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헤이
마가복음 1장 9-20절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조금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중요한 가르침 중에 하나인 예수님의 신성과 성령에 대해서 또한 실제적인 교훈에 대해서도 마가복음 1장에서 보았습니다. 침례 요한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는데 그는 약대 옷을 입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종종 침례, 요한 같은 그런 복장을 했습니다. 그는 걷고 일하고 그리고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는 옷 입음을 통해서 어떻게 섬길 준비를 했는가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원리가 무언가 하면 디모데에게 원하기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종종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에 느슨할 때가 있습니다. 학계 시대 사람들처럼 해야 될 일을 하지 않고 느슨하게 지내는 때가 있습니다. 성전을 지을 때가 아니라고 그들은 말했으며 그 상황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침례 요한처럼 허리띠를 띠고 일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침례 요한은 언제든지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침례에 대해서도 보았습니다. 하늘서 내려오는 목소리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침례 요한의 소리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 아버지의 소리입니다. 또한 성령이 내려오는 것도 봅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봅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온다는 말은 어떠한 성품을 갖고 있는가를 보이는 것입니다.
오순절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오순절에는 성령이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으로 내려왔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혀에 갈라짐 같은 모양으로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회개한 유대인들과 회개한 이방인들이기 때문에 성령의 혀같이 갈라지는 두 개의 모양으로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가 말하는 중요한 가르침의 핵심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그 둘을 하나로 만드사라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혀의 갈라지는 두 갈래 모양으로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말씀이 전파되어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는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예수님이 명하셨습니다. 성령의 권능이 임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면 네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오순절날 임한 성령의 모습이 그 상황에 맞게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양으로 임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라는 단어가 나올 때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내가 비둘기 같이 슬퍼하며”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은 한편에서는 예수님의 상징과 특징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고통을 가진 분으로 언급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하는 모습을 세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감람산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그리고 나사로에게 가서 슬픔을 보였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가지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웃음을 크게 웃는 그런 장면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미소를 안 지었다거나 예수님이 웃지 않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좋아하시는 걸 보면 미소가 없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예수님이 미소를 지으시거나 웃으신다고 하는 표현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슬픔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기본적으로 고통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의 사람이며 어떤 사람을 예수님보다 더 슬픔이 많은 사람을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두 슬픔이 한 사람의 슬픔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점점 더 슬퍼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슬픔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합니다. 예수님은 비둘기처럼 슬퍼하셨습니다. 비둘기 같이 나타난 또 한 모습은 예수님이 거짓이 없는 순수함을 갖고 계신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입에는 거짓이 없다고 했고 그리고 흠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일렀으리라”고 말씀할 정도로, 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숨기는 것이 없이 순수했습니다. 완전하게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성품을 갖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반구 즉 산비둘기에 대해서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산비둘기를 말하면서 돌아올 때를 안다고 말했습니다(렘 8:7). 언제 떠나야 되는지를 알고 배우면 언제 다시 돌아야 되는 때를 안다고 예레미아는 말했습니다. 따라서 그런 의미로 아가서에서는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아 2:12). 즉 산비둘기, 즉 반구의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봄이 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언제 도착하고 언제 떠나야 할 때를 모르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어떤 하실 때를 모르셨겠습니까? 나사렛에서 언제 떠나야 되는지, 예루살렘에 가면 돌을 언제 맞을지 모르고 가셨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를 예수님이 지나가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약속한 때가 온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초막절의 기사를 여러분은 아실 겁니다. 육신의 동생들이 말하기를 “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가소서”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가지 않고 명절 중간에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정해진 때를 잘 아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가나의 갈릴리 혼인 잔치를 아시죠? 거기는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잠시 얘기하면 마리아 역성을 거절하는 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때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매일 아침에 하늘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듣는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반구가 그 때를 아는 것처럼 따라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온다는 것은 이런 의미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또한 다른 성경에서는 성령이 그 안에 함께 거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 최초 출현의 원리라고 하는 성경을 보는 원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개념을 올바르게 알려면 그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된 곳을 가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 어떤 단어가 어디서 맨 먼저 나오는지를 찾아보는 원리를 말합니다.
