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의 가르침을 굳게 지킴
히로사와 노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여러분과 교제하고자 하는 것은 사도행전 2장부터 7장까지 예루살렘모임에서 있었던 일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2:1-14
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사도행전 1장과 2장은 중요한 경계가 되고 있습니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1장까지는 율법시대에 속해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부터는 은혜시대 또는 교회시대 또는 성령시대라고 일컬을 수 있습니다. 1절에 오순절이라고 말하는 이 날은 레위기 23장에 보면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다음에 오순절이 나오는 이날과 같습니다. 오순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50일째 되는 날과 관련이 있습니다. 120명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약속을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절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을 기다리라는 말씀이 있고 5절에는 성령의 침례의 약속이 있고 8절에는 성령이 내릴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기 위해서 모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4절까지는 1:4-8절까지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께서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주신 것을 말합니다. 이 때에 3가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라고 하는 청각적인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3절에서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라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각적인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4절에서 성도들이 외국어를 배우지 않았는데도 외국어를 말하기 시작했는데 즉 방언을 말한 것입니다.
성령이 내려온 것에 대해서는 8, 10, 19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8장에는 사마리아인들에게, 10장에는 로마인들에게, 19장에는 침례요한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려온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4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시각적이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방언을 하게 된 것은 2:3,4절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기사를 성령침례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절에서 4절까지는 성령과 우리들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을 받은 것, 하나는 성령으로 충만 된 것, 하나는 성령으로 방언을 말한 것, 이 세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성령침례는 몸된교회와 관련이 있습니다.
4절에는 성령충만이 나와 있으며 성경에는 성령침례를 받으라는 권함은 없습니다만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권함은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에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권함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했는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4-16장까지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 또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과 관련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 후반을 보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것은 방언에 관한 것이지만 또한 성령의 은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침례가 무엇인가를 나타내는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무엇인가, 세번째는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격을 가진 성령과 우리와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5-13절까지는 이 성령의 나타남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나타나 있습니다. 각자가 성령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 사람들이 놀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는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2절부터는 성령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2-4절이 성도들과의 관계라면 5절부터는 유대인들의 반응에 관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14절부터 36절까지는 베드로의 증거에 관해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특히 14절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여기서는 베드로가 12명을 대표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11사도와 같이 서서라는 말은 누가 밀어서 앞으로 나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성령이라는 말은 없지만 성령이 베드로를 앞으로 밀어내어서 베드로가 섰다고 하는 의미가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도 신성을 가진 성령의 활동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열 두명 중에 입을 열어서 복음을 말한 사람은 베드로뿐이었습니다. 열 한 명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와 같이 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복음전도집회에 연결시켜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전도집회에서 앞에 나가서 구도자를 향하여 말하는 사람은 보통 한 사람입니다. 형제자매들은 보통 듣는 사람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앉아 있는 성도들은 말하는 성도와 심적으로는 같이 서서라고 하는 자세가 여기서 말하는 의미일 것입니다. 말로는 복음을 전하지 않지만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형제님을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돕는다는 의미도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전도집회에서 듣는 사람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 복음 전하는 형제를 비판하는 시각으로 볼 가능성이 있으며 그러한 자세는 좋은 자세가 아닙니다. 듣는 자리에 앉아 있는 성도들도 복음을 말하는 형제와 같은 마음으로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소리를 높여 가로되(분명하게 말했다=일본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14절에서는 복음을 다루는 형제들에 대한 참고사항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성령이 앞으로 내어 밀 때 밀려나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소리를 높이되 분명하게 높여야 합니다. 따라서 애매한 표현이 아니라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라고 말했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17장에서는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기는 대상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천지창조로부터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기는 대상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선지서인 예언으로부터 복음을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14절에서 복음을 전하는 형제들이 무엇을 주의해야 되는지를 참고로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7가지 기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방금 읽은 내용에서는 성령이 내려온 다음에 방언이라는 표적이 있었습니다.
행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여기에 기적에 관한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1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 간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과 걷는 것은 인간의 특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에는 걸을 수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사람에게 구하는 것이 나와있습니다. 따라서 1,2절은 매우 대조적인 기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만이 두 발로 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의 몸에 관한 특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인 사람은 걸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특징을 잃어버렸습니다. 기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복된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구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에게 일시적인 구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구제인 구원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전능한 힘에 의해서 구제를 받았는데 앉은뱅이에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8절에서 두 가지를 회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라고 했습니다. 걸을 수 없었고 기도할 수 없었는데 이 두 가지를 회복했습니다. 우리들도 이전에는 이런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지금은 천국을 향해서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 앉은뱅이처럼 원래 있어야 될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9절에는 이 사람의 증거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0절에는 이 사람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심히 기이히 여기며"라고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말로 증거했습니다만 이 사람은 자기 몸을 가지고 증거했으며 구원받은 기쁨을 전신으로 증거했습니다. 증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말로 증거하는 방식이 있고 몸으로 증거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자연은 제2의 성경이라고 종종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증거가 시편 19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을 그러한 면에서 제2의 성경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제3의 성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믿는 자들을 보고 거기서 하나님을 읽어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의 삶의 방식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말이 아니고 몸을 가지고 증거한 몇몇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12장에 나사로가 나옵니다.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었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람들이 나사로도 보려고 모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3장에 앉은뱅이가 나아서 몸으로 증거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우리들에게 와 닿습니다.
