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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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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손(2)

히로사와 노리

요한복음 13:1-1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요한복음에는 손이라는 말이 직접 나타나지 않지만 주님의 손을 생각나게 하는 기록과 또는 주님이 그 손으로 그 하신 일을 나타내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저녁 식사자리에서 주님은 수건을 손에 집으셨습니다. 손은 몸의 일부분으로서 사람의 행위를 대표하는 기관입니다. 예수님이 수건을 가지신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전에 관한 복습이 되겠습니다만 주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손에 잡으셨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지역모임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교훈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떡과 생선을 가지신 주님은 무리의 필요를 채우신 것을 보았으며 우리가 작고 연약해도 주님께 드린다면 주님이 쓰신다는 것을 교훈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믿음 가운데 주님께로부터 진흙을 바름을 당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진흙을 씻어낼 때에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주님의 손으로 행해진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3장 전체적인 특징을 보면 "~~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러한 것도 살펴보면 말씀을 즐겁게 기억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1절에 "자기의 사람들"(것들=일어성경)이 있는데 이 말씀은 믿는 자들이 주님의 소유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에는 "목욕한 자"가 나오며 온 몸이 깨끗하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나아가서 16절에는 "종 또는 "보냄을 받은 자", 18절에는 "나의 택한 자", 20절에는 "나를 영접하는 자", 23절에는 "그의 사랑하는 자", 35절에는 "내 제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1절에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것들)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12장에는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내신 활동이 나와 있습니다. 13-17장에는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을 자기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일본어 성경에는 자기 나라에 왔는데 자기 백성이 믿지 아니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백성도 자기의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own이라고 하여 소유한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이 세상, 즉 땅은 예수님의 소유인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땅은 주님이 만드셨고 소유주이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기 백성들이 영접지 아니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 가운데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영접하는 사람들 곧 주님을 믿는 자들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유, 우리의 것들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도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자기의 소유로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주님의 소유라고 여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되 그 사랑을 남김없이 끝까지 사랑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체적으로는 손에 수건을 잡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향해서 소중한 가르침을 많이 주셨습니다. 18장에서는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달라고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행동과 말씀과 기도로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로마서에서 자주 가르쳐지는 가르침이 여기도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 자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칭의, 성화, 그리고 영화라고 하는 세 가지 가르침이 나옵니다. 칭의, 즉 의롭게 되는 것은 한 번 일어난 것으로 우리들에게는 이미 과거의 일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세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즉 걸음 속에는 구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공중으로 오실 때 우리의 몸이 영화롭게 변할 것입니다. 13:10 절에서 목욕한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온 몸이 깨끗하니라"는 칭의, 즉 의롭다 함을 얻은 것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는 상징적으로 수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의미 중에 하나는 예수님이 우리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신다는 것이 하나입니다.

14절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또한 성도들이 피차간에 상징적인 이 수건을 가지고 발을 씻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발을 씻는다는 영적인 행위는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복된 우리들의 산 소망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이 상징적인 수건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에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주님의 공중재림 즉 휴거의 약속인 것입니다. 이 때 구원받은 성도들의 몸이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 따르면 우리의 낮은 몸이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는 더 이상 수건이 필요 없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13장 안에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 바울이 말한 세 가지 구원의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더 확인하면 "온 몸이 깨끗하니라"고 주님이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믿음 가운데서 주님께 발씻음을 받을 필요와 그리고 서로 발을 씻길 필요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공중에 오시는 휴거 때는 더 이상 수건이 필요 없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주님의 가르침 속에 세 가지 구원의 측면이 나타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의 믿음의 행보 속에는 주님에 대해서 충성스럽지 못함이나 더러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것에는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이 빼앗길 때도 있습니다. 또한 나쁜 생각이 마음 속에서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주님과 함께 못박혔고 주님과 함께 부활했습니다. 그렇다면 본래 옛사람은 없어야 할 터입니다. 그러나 예로 말씀드리면 마치 망령처럼 옛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주님께 불충성스럽기도 하고 주님께 잘못 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상징적인 이 수건을 통해서 발을 씻김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의 교제는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자아가 돌출해서 서로 충돌하기도 하며 어떤 경우에는 형제자매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며 거짓말을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피차간에 발을 씻는 즉 용서한다는 행위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요한일서 1:9절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는 확인의 일들이 매일 생활에서 필요합니다. 다른 형식으로 말하면 죄를 고백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손에 가지신 수건을 생각하고 용서받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복되지 않겠습니까?

