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의 어머니
프랭키 차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포도나무 소산은 씨나 껍질이라도 먹지 말지며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날 동안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 그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그로 인하여 몸을 더럽히지 말 것이니 이는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음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 그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니라.…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민 6:4-8,18).
이는 나실인의 성별을 위한 요구사항들입니다. 이 요구조건에는 “모든 날 동안”이라는 조건이 붙어있습니다. 나실인은 이같은 요구사항을 “모든 날 동안” 지켜서, 성별의 날이 차면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털을 밀어 제물과 같이 드립니다 압살롬은 아름다운 머리털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나실인은 그의 머리카락을 제물로 드립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 목전에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머리카락은 나실인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별되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성별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조심해야 합니다(4절).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별되기를 원한다면, 무엇을 섭취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좋은 섭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단지 모임에 와서 성경을 읽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성경을 매일 읽어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외모를 어떻게 할 것인지 조심해야 합니다(5절). 계속 기른 머리카락은 다른 사람과 나실인을 분명하게 구분해줍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옷을 입지 않습니다. 세상 여인들은 짧은 옷을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단정한 옷을 좋아합니다.
또한 우리의 감정도 성별되어 주님을 향해야 합니다(6절). 나실인은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을 때에라도 그 시체에 손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제일 먼저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부모를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않다.”
이 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부모님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주님을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후에야 부모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최고의 부모가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보다 부모와 자녀를 더 사랑하는 위치에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무엇이든지 우리 삶에서 최고의 자리를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으로 대체하면,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우리 삶의 최고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물론 남편과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들보다 하나님께 우리 사랑이 먼저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서 우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8절). 그는 거룩한 자가 됩니다. 연합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매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여 멍에를 메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교제는 항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모임의 교제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모든 날”이라는 표현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30일이 될지 1년이 될지 모르지만, 성별에는 정해진 기간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사기 13장으로 가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개념을 보게 됩니다. “그가 내게 이르기를,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삿 13:7).
7절에 나온 아이는 삼손입니다. 그가 구별되는 기간은 태에서 나올 때부터 죽을 때까지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주님을 짧은 기간 동안 섬기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오랜 동안 휴식하기를 원합니다. 그런 후 다시 짧은 기간 동안 주님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물론 섬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짧은 기간이라도 섬기는 것이 전혀 섬기지 않는 것보다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나실인은 평생에 걸쳐 주님을 섬깁니다. 이것은 제게 아주 도전이 됩니다.
이 장은 아주 중요한데 먼저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는 흑암의 시대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따라 행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많은 벌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대적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을 다스리게 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을 섬겨야만 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주님께 구별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우리의 길을 간다면 우리는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한 번 구원받으면 구원은 다시 잃어 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완고하게 하나님의 길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간다면, 벌을 받게 됩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항상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별의 날이 무효가 되어버립니다. 침체를 겪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때때로 경험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갔던 그 기간들은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권면은 침체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생애 최고의 것을 주님께 드리십시오.
사사기에 나온 유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3장 8절에서 메소포타미아를 8년 동안 섬겼습니다. 3장 14절에서 모압을 18년 동안 섬겼습니다 4장 3절에서 가나안을 20년 동안 섬겼습니다. 그리고 6장 1절에서 미디안을 7년 동안 섬겼습니다. 10장 7절에서 암몬 족속을 18년 동안 섬겼습니다. 이 모든 연수를 전부 허비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적을 섬긴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13장에 오게 되었습니다. 가장 어두운 시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삿 13:1).
그들은 블레셋 사람을 40년 동안 섬기게 됩니다. 노예 되었던 기간 중 가장 긴 기간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 시작합니다. 한 여인을 사용하셔서 회복시킵니다. “한 여인”입니다. 남자가 아닙니다. 그 교훈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13장의 개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절은 “죄가 계속된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2-7절은 “구원자의 계시”입니다. 8-14절은 “환상을 요구”. 그리고 15-25절은 “아들의 태어남”입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시 127:3).
시편 127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에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으로 올라가며 여행길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전반부와 후반부도 중요하지만 특히 가운데 부분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편 127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15개의 노래 중, 가운데에 있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3절은 1Z7편 내에서도 가운데 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해결책은 “여자의 후손”이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여기 사사기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도, 하나님의 해결책은 아들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일생 동안 나실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삼손이 나실인이 되는 것은 그 어머니에게 달려있습니다. 여기에 많은 자매님들은 어머님이십니다. 여러분은 모임을 위한 자녀들을 키우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형제님들은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감당하십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양육에 있어서 특별한 강조점을 어머니에게 두고 있습니다. 열왕기상이나 역대상을 읽으면 아실 것입니다. 왕들의 어머니의 이름이 특별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13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였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온 것을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 그가 내게 이르기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죽을 날까지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하더이다”(삿 13:2-7).
