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최상의 선언
-주의 만찬-
비록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지역교회 안에 있는 잘못을 바로잡기 위하여 씌어진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고린도에 있는 믿는 자들이 잘못을 고쳤기 때문에 기뻐한다. 만약 그들이 고쳐지지 않았다면 고린도 지역교회는 곧 없어졌을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한 인식 없이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을 바로잡는 방법 중 하나는 그들에게 ‘주의 일(고전
일곱 가지 ‘주의 일’이 고린도전서에서 두드러진다.
① 주의 이름(고전
② 주의 상(床)(고전
③ 주의 죽으심(고전
④ 주의 명령(고전
⑤ 주의 일(고전
⑥ 주의 나타나심(고전
⑦ 주의 만찬(고전
여기서 마지막 ‘주의 만찬’이 본 장(章)에서 다루는 주제이다. ‘주의 일’과 대조하여 ‘세상 일’이 씌어졌으며, ‘주의 일’이 ‘세상 일’에 우선하는 것이 고린도전서의 중요한 주제이다.
우리는 종종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마태복음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
사도행전 20장 6-12절에서 모이는 목적이 “떡을 떼려 하여(7절)”였으며, 그리고 제자들은 주일 첫 날에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이른 시간에 모였다라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제자들은 이 긴 모임의 처음에 떡을 떼면서 주님을 기억했다. 그리고 “강론하기를 오래(9절)” 한 후에 식사를 함께했다(11절). 11절의 “떡을 떼어 먹고”가 식사였다고 생각하게 하는 이유들이 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장 46절처럼 ‘음식을 먹고’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믿는 자들이 주의 만찬을 식사로 여겼을 때,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라고 썼다. 그들과 함께 일주일을 기다린 것(6-7절)에서 보면 7절은 주님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며, 11절은 식사를 함께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된다.
떡 뗌이라는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단순함이 주제일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주님의 죽으심의 존귀함이 강조될 때 주의 만찬이라고 한다(고전
5) 그리스어의 명사형 kurios의 형용사 kuriakos(“lordly”)는 고전
그것은 창세기 43장 24절에서 만찬에 대한 아름다운 실례로써 시사(示唆)되었다. 거기서 요셉은 애굽에 있는 자기 집에서 형제들과 함께 먹었다. 그 잔치는 애굽으로부터가 아니고 요셉으로부터라는 특징을 가졌다. 그래서 여기 고린도전서에서 만찬은 세상 혹은 세상 조직과 관련된 그 어떤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 자신으로부터라는 특징을 갖는다.가룟 유다가 유대인 지도자들과 함께 음모에 가담해 있을 때, 주 예수님은 떡을 가지시고 사례하셨다. 이와 같이 하여 십자가에서 주님 자신의 몸이 찢어짐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했다. 주님이 잔을 가지셨을 때, 주님 자신의 고귀한 피를 흘림에 대하여 감사하셨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단순한 행위의 의미를 잘 아셨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 고린도에 있는 믿는 자들에게 보낸 바울의 말씀은 그 다락방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이며, 바울은, 그 때에 주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과 교제를 통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전
“너희가 나를 선생(Master)이라 또는 (Lord)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요
떡 뗌의 목적은 삼중(三重)적인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주님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복된 인격과 관련된 모든 것이 이 기념 속에 포함된다. 그 다음으로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는 선언이다. 우리 주님의 죽음 안에 포함된 모든 사랑, 고통 그리고 축복은 이 선언 안에 있다. 셋째로 드러난 진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는 것이다. 비록 연합이 10장 17절에 있는 상(床)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또한 11장에 있는 떡과 잔에도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떼는 떡(고전
떡과 잔이 나타내는 바는 비록 간단하지만 주님 자신에 의하여 선택되어진 것이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떡과 잔이며, 부서진 주님의 몸과 흘리신 주님의 피를 나타내는 것 그 이상이 결코 될 수 없다. 로마 가톨릭의 잘못인, 떡과 잔이 주님의 몸과 주님의 피로 변한다는 것-화체설(化體說) 혹은 루터주의의 잘못인, 떡과 잔에 주님의 진짜 몸과 피가 함께 있다는 것-성체공존설(聖體共存說)은 단호하게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역교회의 다른 모든 모임에서뿐만 아니라, 지역교회의 이런 모임에 주님의 참된 임재는 약속되었다.
우리들은 주님의 인격과 주님의 일을 드물게 기억해야 할까요? 아니면 지역교회 안에서 절대적으로 우선해야 할까요? 이 질문을 바꾸어 말하면 일년에 4주 혹은 12주만 주님을 우선해야 할까요? 아니면 일년 모든 주간 즉 매주 주님을 우선해야 할까요? 그리고 다음 질문은 물론 “왜 매일 기억하지 않나요?” 일 것이다. 신약성경은 “안식 후 첫날에(행
독자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주님을 섬길 때,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헌신된 섬김의 중요한 요소이다(갈
주님의 만찬은 신약성경에서 정기적인 지역교회의 증거와 분리되어 지켜진 것이 아니다. 주의 만찬은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바꾸어져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주의 만찬은 정기적으로 모이는 지역교회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주의 만찬은 교제의 가장 위대한 표현이며(고전
우리는 사람들을 떡 뗌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역교회의 교제에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 교제가 떡 뗌 안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강조되는 5가지 사실이 있다.
① 만찬의 제정(制定)(고전
② 만찬을 위한 명령(고전
③ 만찬의 목적(고전
④ 만찬 안에 포함되는 사람(고전
⑤ 만찬을 위한 살핌(고전
이것은 엄숙하고 거룩한 책임이다. 그러나 만찬은 축복된 특권이며 우리들이 이 지상에서 아는 한 하늘에 가장 가까운 장소이다.
