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히로사와 노리
행 4:23-31절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24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여기는 공적인 기도집회가 나와 있으며 24절을 주의해서 보면 이상스런 기도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서로 기도하는 내용을 협의한 것이 아니었지만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높여 기도하는데 같은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내용이 읽혀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모두)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라고 했습니다. 이상스런 기도집회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개입 또는 기적 같은 기도였다고 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기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모두가 소리를 내어서 기도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형제가 대표해서 기도할 때 모두가 소리는 내지 않지만 그것을 한 마음으로 복창해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이것을 가르침 받고 나서 어느 형제님이 기도할 때 마음 속으로 복창을 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소리를 내어서 하는 통성기도라고 하는 기도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소위 말하는 통성기도는 24절에서 가르치는 그 말씀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왜냐하면 기도내용이 각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이 기록을 보면 모두가 같은 말을 한 것을 볼 수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이 직접 개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교파에서는 소위 주기도문이라는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 경우는 모두가 다 암송해서 함께 소리를 냅니다. 이와 같이 사도행전 2-7장 사이에 하나님이 특별하게 역사해서 그 역사의 기록이 이와 같이 있습니다.
이 기도집회에서 기도의 모본을 볼 수 있습니다. 23절에는 석방된 사도들이 보고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당시의 장로들과 제사장들이 사도들을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로들과 제사장들의 말을 다 고하며 보고했습니다. 여기에 준해서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24-30절까지가 실제적인 기도로써 "주여"라고 부르는 말을 통해서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24절에서 주님을 "대 주재여"라고 불렀습니다. 29절에서도 "주여"라고 했습니다. 앞에 주여는 하나님과 관련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자 되신 것과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을 이 말을 통하여 기억하고 있습니다. 25절에는 시편 2편을 바탕으로 하는 기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2편의 내용이 성취된 것을 27절에서 다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일을 말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것들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기도 내용에 넣는 반면에 29절부터는 기도하는 사람의 원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 측에서 필요를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 이 내용들이 참고가 될 것입니다. 31절은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응답 즉 반응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응답 받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5:1-6절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5절에서 아나니아가 혼이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나니아의 생명을 취해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한 행동을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알게 했습니다. 따라서 이곳도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기적 같은 기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의 재산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 발 앞에 두었지만 일부를 떼어 놓았습니다. 여기 3절에서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가 범한 일의 본질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4장을 보게 되면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는 말씀이 37절에 나와 있는데, 36절에서 바나바가 그렇게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5절부터 아나니아가 발 앞에 둔 것까지 포함하여 "발 앞에 두니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35, 37, 5:2). 표면적으로는 모두가 똑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일부를 떼어놓고 모두를 다 드린 것처럼 꾸몄습니다. 4:32에서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라고 기록이 되어 있으며 모두가 하나가 된 가운데 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5장을 시작하면서 "그런데"(우리말 성경에는 없음)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러이러했다라고 하며 앞장과 비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잘못한 그 본질은 하나됨을 깬 것입니다.
5:12절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여기도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라는 표현이 있으며 "한 마음이 되어"라는 두 표현 사이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기록이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모임의 하나됨을 깨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임 교제 안에서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며 이 한 마음을 깨는 것은 대단히 큰 문제입니다. 모임에는 이와 같이 마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종종 이 마음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어느 모임에서의 마음은 그 모임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임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임으로 모일 때 자기 마음을 음미해서 살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5장에서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면 5절에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라고 했으며, 이 때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셔서 아나니아의 생명을 취해가셨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모임에 적용한다면 모임에 거룩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죄는 모임에서 제거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늘날 이와 같이 사람의 생명을 취해서 가는 죄의 제거는 많지 않다고 보며, 이러한 죄를 모임에서 직접 담당하는 사람들은 장로들일 것입니다. 만약 모임의 증거를 잃을 것 같은 죄가 드러나면 장로들은 그 죄를 제거해야 됩니다. 그리고 5-11절 사이에 두려워한다는 말들이 나옵니다. 11절에서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온 교회 즉 모임 전체 사람들이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내에서 최초로 교회라는 단어가 나오는 곳이 여기입니다. 모임의 교제는 사랑의 교제임과 동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제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경솔하게도 자기들이 한 일을 하나님이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개인과 모임 전체는 이와 같이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5:17-20절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여기는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을 시기하여 감옥에 넣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모임의 외부에서 들어오는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는 모임 내부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문제와 내부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차례차례 교대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20절에서 감옥에 들어갔지만 주의 사자들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왔으나 6장으로 가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납니다. 잘 아는 것처럼 6장에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이 봉사에 소외되는 일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장에 가면 스데반의 순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임의 증거는 이와 같이 바깥에서 들어오는 도전과 더불어 내부에서 발생하는 도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의 이 말씀은 매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이 기록을 통해서 보면 주님이 직접 개입했음을 알 수 있고 이것은 대단히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종종 믿음생활 가운데 옥에 갇힌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각자가 갇혀 있던 옥문을 반드시 여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위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갇힌 옥문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위로가 될 것입니다.
