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충만함
(에베소서
- H. A. 아이언사이드 -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지금 우리는 신자의 행위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이것은 에베소서에서 “행할 것”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일곱 번째의 구절입니다. 앞으로 돌아가서 이 단어가 나오는 부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2장 2절에서 우리는 그 과거시제를 보게 됩니다. 이것까지 포함하게 되면, 그것은 여덟 번째가 되는 셈입니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들고.”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을 때에 살던 방식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들은 거기에서 건져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같은 장 10절에서 우리는 다음의 말씀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다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선한 행위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은 후에 선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4장 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하늘의 시민으로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같은 장 17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마음의 교만과 어리석음을 따라 행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자로서 우리는 더 이상 그렇게 행하지 않고, 겸손하게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5장 2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라고 했습니다.
8절을 읽어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15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자세히 주의하여”라는 말은 어떤 위험한 장소를 걸어가는 사람과 같이 “주위를 둘러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쪽에는 함정이 있고 저쪽에는 수렁이 있으며 사면에 덫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걸으면서 다음 발을 어디에 디딜 것인가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세히 주의하여 걷는 것,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여, 여러분의 길은 죄악의 세상, 어리석은 세상, 온갖 유혹과 악한 영향력이 가득한 세상으로 여러분을 이끕니다. 경솔한 여러분의 발 주위에는 덫과 함정이 가득합니다. 그러므로 자세히 주의하여 걸어야 합니다. 발을 내딛는 곳을 유의하십시오. 사귀는 친구를 조심하십시오. 어떤 모임에서든지 여러분의 행동에 신중하십시오. 그리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돌려질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처럼,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들처럼,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처럼 행하지 말고, 지혜로운 자들처럼 (하나님의 지혜로 인하여 지혜롭게) 행하십시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사도는 그의 다른 편지에서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문자적으로 그것은 “기회를 사라”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사람들이 세일하는 곳에 가서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여기서 사게 되면, 다른 날 사는 것보다 훨씬 싸게 구입하는 셈입니다. 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주님을 섬기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축복의 수단이 될 기회를 얻기 위해 이처럼 열심을 내야 합니다. 기회를 사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하십시오. 세상은 악하며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시간은 빨리 지나 가고, 한 번 잃어버린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을 때 그것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여러분과 내가 우리의 본성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에 의해 깨달음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주의 깊고 신중하게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 해 전, 나는 설교하다 멈추고 성경 전체를 읽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질문했습니다. 결국, 나는 너무 부끄러워서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그 청중은 오백 명이나 되었고,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그 질문을 했을 때, 오직 두 사람만이 손을 들었습니다. 나는 사탄이 그것을 볼까 봐 부끄러웠습니다. 그것을 본 불신자들이 별로 없었던 것에 대해 나는 대단히 감사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그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성경을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더군요”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나는 이 도시에서 최근에 일어났던 어떤 일을 기억합니다. 시내에서 어떤 공개 토론회가 있었습니다. 클라렌스 다로우는 무신론자의 대표로 거기에 참석했고, 다른 어떤 사람이 장로교의 대표로, 또 다른 사람이 카톨릭의 대표로,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유대교의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카톨릭의 대표가 일어나서 왜 그가 카톨릭교인인지 말했고, 장로교의 대표도 그가 왜 개신교인인지, 그 다음에는 유대교의 대표가 왜 그가 유대교인인지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무신론자인 클라렌스 다로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한 가지 사실에 대해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로교인도, 카톨릭교인도, 그리고 유대교도도 지금까지 성경을 언급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소위 거룩한 책을 더 이상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들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그 책을 자신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성경 한 번 언급하지 않고서 카톨릭 교인이거나 개신교인이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가엾은 일입니까! 제발 여러분과 나는 진정한 성경적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은 걸어 다니는 성경이 되려고 했습니다. 아주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에게 찾아가서 “선생님, 이러이러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뭐라고 하시는지 찾아봅시다”라고 대답하면서 그의 성경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 사람은 ‘거기에 대한 대답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난 왜 몰랐을까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 친구가 “내 생각은····”이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본적이 없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말씀한다”고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과 내가 위로부터 오는 지혜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고 싶다면, 우리는 성경을 연구해야만 합니다.