구약성경에도 모세와 엘리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만나서 율법을 받고 있을 때에 그리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났습니다. 그 기사도 모세가 몸을 가지고 하나님을 증거했다는 말이 됩니다. 엘리사 시대에도 사렙다 과부에 관한 기사가 나옵니다. 우리 집에 출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틀림없다고 했습니다. 아마 엘리사는 하나님의 향기를 드러내었을 것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증거라는 면에 있어서 말로 증거하는 것과 몸으로 증거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세번째 기적은 사도행전 2:40-47절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42절에는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 모임의 성도들의 교제에 관해서 기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가"라는 사람의 인원 수를 생각할 때에 1:15절을 참고할 때 약 120명 정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41에서는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단순하게 모두 합치면 3,120명 정도 이상의 사람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120명 이상의 사람들이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확실하게=일본어성경에 있음) 받아"라고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지금은 많은 교파와 종파에서 자기의 이론들을 설파하고 있지만 여기서 3,120명 되는 사람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42절의 가르침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는 교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40절에서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으라"는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거기서 피하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의 무리는 패역한 세대에서 피해서 나온 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에서는 베드로의 전한 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교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교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패역한 세대에서 피한 사람들의 교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교제이며, 또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는 사람들의 교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8-19절을 보고 돌아오겠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이 주님의 명령과 조금 전에 보았던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굳게 지켰다는 것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19절에 "제자를 삼아"라는 말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제자를 삼아 ... 세례를 주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41절에 "제자의 수에 더해지니라(가입했다=일본어)"고 했습니다. 그리고 침례를 받았고, 42절에서 사도의 가르침을 굳게 지켰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마 28장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곳에서 지켜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120명 이상의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 말씀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며 기적은 아니지만 정말 놀랄만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교제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의 가르침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단순하게 성경말씀을 지킨다고 하면 몇 가지 어려운 점이 나오게 됩니다. 말씀을 기억할 때 중요한 규칙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정한 시대 배경이 있으며 이 시대 배경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 시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기도 하고 장막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장막생활을 했으니까 나도 제단을 쌓고 장막생활을 하겠다고 한다면 이상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족장시대, 율법이 주어지기 전 시대라고 읽습니다. 성경에 기록은 되어있지만 시대배경을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이상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신약에 맞도록 적용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이고, 장막 생활을 했다는 것은 신약시대 우리들은 나그네 생활이라는 것을 적용하면 영적으로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2:43-47절까지는 이 당시 성도들이 어떻게 생활했는가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은혜시대이고 교회시대에 들어갔지만 교회시대 중에도 사도들이 생존해 있던 초기의 교회시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순절 이후부터 휴거 즉 교회가 들려 올려질 때까지를 보통 교회시대라고 말합니다. 교회시대에서 사도들이 살아 있던 사도시대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43절에 사도들이 살던 시대에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지금은 기적이 없습니다. 또한 이 때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들의 하는 말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위한 하나의 기사이며 표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은사인 사도들의 은사가 지금은 끝났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기초가 놓여졌기 때문에 이러한 기사와 표적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도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모임에 관한 기록이 15장과 21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5:4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여기에 교회, 사도, 장로들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15:23절에서도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여기도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2장에서는 사도는 있지만 장로란 말이 없는데 그때는 아직 예루살렘 지역모임에 장로들이 세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5장에서는 예루살렘 모임에 장로들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21:17-18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여기서는 표현상으로는 사도가 빠져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사도의 일들이 장로들이란 용어로 바뀌어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와 같이 시대배경을 배려해서 읽는 것은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43절에 있는 그대로를 지금 현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시 2:44절로 돌아가서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절에는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이처럼 있는 그대로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대로 하자고 하며 그대로 적용하는 것에 어려움이 따르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에 가면 헌금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거기는 안식 후 첫날에 헌금한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2장에서 고린도전서 16장으로 가면 하나님의 규정이 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6절에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여기서는 매일 만찬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매일 성전에 모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매일 떡을 떼며 예루살렘 성전으로 직접 가자고 한다면 무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20장에 가면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안식 후 첫날은 주님이 부활한 날입니다. 주님은 안식 후 첫날에 주님 자신의 부활하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또한 오순절 날도 안식 후 첫날이었습니다. 46절에 떡을 떼는 것이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는 것으로 확정되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전도가 진행됨에 따라 모임의 장소도 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지역모임의 원 모습을 어떻게 추구하면 좋겠습니까? 사도들의 은사인 사도의 역할이 끝났을 그 때 신약의 선지자들에게 말씀 주시기를 다 끝낸 그 이후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된 그 시점을 기준으로 잡아야 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가 끝난 그 시점에 하나님의 교회의 본 모습의 원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계시하는 흐름의 전체를 보고 그 마지막 완성된 시점을 중심으로 추구하면 옳을 것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서신서라는 흐름을 알고 읽으면 혼란이 적을 것입니다. 침례와 만찬에 관한 의식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만찬과 침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그 명령이 실행되었습니다. 서신서에서 그것에 대한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발을 씻는 예식을 지금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내에서는 발을 씻는 세족식은 없습니다. 또한 서신서에서도 서로 발을 씻기라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가르침으로서 서로 용납하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2:42의 사도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라는 말씀을 올바르게 받아들이는 것은 중요합니다.
오후에는 다시 예루살렘 모임에 있었던 네 가지를 교제하고자 합니다.
- 2015년 12월 25일 강서모임 -
'주옥같은 말씀들 > 키타무라, 나이토오, 히로사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곱 사람이 나타낸 모임에서 역할 (0) | 2016.01.06 |
---|---|
예수님의 손(2) (0) | 2016.01.05 |
예수님의 손 (0) | 2016.01.04 |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0) | 2015.12.31 |
에디오피아 내시의 구원 (0) | 2014.06.10 |
지극히 가까이 계시는 주님 (0) | 2014.06.09 |
내부의 적들과 끊임없는 개혁 (0) | 2014.06.03 |
대적이 바깥에서 공격하는 방법 (0) | 2014.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