갈릴리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눅
고린도에 있는 믿는 사람들이, 주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그들 중에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가 적지 아니할 정도로 분별없이 왔고, 만찬 자리에서 주님을 욕되게 하였을 때, 그들은 영원히 죽거나 멸망 당한 것이 아니라 잠들었다. 이러한 데 빠지도록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주님의 심한 책망이 있을 것이다. ‘잠잔다’는 말이 죽음에 대하여 사용될 때, 참으로 믿는 자들에게만 사용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심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주님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 잔을 마시고 떡에 참여한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이 경우에 그 주님의 몸은 주님이 고난을 당하신 바로 그 몸을 말한다. 그것에 대하여 떡은 생생하게 말한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
주님의 다시 오심의 약속은 주의 만찬과 연관된다. 주의 만찬은 주님의 십자가를 돌아보며 주님의 오심을 바라는 복된 특권이다. 물리적으로 참석이 가능한 한 절대 만찬에 빠지지 말자. 이것은 주님 오실 때까지 지켜야 할 주님의 명령이다.
1) 떡 뗌에 관한 서술
다음의 간단한 묘사는 떡 떼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장(章)에 덧붙이려고 씌어진 것이다.
건물은 쾌적하지만, 종교적인 형식이나 의식의 증거는 전혀 없다. 간소한 액자에 들어 있는 성경 말씀 몇 구절이 벽에 걸려 있다. 종교적인 제단도 없고, 의자는 청중에게 설교하기 위하여 배치되어 있지 않고, 가운데 놓인 간소한 상(床) 주위에 원을 그리듯이 배치되어 있다. 상(床) 위에는 한 덩어리의 떡과 포도주가 놓여 있다. 뒤쪽으로 사람들이 앉아서 보도록 되어 있고 원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의자들이 있다.
적은 무리들이 조용히 앉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동안에 ‘(예배)찬송가’라 불리는 작은 책을 보기도 한다. 정해진 모임 시간이 이르렀을 때, 한 사람이 일어나서 찬송가를 말한다. 찬송가 가사 한두 줄을 읽고 찬송가 번호를 반복하여 말한다. 오르간, 피아노 혹은 아무런 음악적인 반주 없이 찬송가가 깊은 감동가운데 불린다. 짧은 침묵이 있은 후 한 남자가 하나님께 말씀드리기 위하여 일어선다. 그는 간구나 원함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은 이와같이 간소한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큰 특권을 주신 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 모임에는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하여 믿는 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그의 기도는 전체적으로 감사와 찬양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하여 넘쳐 있으며, 구주의 구속(救贖)적인 사역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또 다른 찬송가가 불린다. 이 또한 예배 찬송가이며, 그 주제는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인격의 비할데 없는 가치와 십자가에서 치르신 주님의 희생에 대한 가치의 존귀함이다.
이 모임은 계속되며, 몇몇 남자들이 이어서 감사를 드린다. 그들의 주제는 같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보고 있는 자는, 예배 분위기가 고조되며 많은 찬양과 향기로운 향이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께 감사가 드려질 때, 조용한 동의 표시가 있게 된다. 그리고 각 예배자가 그의 예배의 말을 끝마치고 자기 자리에 앉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조용하게 ‘아멘’이라고 말한다.
아무도 특별하게 준비된 자리로 나아가지 않는다. 영적인 예배에 참여하는 형제는 각각 자기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선다. 의장은 없다. 순서도 발표되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는 각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표현된 감사와 예배 찬송가의 말씀에 완전히 합해지는 생각을 한다. 그리스도가 주제이며, 주님의 인격과 주님의 사역이 극찬되어지며,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영적인 참석자는 그 감사가 개인으로서와 단체적으로 받는 축복에 대하여 드려질 뿐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를 기뻐하시는 것을 많이 말하게 됨을 깨닫게 된다. 또한 예배 가운데 성경이 많이 인용되는데,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바와 같이 주 예수님의 완전함과 뛰어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의 본질로 말미암아 예배를 받으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존귀함으로 말미암아 높임을 받으신다. 가치 없는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겸손한 감사가 드려진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 남자가 일어서서 떡에 대하여 감사드린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몸을 나타내기에 합당한 떡으로 말미암아 감사드리는 말을 한다. 그리고 상(床)으로 나아가서 떡을 떼어 주위로 돌린다. 각각 믿는 자들은 떡을 작게 떼어서 먹는다. 떡이 주위를 돌아 손에서 손으로 전달되어 상(床)으로 되돌아왔을 때, 한 사람이 일어나서 같은 방법으로 고귀한 피를 흘리신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선택된 것을 나타내는 포도주 잔에 감사드린다. 그 잔은 떡과 같이 손에서 손으로 전하여지고, 각각 믿는 자들은 한 잔으로부터 조금씩 마신다. 잔이 상(床)으로 돌아왔을 때, 둘러 앉은 사람들로부터만 헌물이 드려지며, 그것도 또한 상(床) 위에 놓여진다.
이 즈음에서 한 사람의 남자가 일어서서 성경을 읽고 읽은 성경 말씀을 설명하고, 기록된 진리의 실제적인 적용에 대해서 말한다. 찬송가가 불리고, 기도와 함께 모임이 끝난다. 모인 사람들이 일어나서 서로 따뜻한 악수를 하면서 인사하며, 사랑과 위로의 말을 나눈다. 이와 같은 모임은 거의 전세계에서 매주일 수천 군데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팔리시던 그날 밤에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제정된 주님의 만찬을 통하여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다(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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