감히 말하건대, 가없게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일들로 인하여 너무 바빠서 성경과 더불어 보낼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45년간 수많은 예배에 참여하긴 했지만, 매일 매일 신선한 만나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가지 않고서는 나는 감히 강단에 서지도 못하고 그 날의 일에 착수하지도 못합니다. 간혹 전날 밤에 너무 늦게 잤거나 좀 많이 잤거나 혹은 긴급한 전화가 와서 말씀을 대하지 못하고 황급하게 나가게 되어 아침에 매우 바빠지게 되는 경우에는, “오늘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영적으로 이렇게 메마르고 갈급할까? 다른 이들을 돌볼만한 상태도 아니군”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대답이 들려 옵니다. “왜냐고? 오늘 아침에 영적 식사를 걸렀잖은가? 너는 말씀 한 구절도 안 보고 외출했거든.” 그리고 나는 “주님, 당신과 더불어 보내는 시간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시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 읽는 습관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서 그분의 거룩한 말씀을 대하기에 게을리한 죄를 그분께 고백하십시오. 주님은 “성경을 상고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명령에 불순종한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님께 나가기를 게을리 했다면, 그것을 고백하고 “주님, 당신의 종으로 하여금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
사도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술취함과 성령의 충만)를 말하고 있음을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왜 그는 이 두 가지 일, 이 두 가지 상태를 대조시키고 있습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술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 술에 취한 사람은 이상한 영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됩니다. 사람들이 알콜의 영향력 아래 있을 때, 그들은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결코 하지 않을 그런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들은 온갖 상스러운 말과 어리석은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변호하면서 “오, 제발 그를 비난하지 마세요. 그는 취했습니다. 제 정신이 아니라구요”라고 말합니다. 그런 상태가 결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의해 지배되고 다스려져야 한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지배되어야 하며,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상해에서는 말하거나 행할 수 없었던 것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말하고 행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반적인 경험이 되어야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실 여기 나오는 단어는 과거시제가 아니라, 현재시제, 즉 “늘 성령으로 충만하라”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어떤 순간에 나타났다가 그 다음에는 사라지고 또 다시 반복되어지는 어떤 이상하고 황홀하고 감정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반적인 경험 입니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
사람들이 성령충만에 대해 많이 말하는 어떤 장소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나는 정신병원에서라도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일들, 즉 사람들이 바닥에 뒹굴고 미친 듯 날뛰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그것을 성령충만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마음의 영이 아닙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어떤 거칠고 광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하여는 사려 깊고 신중하게 행하게 되며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의 증거가 능력을 지니게 됩니다.
