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義)
한 봉 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롬
“하나님의 진노가.”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모두 화를 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내는 화는 다 옳지만은 않으며, 문제점이 많지만, 어쨌든 화에는 잘못에 대한 거부감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떤 잘못, 즉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화를 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화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고 제한적이고 일시적이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옳으며 영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사람들이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
이 아닙니다. 그래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들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곳에 던져 넣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의로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어디에 나타나 있습니까? 복음에 나타나 있습니다(롬
그럼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그렇게 무섭게 진노하실까요?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또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잘못은 하나님을 우상과 바꾼 것입니다. 이 이상한 교환이 사람들이 저지른 어리석음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그들을 건져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도자였던 모세를 불러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산에서 모세와 말씀하시는 동안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것이 너희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었던 너희들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교환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참 이스라엘 백성은 어리석다. 어떻게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내가 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구체적인 모습을 다음 말씀을 따라 살펴봅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쥐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요
사람들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나를 뭐라고 부르시는가?”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서는 의식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생애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습니까? 사람은 무엇인가를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꿔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사업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업이 잘 될까, 어떻게 하면 그 사업을 확장시킬 수 있을까,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을까?”에 온통 자기의 시간, 정력, 건강, 필요하다면 생명까지 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학문을 위해서 삽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고상한 학문을 위해 생애를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정말로 자기의 삶을 걸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분들에게 교회를 가자고 하면 잘 안 옵니다. 만약 음악회나 극장에 초대하면 왔을 것입니다. 텔레비젼을 하루에 몇 시간씩 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위해서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상한 교환을 한 사람들의 오늘날 모습입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 제게 억울한 일이 있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재산을 남겨주셨는데 형이 부당하게도 나한테는 조금 주고 자기가 많이 차지해 버렸습니다. 내가 그 생각을 할 때마다 형에 대해서 배반감도 느끼고 속도 상하고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 않고 방법이 없으니 예수님, 당신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보다,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 어리석은 부자는 인간의 삶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부가 그와 같은 편안한 삶을 보장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다행히 그의 소출이 풍성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재산은 많건 적건 다 쓰지 못한다. 자기의 재산 전부를 다 쓰고 가는 사람도 없다. 또 재산은 아무리 많아도 자기의 생명을 하루라도 연장시킬 수 없다. 그리고 부를 의지했던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자기 것이라고 불렀던 것(내 곡간, 내 곡식, 내 영혼)이 자기 것이 아님을.’
부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 아닙니까? 우리가 어리석은 부자가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부를 바꿔치기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악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는 어떻게 나타나 있습니까? 우리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는 사람들은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심한 경우는 죽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롬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롬
하나님의 진노는 ‘내어버려 두심’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섬기도록 놓아두십니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 삶의 목표요 기쁨이요 의미라고 생각하는 우상을 향하여 살도록 내어버려 두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 없이 잘 살고 계신 분들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길인지 깨달으셔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만족스러운 인생이 가장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두 번째 결과는 사람들의 죄입니다. 가장 두드러지고 분명한 죄는 성적인 부도덕입니다. 그 다음 죄의 목록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기”(29절). 남이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고 내가 더 잘 되기를 원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자연스러운 마음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시 기가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난 것이 살인일 것입니다.
“비방하는 자요”(친절). 남에 대해서 비판하기는 왜 그리 쉬운지요. 착한 것을 인정해 주고 격려하는 것은 왜 그리 어려운지요. 자기가 무엇이든지 가장 잘 아는 자, 즉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입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이 말씀은 고통과 아픔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구절입니다.