20절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우리들이 종종 환난이나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의기소침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임 안에 문제가 발생하면 전도하는 힘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는 말 속에는 계속해서 전하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5:42절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계속했다-일본어 성경)" 따라서 20-42절 사이에 곤란이 발생하더라도 계속해서 전도한다는 내용이 권해져 있습니다. 때가 좋지 않다고 판단되더라도 복음전하는 것을 계속하게 되면 모임이 축복을 받지 않게 되겠습니까?
12:6절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여기는 헤롯이 박해의 손을 뻗쳐서 베드로가 투옥되었습니다. 그리고 앞 부분에서는 야곱이 순교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넣어지고 6절에서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 것을 보면 편안한 가운데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푹 잘 수 있고 편안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마 5장의 경험이 여기의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5장에서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어서 옥에서 나오게 된 경험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주님의 사자가 행한다면 옥에서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봅니다. 과거의 살아있는 믿음은 미래에 연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만약에 순교한다면 자신의 지상에서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베드로를 쓰신다면 다시 감옥에서 나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무언가 주님을 위해서 할 역할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베드로후서를 보게 되면 베드로가 자기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가 기록된 시기는 로마의 네로가 박해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는 자기의 가르침을 성도들에게 다시 한 번 생각나게 하고 싶다는 마음을 드러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자기가 믿는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자는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기가 받았던 고난과 어려움을 그때 그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도 환난이나 고난을 당하더라도 복음전하는 것을 계속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7:54-60절
"54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55절에 "하늘을 우러러"라는 기록이 있는데 놀라운 말이고 굉장한 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하늘에 함께 앉히시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적인 경험, 영적인 신분은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는 신분입니다. 따라서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3장에서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하늘에 속한 자라는 의식을 가지고 행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의 소속은 하늘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로서 이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을 맡았으며 즉 대사 일을 맡았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일주일 생활 가운데 모임으로 모이는 시간들이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의 영향을 받기가 쉽다는 것을 말합니다. 일본 격언에 세상과 교제하면 빨개진다는 말이 있는데 세상에 물든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56절에도 이상스런 기록이 있습니다. 실제로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을 스데반이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도 하나님이 직접 개입해서 일으킨 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5절에서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스데반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지만 여기서는 하나님 우편에 서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구속의 일을 마치셨지만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임교제 한 가운데 주님이 임재해 계십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기도 합니다. 거기서 쉬시는 것이 아니라 일하시는 것도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주님을 의식하면서 교제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네 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 8:1-2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히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서 네 번의 기록을 보면서 예수님의 생애의 다른 모습을 말씀하는 것이 확인이 됩니다. 1장에는 아드님이, 8장에는 대제사장이, 10장에는 그리스도로서, 12장에는 예수님으로서 앉아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로서는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마치시고 앉으신 것을 말씀하며, 영광과 찬미는 아드님에게 합당한 것입니다. 8장에는 대제사장으로서 중보의 기도를 하시는 것을 기록하며 대제사장으로서의 주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10:12절에서는 그리스도로서 앉아 게시지만 13절에서는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라는 말씀을 통해서 기름 부은 받은 자로서의 그리스도는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12장에는 예수로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을 말하는데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를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분은 믿음의 주님이시고 온전케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으며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분이셨습니다. 이분을 바라봄으로 이분을 모본으로 삼아서 이분을 따르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기록에서는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이와 같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7장으로 돌아와서 59,60절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잘 아신다고 봅니다만 스데반이 한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과 닮았습니다. 59절에서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60절에서는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했는데 주님께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따라서 스데반은 예수님을 나타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모본을 따를 수가 있었습니다. 믿는 사람의 큰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이상으로 사도행전의 2장부터 8장까지 몇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최초는 성령이 내려와서 사람들이 방언을 했습니다. 이 기록에서 모임이 모일 때 말하는 사람만이 모임을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모임의 지체들이 함께 모임의 증거를 유지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대문에 전도집회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없습니다. 복음학교를 졸업하는 것은 없습니다. 참석하는 사람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하나가 되어서 복음의 일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 기록에서는 주님을 증거할 때 몸을 가지고 증거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제3의 성경이라고 불린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세번째 믿는 사람들의 교제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는 교제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서 모임의 기도집회를 보았고, 모임의 거룩함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오는 것과 스데반이 하는 역할도 보았습니다. 이 말씀들이 성도님들에게 조금이나마 유익이 되기를 바랍니다.
- 2015년 12월 25일 강서모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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