골로새서
심령에 풍성히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의 영향력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에베소서의 이 말씀들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골로새서에서의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될 때와 에베소서에서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얻게 되는 결과가 아주 똑같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주목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동일한 사실에 대해 동일한 것은 서로에게 동일하다”는 수학의 첫 법칙이 있습니다. 만약 말씀으로 충만하게 되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면 말씀이 우리의 의지를 지배하듯이,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채우고 지배하고 다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성령님으로 충만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립되는 어떤 것이 여러분의 삶속에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어떤 일이 여러분의 삶속에서 허용하고
있다면, 그분의 말씀에 어긋나는 그 무엇이 외부적인 교우관계에서나 혹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의 여러분의
행동 속에 있다면, 그분께 나아가서 여러분의 부주의한 죄나 태만죄를 고백하고 그분 앞에서 그 모든 것을
해결하십시오. 그리고 그분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털어놓았다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실제로 하나님의 영이 소유하시는 어떤 뚜렷한 외적인 증거나 놀랄만한 표적을 여러분이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분이 모든 신자들 속에 내주하시며 또 여러분이 그분을 모시게 될 때 훼방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그분이 여러분을 깨끗케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완전히 소유하시도록 하십시오.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성령충만은 기쁨의 충만입니다. 성령님은 즐거움과 기쁨의 영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거룩한 기쁨과 단순한 자연적 흥겨움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분은 슬픔의 사람이기 때문에 슬픔에 익숙하지만, 우리가 사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는 어떤 슬픈 사람의 일생이 아니라 기쁜 사람의 일생을 읽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여 가라사대”(눅
이것은 우리 주님의 특징입니다. 그분은 모든 슬픔과 비애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유쾌함을 우리는 이런 기록들 속에서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그분의 기쁨은 전혀 세상적인 즐거움도, 세상적인 흥겨움도 아니고 아버지와의 깨어지지 않는 교제에 근거한 깊은 기쁨이었고, 또 여러분과 내가 소유해야 할 그 기쁨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랑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신자가 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여 찬송하며····”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사람을 좀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때때로 우리의 삶에 대하여 조용히 앉아서 스스로에게 말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사도께서 실제로 말하는 것은 “서로 화답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입니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입니다. 우리가 기쁘고 즐겁게 서로 인사하며 함께 모이게 될 때, 주님께 대한 찬양이 우리의 심령 속에서 부풀어오르게 됩니다. 시편은 옛날에 하나님의 회중들 꼭 표현의 수단이었습니다. 찬미는 고대의 회중들의 찬송가였는데, 거기에는 사람의 마음의 모든 감정에 적합한 놀라운 표현들이 들어 있습니다. 찬송가를 사용함에 있어서 우리가 아직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특권에는 이르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의 모든 상태와 상황을 표현하는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찬미란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부르는 찬양의 말입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
예배와 경외의 찬송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가슴은 저절로 하나님을 향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적인 노래가 더 이상 어울리지를 않습니다. 그가 세상 노래를 부른다면, 세상 노래를 듣고 있다면 그는 자기가 속해 있는 높은 수준에서 뛰어내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좋은 영적인 노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구속에 대한 노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영성이 퇴조하고 있는 한가지 이유는, 사람들이 이런 일들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과 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특징인 높고 거룩한 상태에서 쉽사리 떨어지는 것 때문입니다.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우리가 한가지 악기로 모든 멜로디를 다 연주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악기에 의존하는 경우라면, 우리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어떤 멜로디도 연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의 마음은 하프와 같아서 하나님의 영이 깊은 감정을 불어넣으실 때, 진정한 멜로디가 하나님의 귀를 울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한 신자는 감사하는 신자가 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할 수 없는 어떤 일들, 참을 수 없이 힘들고 어려운 일들, 나의 영혼을 괴롭히는 어떤 일들이 있습니다.”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중한 수술을 받아서 생명을 다시 얻은 적이
있습니까? 수술을 받을 때, 그것은 매우 힘들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회고해 보면서 여러분은 의사의 집도에 대해서, 그리고
수술로 인해 견뎌야만 했던 고통에 대해 감사할 수 있습니까? 이 모든 힘겨운 고통이 주어지는 이유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분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불필요한 가지를 제거함으로써 이런 장애물과 방해
요소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시는 그분의 뜻을 지금은 다 알 수 없지만 그날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잘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이 되면, 우리는 모든 기쁨뿐 아니라 모든 슬픔에 대해서도
그분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행하겠습니까! 그분의 사랑 외에는 그 무엇도 내게 허용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신자는 충성스럽고 유순한 사람이지, 머리를 쳐들고 “누구도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겠어. 나는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할거야” 라고 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신 시절의 과거의 행동이며 또 그것은 새 성품이 아닌 옛 성품의 행동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신자는 기쁨, 감사, 겸손, 이 세 가지에 의해 특징지어 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길 기원합니다. ♠
(200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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