 

요한복음 13:26-30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여기서도 주님의 손에 무언가를 드셨습니다. 그것은 찍은 한 조각의 빵이었는데 그것을 가룟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엄숙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다는 이 13장에서 회개할 기회가 있었음을 생각합니다. 10절에서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의 마음 속에 있는 나쁜 생각이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 18절을 보면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구약성경에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라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이 때도 유다는 마음 속에 찔림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서 21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에 민망하여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이 말씀 가운데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세 번이나 회개할 기회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주 가르침을 받는 것이지만 베드로는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했지만 그러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믿음 생활 가운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세 번의 기회가 있은 다음에 주님은 26,7절에서 빵 조각을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이 의미는 유다의 마음 속에 일어난 그대로 놓아두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나쁜 생각 그대로 두신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아주 엄한 판단인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유다의 마음 속에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 빵 조각을 찍어다가 주신 행위인 것입니다. 회개하고 구원 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주님이 수건을 가지고 발을 씻기는 것을 의미하는 회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로마서 1:24절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26절에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28절에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이렇게 1장에서 내어 버려 두사라고 세번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죄인들이 죄 있는 상태 그대로 내어버려 두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서신 속에서 이런 식으로 몇 번이나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에서는 음행한 사람들을 사단에게 넘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서에서도 양심을 버린 사람들을 사단에게 넘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보면 내어 버려 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엄한 조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면으로 주님이 빵 조각을 찍어다가 우리에게 주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1:1-3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읽지 않았습니다만 13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에서 주님이 손을 가지시고 생선과 떡을 운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섬겨주시고 양육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에 그 후에 라고 해서 앞에 사건과 뒤에 사건을 연상시키는 라는 접속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복음서를 다 포함해서 요한복음 21장은 복음서를 마무리하는 장처럼 보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많은 물고기를 잡는 경험을 했으며 그 때에 베드로와 그 일행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곳에서도 물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순종하도록 주님께서 권하셨습니다.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숯불에 둘러앉았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 주변 사람들이 서니까 베드로도 서고 주변 사람들이 앉으니까 베드로도 앉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믿지 않는 자와 행동을 같이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숯불은 복된 숯불입니다. 주님을 중심한 교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21장은 주님이 다시 한 번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게 해줍니다.

일종의 사족이기는 합니다만 마태복음은 28장이고, 마가복음은 16장까지 있으며 합치면 44장이 됩니다. 누가복음 24장과 요한복음 20장까지 합치면 44장이 됩니다. 숫자가 같다는 것을 사족으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합치면 88장이 되며 따라서 21장을 합치면 복음서가 총 89장이 되는데 그런 의미에서도 요한복음 21장은 복음서의 마무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20:3031절에서 종료되고 있습니다. 기억하기 좋으라고 이렇게 사족으로 말씀드렸습니다.

21장은 세 가지 때를 가지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4절에 “”날이 새어갈 때의 때가 나옵니다. 두번째는 9절에 육지에 올라 보니(올라왔을 때, 일어성경)” 세번째는 15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때에, 일어성경)” 이렇게 세 군데 때가 나옵니다. 이 세 때를 통해서 주님은 사랑을 나타내셨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153마리의 많은 물고기를 주셨습니다.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쉰세 마리라고 했는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그물을 치면 큰 물고기나 작은 물고기가 다 들어옵니다. 여기 보면 큰 물고기가 153마리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개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상스런 사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 이 생선을 시장에 가져가 팔아서 생활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3절에 베드로가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라는 것도 좀 이상스럽습니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을 때 아무 것도 잡지 못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라는 이 말씀에서도 주님이 개입하셨다는 것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153마리의 큰 물고기를 잡게 해서 생활비를 조달해 주신 것을 알 수 있는데 즉 사랑의 개입인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는 어머니 같은 배려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아침 식사 준비를 주님께서 해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배가 고팠던 그 제자들에게 그 배고픔을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이 때도 주님께서는 떡과 생선을 손에 가지시고 제자들에게 넘겨주셨다고 볼 수 있으며 그 당시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15절부터는 주님께서 목자로서의 필요를 저들에게 채워주셨다고 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내 양을 치라고 세 번 말씀하셨습니다. 앞 시간에 요한일서를 통해서 아비, 청년, 아이라는 구분을 박형제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도 내 양을 치라고 세 번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로 세 가지 정도의 성도를 치라는 말씀으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양을 치라고 하는 사명을 주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5절에 나오는 내 어린 양은 영어로 lamb라는 단어입니다. 16,17절의 양은 영어로 sheep이라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15절에서 어린양을 돌보는 것이라면 16,17절은 다 큰 양을 돌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목자이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목자의 일을 맡기심으로 참된 사랑과 목자임을 나타냈습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생활비도, 그리고 영적인 일도 주님이 개입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활비도 중요하지만 이것을 주님께 맡기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구약성경에서도 창세기 22장에서도 하나님은 다른 양을 준비하셨습니다. 요나서도 보면 주님은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고, 나무도 준비하셨으며, 그 나무를 갉아먹는 벌레도 준비하셨습니다. 여러가지 걱정을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주님을 믿고 주님이 모든 것을 준비하신다고 믿는 것은 좋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20:26-27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한복음에서 드물게 주님의 손이 직접 기록되어 있는 곳입니다. 주님의 손에는 십자가의 상처가 있었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양 손에 못박힘을 당했습니다. 손바닥 안인지 손목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손목에 못을 박지 않았나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은 모르겠습니다만 손에다가 못을 박으면 체중에 의해 손이 찢어지기 때문에 손목이라고 생각을 하며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은 손에 못을 가지셨다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고난을 당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손에 못을 가져 주신 것은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해 주신 것입니까?

요한복음에서 주님의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의 사회생활, 가정생활, 그리고 개인생활 그리고 믿음 생활에서 주님의 손을 생각한다면 복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손길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오늘 같이 생각해 본 것을 통해서 여러분의 생활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 2015 12 26일 강서모임 -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