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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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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9. 3. 12:44 횃불/2001년

보혜사 성령님(2)

하롤드 P 바커

성령님은 인이시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말씀이 신약성경에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인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음을 표시하는 인이십니다. “우리를 인치신분은 하나님이십니다(고후 1:22).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으로 구분되는 것은 이마에 표를 받음으로서나, 별스러운 옷을 입게 됨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성령님이 거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으로 거듭나는 것과 성령님으로 인침을 받는 것을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둘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성령님으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한 것이지만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까닭입니다.

한 농부가 시장에 가서 양 몇 마리를 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 이제 잃어버려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낙인을 찍어 놓자하였습니다. 그 농부는 돈을 다 지불했기 때문에 자기 낙인을 찍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가 찍은 낙인이 그 양들을 자기의 소유로 만드는 것은 아니고 그가 지불한 돈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가 낙인을 찍는 것은 그 양들이 이미 그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어느 백화점에 가서 셔츠를 몇 개 왔습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그 셔츠에다 잉크로 내 이름을 썼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셔츠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지불한 그 돈이 그 셔츠가 내 것이 되게 하였습니다. 셔츠에다 내 이름을 써놓는 것은 내 것인 줄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산 바 되어 이제 그분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속에 내주하시도록 성령님을 주심으로 그를 인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받았습니다( 1:13).

우리가 인치심을 받은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 점을 명백히 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하나님 아버지의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6:27). 그것은 주님 자신의 완전하심이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다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우리 속에 그 어떤 온전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인침을 받은 것은 우리의 신성함이나, 향상이나, 헌신의 성숙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인치심을 받은 것은 단순히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치심을 받은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희생의 불변하는 효험을 힘입고 서 있기 때문입니다.

 

인은 구원의 영원한 보증이다.

성경에서 인친다고 말할 때 그 대표적인 개념은 보증입니다. 어느 물건에 인을 치는 것은 그것이 그 소유자의 것임을 보증하기 위함입니다. 모로코 나라의 시장에 가면 흥미있는 일이 종종 보입니다. 어느 사람이 옥수수 몇 가마니를 사면 그는 즉시 가마니에 인을 칩니다. 그는 인을 찍어 자기의 것으로 표시해 놓았기 때문에 자기 나귀를 가지러 갑니다. 그리고 시장으로 다시 돌아와서 자기가 인을 쳐놓은 옥수수 가마니를 찾아 가지고 싣고 가버립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을 치시고 이 세상에 잠시 남겨두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시 데리러 오실 때까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장사된 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로마 총독을 찾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 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27:63,64).

빌라도 총독의 대답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그 교활한 사람들이 실증이 난 듯 이제는 자기의 본분을 떠나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려 합니다. “너희에게 파수꾼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고 빌라도는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나 주목해 보십시다. 그들은 무덤 속에 있는 시체를 도난 당하지 않을 목적으로 무덤을 절대 안전하게 하려 했습니다.  “저희가 파수꾼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27:56).

그들이 무덤을 완전무결하게 지키기 위하여 한 일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 무덤을 인봉하였습니다.

둘째, 파숫군을 세워 놓았습니다.

하나님도 비슷한 방법으로 우리를 절대 안전하게 해 놓으셨습니다.

첫째, 우리를 성령님으로 인치셨습니다.

둘째, 파숫군을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 눈을 의인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고”( 36:7) 하나님은 우리를 주야로 지키십니다( 121:3~8).

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무덤을 안전하게 지켰습니까? 물론 그렇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보다 더 큰 권세가 그들이 해놓은 인봉을 부수고, 파수꾼들을 제압하고, 죽으신 주님을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으로 인쳐 놓은 자들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럴 수 없습니다. 온 우주 가운데 있는 어떠한 권세도 하나님의 인봉을 부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두신 자들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안전하게 해놓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절대 안전합니다.

 

언제?

정확히, 신자는 언제 성령님을 모십니까? 그가 구원받는 순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후 언제입니까?

로마서를 찾아 상고해 보겠습니다.

3장과 4장은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장에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평한 가운데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부어졌습니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되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일과 성령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는 일이 동시적이라는 것을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이의는 종종 에베소서 1:13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데서 오는데, 거기에 보면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어성령님의 인치심사이에는 어떤 시간적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자(마자)‥‥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읽으면 바로 읽는 것입니다. 여기의 순서는 시간적인 것이 아니고 표현적 인 것입니다.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할 떼 (바퀴의)살은 서로 뒤쫓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살도 다른 살보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하지는 않습니다. 그 살에 1,2,3 등등의 숫자를 매겨놓고 관찰해 보아도 언제나 똑같은 순서로 서로를 뒤쫓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살들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2번 살이 1번 살을 뒤쫓고는 있지만 1번 살과 2번 살이 돌기 시작한 시간적 차이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1번 살, 의롭다함을 받음을 2번 살, 그리고 성령님을 모심을 3번 살이라고 할 때, 이 살들은 동일한 순서로 움직입니다. 그러나 시간적 차이가 없이 동시에 움직입니다.

사도행전의 과도기 시대에 있어서는 이상의 일반적 원리에 예외가 있었습니다. 이 예외들은8장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0장에 보면, 특히 이방인들 가운데서 믿는 신자들이 성령님을 모시는 원칙이 나타나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43).

그 말을 듣던 사람들이 그것을 믿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설교하는 도중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셨습니다”(44).

거기에는 성령님을 모시기 위해서 기다림도, 안수도, 믿은 후의 시간적 간격도 없었습니다. 듣는 것, 믿는 것, 성령님을 모시는 것이 다 동시의 일이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이 언제까지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하게 할 때까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매우 판이한 답변을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를 받았느니라”( 4:30).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것이 영혼의 구속의 날을 가리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에게 그 날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루어질 구속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구속을 대망하고 있습니다.

···· 양자 된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8:23).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것이고, 성령님이 현재 내주하고 계시지만 아직 구속되지는 못했습니다. 이 몸은 여전히 썩어지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몸이 아담의 흔적으로부터 완전히 구속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과 똑같은 형상으로 변화되는 날이 오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대하는 구속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분초마다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권고가 이 사실에 근거되어 있는 것입니다. 설혹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하게 했다고 해도 성령님께서 우리를 떠나가시지 않습니다. 다만 평상시에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그 기쁨과 위로를 막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느 사람이 주님을 믿고 그 결과로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을 때 그는 구속의 날까지인치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다음에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음 호에 우리는 오순절 날의 사건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001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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