이 단락의 제목은 “구원자에 대한 계시”입니다. 2절에서 우리는 한 문제점을 봅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잉태하지 못합니다. 때때로 어떤 부부에게 자식을 못 낳는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은 남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아내가 잉태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 생애 가운데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그 문제보다 더 큰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 마노아의 아내는 삼손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아내는 불임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이 이 땅에 오는 것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을까요? 아담은 창조되었고 부모가 없습니다. 하와도 창조되었지만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습니다. 창조에 의해 아담이, 아담으로부터 하와가, 태어남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셨습니다. 이는 유일한 경우입니다. 이삭과 침례 요한도 비슷한 경우입니다만 여기서는 삼손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생물학적으로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문제가 있어서 불임인 경우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이 땅에 태어나게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잉태치 못하는 사람의 태를 여셔서 태어나게 하실 때 아 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3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여인에게 나타났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네가 잉태하고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태어나는 아들은 “태에서 날 때부터 나실인”이 될 것이라고 했고 그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일생을 나실인으로 살았던 세 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삼손, 사무엘, 침례 요한입니다. 이 세 명의 나실인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 놀라운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성별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나실인으로 태어날 아이에게 주지 말아야 할 것을 천사가 이야기한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 아이에게 최고의 것입니까? 아이들에게 최고의 것을 준다는 것은 무언가 주지 말아야 할 것을 포함합니다. 이것은 무언가를 주고 주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민감한 문제이므로 지금 이 시간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어릴 때 음악을 배웠습니다. 계속했다면 저는 아주 훌륭한 음악가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재능을 사용하기 위해 세상일에 바빴을 테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제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으로 지금의 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것은 주고 어떤 것은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이 그 아이들에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자랄 때를 모델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을 기를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주쳇모임으로 영접되기 전에 다른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저와 제 아내는 젊은이들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저희들은 성경공부를 하는데 시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부모들은 성경 공부 시간이 너무 많다고 불평했습니다. 아이들이 가족들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여러분은 부모로서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양육에는 아이들이 해야 할 일들이 있고 아이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인도함을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아이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13장에서 그러한 원리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인은 자녀에 대한 계시를 받았지만 남자는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 여인이 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내게 임하였는데 그 용모가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우므로 어디서부터 온 것을 내가 묻지 못하였고 그도 자기 이름을 내게 이르지 아니하였으며”(삿 13:6).
아이를 양육할 때는 항상 남자와 여자가 같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제게 조금 우울한 정보를 줍니다. 마노아는 좋은 남편이 아니었고 그 가정의 좋은 인도자가 아니었습니다. 친애하는 자매님들, 여러분의 남편이 여러분의 가정에 영적인 인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것으로 인해서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마노아의 아내와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로서 양육하는 자리에 남편을 계속 데리고 오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자매님들이 성별된 것을 남편이 보게 된다면 그는 바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친 내용이 아닙니까?
이제 8절을 보겠습니다.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주여 구하옵나니 주의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우리에게 다시 임하게 하사 그로 우리가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게 하소서”(삿 13: 8).
이 요청은 아이들이 태어날 때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배우게 합니다. 이것은 부모들에게 여러 가지를 교훈해줍니다. 아이를 기를 때 필요한 것을 주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9절은 우리에게 격려해줍니다. 하나님께 이러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시니라. 여인이 밭에 앉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그에게 임하셨으나 그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삿 13: 9).
그러나 응답은 아주 이상했습니다. 마노아가 주님께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여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 구절은 다시 한 번 남편의 부족한 인도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전일에 내게 임하였던 사람이 또 내게 나타났나이다”(삿 13:10).
친애하는 자매님들, 여러분의 남편이 충분한 인도력을 발휘하지 못할지라도 계속 그를 끌어 들이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끌어드리시기 바랍니다. 이 여인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친애하는 형제님들, 여러분은 이 단락에 있는 마노아 같은 분입니까?
여러분은 계속해서 아내와 상관없이 결정을 내리십니까?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도력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아내와 같이 상의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와 같이 하나님께 구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우실 것입니다.