“무정한 자요”(31절). 무정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로 우리 삶에 죄의 열매가 가득하게 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이와 같은 죄인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시는가 살펴보겠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바꿔치기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24절을 보십시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누가 되었습니까? 똑같이 23절에 있는 ‘모든 사람’입니다. 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었습니다. 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무엇이겠습니까? 24절에 보니까 “이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23절과 24절의 엄청난 변화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말입니다. 모든 죄인들이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성경 말씀 앞에서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 놀라운 성경의 선언과 사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사실이 이해 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이며 하나님의 의입니다. 물론 24절에 그 비밀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하셨는지는 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5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우선 오래 참으셨습니다. 구약이 4,000년이고 신약이 2,000년이면 6,000년을 참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몇 년을 사셨는지 모르지만 그 생애동안 참아 주신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생명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참으심 때문에 연장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오래 참으신 다음에 온 세상 죄를 예수님에게 지게 하셨습니다. 온 세상 즉 이 땅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 첫 번째 사람인 아담과 우리를 포함해서, 맨 마지막에 태어날 사람의 죄, 즉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여기 세상 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만약에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지었던 모든 죄를 색깔로 표현한다면 무슨 색이 되겠습니까?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색깔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었던 모든 죄를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릴 적에 어머니 지갑에서 돈을 훔쳐서 사탕을 사먹은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죄가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지은 죄만 해도 엄청날 것입니다. 그런데 수 십억 인구가 수천 년 동안 지어왔습니다. 그 죄를 어찌 사람이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 죄를 모두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예수님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나무에 달린 것은 십자가에 달린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고난을 받으시고 모욕과 수치를 당하시고 죽기까지 저주받으신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셔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피가 사람들의 모든 죄를 능히 사하고 남지 않겠습니까? 이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하신, 죄 없으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신 다음 하나님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이제 믿기를 원하십니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죄 용서를 경험합니다. 믿음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내가 갖추어야 되는 어떤 조건이 아닙니다. 사람이 믿음이라는 조건을 갖추어야 하나님의 용서가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그렇게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원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믿어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기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 의로울 수 없고, 내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자기 의를 포기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이 십자가의 의로만 살겠다고 굳게 결정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즉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구원은 사람이 할 수 없어야 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하든지 하나님이 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을 때만 하나님이 해주십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절대로 의로울 수 없다. 나의 어떠함으로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고 할 때 하나님의 의가 들어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 즉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 믿는 자는 그 믿음이 의가 됩니다. 이 부분이 흔히 오해되고 있는 면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어서 심판을 받으러 하나님 앞에 가면, 내가 평생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비디오처럼 펼쳐지고, 잘못했던 것과 잘했던 것을 하나님이 낱낱이 보시고 판정하실 것이다: 그런데 죄만 짓는 사람도 없고 의만 행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죄가 더 많으면 죄인이 되고 의가 더 많으면 의인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죄인을 죄인이라 하시고 의인을 의인이라 하시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죄인을 의롭다 하시겠습니까? 여기에 십자가의 비밀이 있습니다.
두 사람만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를 범한 아담을 하나님은 이렇게 처리하십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아담이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땅이 저주를 받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저주받으실 것을 예표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의 몸이 벗은 것을 보고 부끄러워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가죽옷은 짐승이 피를 흘렸음을 의미합니다. 아담은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는데 땅이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자기가 죄를 범했지만 어떤 짐승이 피 흘리며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은 우리들이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것을, 그분이 대신 저주를 받으신 것을 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못 입고”(롬
가죽옷을 입혀 주신 그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아담이 가죽옷을 입은 것처럼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그분의 죽으심을, 그분의 영원한 속죄를,그분이 나를 위해 죄를 지고 가셨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병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가로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에 그 왼쪽과 오른쪽에 또한 두 명의 사형수도 함께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죄인들을 고통스럽게 죽이는 로마의 사형 방법입니다. 한쪽에 있는 강도는 예수님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다른 한쪽 강도는 예수님을 신뢰했습니다. 우선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40절).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후에 만나게 될 하나님, 그분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그는 옆에 있는 분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 분은 왜 죽는가? 나는 내 죄 때문에 죽는데 죄 없으신 이 분은 왜 죽는가?” 이 분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를 강도는 들었습니다. “아, 이 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죽는구나. 나는 내 죄 때문에 죽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대신 죽으시는구나.” 이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성경은 약속하였습니다. 예수라는 뜻이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나의 죄에서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 나를 기억해 주옵소서.” 그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이 분은 죽으실 뿐 아니라 부활하셔서 이 땅에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왕이구나.” 그분의 십자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 이 분은 왕이십니다. 아, 이 강도의 눈에는 예수님의 머리에 씌워져 있는 가시 면류관이 영광의 왕관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분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는 당신께서 나의 죄도 사해 주셔서 나도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많은 사람들의 여러 가지 모욕과 조롱과 비난에 침묵하셨습니다. 아무 대답도 안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강도의 믿음의 고백에 즉각적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달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내 죄를 절대로 어찌할 수 없는 절망적인 죄인임을 아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온전히 단번에 영원히 용서해 놓으셨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이제 나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피 홀리신 은혜로만 나가리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내가 절망적인 것을 알고, 이 죄인을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 그 은혜로만 살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구원은 우선 들어야 합니다. 듣고 그리고 믿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인치심을 받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구원의 확신을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분명히 확인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받으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몸된 영광스런 교회에 이 놀라운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내 죄가 사해졌다고, 이제 내가 당장 죽어도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지요. 그리고 우리를 동일하게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임을 알고 형제로 영접하며, 함께 주님을 찬양하는 곳이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이 은혜가 오늘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자기의 죄 문제를 애통해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분들의 심령에 있기를 원합니다. ♠
(200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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