 장소로 감히 이용하려고 하는 우리들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이다. 자연인은 시야에서 사라져야 하며, 드러날 사람은 영원한 주권을 가진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the Man)이다. 죄악된 세상에서 주 예수의 머리되심이 부인되는 가운데. 지역교회가 모이는 곳은 어디에서나 자매들의 가려진 머리와 형제들의 가려지지 않은 머리가 보여지며, 거기에 주 예수의 머리되심이 드러난다. 지역교회 안에서, 지금 보인 이 진리는 언젠가 신비한 우주 가운데서도 드러날 것이다(시편 72:5-17). 그래서 여자의 머리를 가리는 너울은 지역교회 모임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고 있다. 여자의 긴 머리카락은 여자가 남자에게 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3절).
여자가 그 머리를 가리는 것임을 분명히 하자. 그
강조점은 머리카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머리 에 있다. 여자가, 그
참된 주인 이외에는 부인하고 있는 것이 주 예수의 머리되심이다. 너울은 여자의 머리를 가리는
것이지, 여자의 영광인 여자의 머리카락(고전
이 장의 6절에서 우리는 두개의 가리우는 것이 기술되고 있는 것을 배운다. 어떤 이들은 15절의 말씀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를 긴 머리라는 관점에서 가리는 것이 한 가지만이라고 잘못 취한다. 주의 깊은 연구자라면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덧쓰는 너울에 사용된 말(5절, 6절, 7절, 그리고 13절)6)과 자연적인 덮는 것(15절-peribolaion)에 사용된 말은 완전히 다른 말이라는 것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15절은 앞 절들에 있는 것처럼 여자의 머리에 쓰는 것보다 오히려, 여자의 머리카락, 즉 여자의 머리에 둘려 있는 덮는 것으로써 기술한다.
다른 사람들은 덧쓰는 것에는 중요성을 주지만 긴 머리카락은 순전히 선택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논의에 6절의 말씀이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고쳐 쓸 수 있다.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또한 그 여자의 머리카락도 자르게 하라, 그러나 그 여자에게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미는 것이 부끄러움이므로, 여자에게 너울을 쓰게 하라.” 5절의 마지막 부분이 이것을 지지한다.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또한(also : 한글 개역성경에는 없음)” 이라는 말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이것은 그 해석에서 중요하다. 이 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너울이 긴 머리만큼이나 중요하며, 둘 다 똑같이 필요한 요지(要旨)이다. 만일 여자가 너울을 쓰지 않으려 한다면 여자는 그 머리카락도 똑같이 깎아야 할 것이다.
여자의 긴 머리카락은,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는 창조에서 남자에게 순복하는 표시이다. 그것은 본래 여자에게 주어진 것이며 여자의
영광이다(15절). 그것은 창조의 시작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가려지는 것이 여자의 영광이라는 표시이다. 이 쓰는 것(머리카락)은 여자의 영광이며, 여자의 아름다움이라는 의미에서라기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적절한 덮는 것으로 여자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가리우는 것이다. 여자의 긴 머리카락은 창조의 질서를 따라 순종하는 한 표시이며, 이것은
그 여자에게 영광이다- 왜냐하면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7절)”라고 여자에게
그 위치를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다. 성령은 이것을 영적인 질서로 끌어올려서, 여자의 가려진 머리와 긴 머리카락이 거룩한 순복의 상징이 되며, 주님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모든 지역교회가 순복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되게 한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0절에서 고린도에 있는 지역교회는 한 교실로써 보여진다. 하나님은
선생님이시며, 천사들은 학생들이며, 머리되심은
그 주제이다. 지역교회 안에서 천사들은 거룩, 하나님의
질서, 머리되심과 순종을 본다. 섬김에서
최초로 보이는 천사는, 한 천사가 하갈에게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순복하라”라고 한 창세기
권위에 순종하는 여자의 머리에 있는 표시는 창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전
15절에서 긴 머리(머리카락)에 사용된 말은 원래 건강하거나 영양분이 많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말이 머리카락의 길이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 두 생각에서 건강한 머리카락이 자랄 것이라는 것과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기에는 길이의 정도에 대한 공론의 여지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라게 하는 대로이어야 할 것이다. 그 영적인 중요성은 너무 커서, 영적인 의미의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뛰어나심과 머리되심의 진리를 가능한 한 풍성하게 나타내게 할 것이다.
여자의 머리카락에 가위를 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만족을 입증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분명한 의지로 확실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깎거나(shorn)’는 자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인되어졌다면, 거기에는 긴 머리카락의 중요성으로부터 점진적 이탈이 있었다. 뒤쪽에 길게 남겨두면서 앞 단발머리를 하기 위하여 앞쪽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고린도전서
이 매우 미묘한 문제에 있어서, 나는
내가 매우 필요하다고 믿는 것을 호소하고자 한다. 한 젊은 자매는, 하나님은 마음을 보시며 이것이 더 중요하므로, 긴
머리카락을 하고 있는 것이 위선적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긴 머리카락은 천사들(10절)에게 있어서 실물교훈이며, 우리는
천사들이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믿을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우리의 동료인 믿는 자들이나
세상도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에게 지적되어졌다.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고전
16절의 말씀은 어떤 성경 독자들에게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쉽게 설명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바울은 “누구든지 이것을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자들의 긴 머리카락과 가리운 머리와, 남자들의 짧은 머리카락과 가리워지지 않은 머리를 요구하는 그러한 규례(풍습)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신중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 연구자는 이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바울은 그가 고린도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이 모든 하나님의 교회 즉 모든 지역교회에서 가르쳤고 실행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기를 바랬다. 이 마지막 구절은, 두번째 덮는 것 혹은 여분으로 덮는 것이 교회가 함께 모일 때 교회들에서 순종되어져야 할 실행이라는 사실을 또한 강조한 것이다(16절).
영적인 의미로서의 이유에 대한 대답이 가장 중요하다. 영적이지 않은 마음은 이 물리적인 요소들을 깎아 내릴 것이다. 침례의 물은 분명히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영적이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만찬에서 떡과 잔을 가볍게 베풀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지역교회에서 자매들의 긴 머리카락과 가려진 머리에서 드러난 영적인 의미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주6: 5절:atakalupto(현재분사수동), 13절: atakalupton(현재분사수동), 6절: katakaluptetai(현재직설수동). 6절: katakaluptestho(현재명령수동), 7절: katakalptesthai(현재부정수동등) - 역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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