마노아도 자녀 양육에 대해 묻고 나실인의 서원을 그 답으로 듣게 됩니다. “마노아가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삿 13:12).
서점에는 양육에 관한 많은 책이 있습니다. 저는 그 책들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육에 있어서 기본 개념은 아주 간단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먼저 성별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먼저 성별된다면 여러분의 아이도 성별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아이들을 사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다음 세대에서 주님을 위해 사역할 것입니다. 이 모임의 간증이 계속해서 유지되어갈 것이고 더 많은 영혼들이 더해질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임의 미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우리 모임의 미래는 지금 우리의 성별됨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 자신의 성별됨을 보았을 때 우리를 따라서 성별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노아의 아내가 먼저 성별된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 남편을 끌어들였는지를 보았습니다.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삿 13:15).
이 요청에 대한 여호와의 사자의 답변은 16절에 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리나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하니, 이는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지 못함을 인함이었더라”(삿 13:16).
우리는 이 두 구절에서 마노아의 아내의 특별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리라”라고 한 모습을 주의 깊게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기록을 아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두 명의 천사와 함께 그를 방문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식사를 대접하게 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함께 좋은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식사는 교제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마노아가 계속적으로 간증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마치 마노아가 그 번제를 다른 신에게 드린 적이 있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것은 마노아가 우상을 숭배한 적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인줄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었도다.”
거기다 마노아의 무지함을 보게 됩니다. 형제님들, 가정에서 그리고 모임에서 좋은 인도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계속 동일한 간증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해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우상 숭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마노아에게서 그 좋지 않은 예를 봅니다.
이 여인은 어떻습니까? 삼손의 어머니는 좋은 본이 됩니다. 2절에 삼손 어머니의 잉태하지 못함이 나옵니다. 3절에서 남편이 아닌 아내에게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4절에서 성별의 요구가 다시 나옵니다. 6절에서 그녀의 지식을 보게 됩니다. 그녀는 여러 면에 있어서 불리한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합당한 자리에 끌어들이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10절을 보겠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아주 좋아합니다.
“여인이 급히 달려가서 그 남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전일에 내게 임하였던 사람이 또 내게 나타났나이다”(삿 13:10).
그녀의 강한 믿음과 그 확신의 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절을 보겠습니다. “그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그 아내가 그에게 어르되,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이제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이르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였더라”(삿 13:22-23).
마노아는 아내에게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
이는 그녀의 놀라운 이해력을 보여 줍니다. 친애하는 자매님들, 특별히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분들께 말씀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이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여러분과 관련 없는 메시지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지혜와 이해력은 모임 안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제가 싱가폴 모임에서 말씀을 나눌 때, 어떤 자매들이 말씀을 들은 후 저에게 와서 느낌을 말합니다. 저는 그 같은 평을 기쁘게 듣습니다. 제 아내가 비평할 때도 아주 기쁘게 듣습니다. 우 리는 자매들의 지혜의 도움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노아의 아내의 놀라운 점들이었습니다.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삿 13:24).
여기서 여러 가지 변화를 보게 됩니다. 첫 번째 변화는 아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삼손이라고 짓습니다. 삼손이라는 이름은 해가 밝게 빛난다는 뜻입니다.
이때는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들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 마지막에 해가 밝게 빛난다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제 암흑의 시대가 계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 집회 장소에서도 해가 밝게 빛나는 아들딸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을 잘 키워야 합니다. “아이가 자라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을 가진 남자와 여자로 양육해야 합니다.
모임의 간증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갈 후손으로 자라야 합니다. 또한 삼손에게 성령이 내린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축복을 그에게 내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한 구원자가 태어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이스라엘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한 여인의 성별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삼손의 슬픈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어머니가 할 수 있는 모든 책임을 다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을 놀라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태어나게 만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선한 간증을 보였습니다. 마노아는 우상숭배를 했고 무지하였습니다.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다 내려 가서 그 시체를 취하여 가지고 올라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 아비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 사사로 이십 년을 지내었더라”(삿 16:31).
여기서 아비 마노아의 장지가 나옵니다. 이 구절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노아가 변화된 것입니다. 그는 그 아내의 경건으로 인해 선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노아의 장지가 생겨났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마노아의 아내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일 것입니다. 마노아가 그 가정의 머리이기 때문입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그로 인해 영광을 받습니다.
우리는 모임 가운데서 머리됨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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