성경에 최초로 언급되는 비둘기는 어디서 나오고 있습니까? 이것은 노아 방주와 연결되어서 최초의 비둘기가 언급됩니다. 비둘기를 노아가 방주에서 내보냈습니다. 비둘기는 어디에 앉아 있을 곳을 찾지 못했다고 언급합니다. 증거의 시대의 성령은 전 세계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에게 임재하셔서 그 사람에게 능력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마치 성령이 단순히 그냥 내려오셔서 임하는 정도가 아니고 거한다고 하는 표현으로 언급됩니다. 성령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함께 거할 대상을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 때 성령이 비로소 거할 수 있는 거처를 말합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을 기름부었다는 표현으로 썼습니다. 이사야 61장에 “내게 기름을 부으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을 위해서 성령을 기름 부음이라는 표현으로 다른 곳에서 사용했습니다. 주로 이스라엘에서는 왕이 세워지기 전에 왕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또한 천지자들은 선지자 일을 하기 전에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또한 아론은 제사장이 될 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이기도 하고 제사장이도 하고 왕이기도 하기 때문에 세 번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제사장으로 소개합니다. 내게 기쁨의 기름을 부으시고 일을 하게 하시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시편 2:6절에서는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거기에 바로 예수님의 기름부음 받음이 존재합니다. 여기는 왕으로서의 기름부음을 말합니다. 요한으로부터 침례를 받는 요단강변에서는 선지자로서의 기능을 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기름 부음이 연결돼 있습니다.
성령 기름 받은 이후에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성령이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달리 표현합니다. “성령에 이끌리시어”라고 표현하지만 그 안에서 여기는 성령이 이끄신다는 말은 왕을 모셔가는 것처럼 성령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광야로 성령이 인도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가는 모습이 누가복음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성령이 강력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으로서의 모습이기 때문에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라고 강력한 표현을 썼습니다. 이제 마가는 예수님의 시험에 대해서 아주 특징적으로 말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처럼 세밀하지는 않지만 다른 복음서에서 묘사하지 않는 묘사가 있습니다. 들짐승과 함께 계시다는 것과 또한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는 말도 특이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유혹받는 때와는 다르다는 표현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은 아주 아름다운 정원에 있었지만 예수님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풍성한 과일을 맺는 나무들이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은 광야에서 굶주렸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천사들이 아담과 하와를 내어쫓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룹 천사들이 에덴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천사들이 내어쫓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수종드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 대해서 시편 91편이 인용되었습니다. 뛰어내리라고 하는 사단의 유혹이 기록됐습니다. 그 시험을 30년 지난 다음에 예수님에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출생할 당시에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시도가 헤롯에게서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천사들을 보내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천사들이 요셉에게 꿈으로 현몽했습니다. 여기 천사들은 시험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시험을 했습니다. 이미 시험이 있었습니다. 이 천사들은 예수님을 수종들었습니다. 예수님을 이런 면에서는 현실상 어렵게 하지 않고 수중을 드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또한 겟세마네에서는 천사들이 예수님께 힘을 북돋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수종드는 천사들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이 점을 강조했습니다. 골로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천사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의 창조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만드신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더 낮게 되셨습니다. 어떤 경우는 천사들이 예수님을 수중들어야 하고 어떤 경우는 천사들이 예수님에게 힘을 북돋우어야 할 정도로 예수님이 자기 피조물보다 낮은 위치를 취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인류 역사에서 최초로 사람에게 마귀가 패한 장면입니다. 여기서 보면 예수님이 우리가 정말로 기뻐해야 될 압도적인 승리를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유혹에 대해서도, 시험에 대해서도 조금만 기록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여기에 들짐승에 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들짐승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중에 있는 새나 들짐승이나 또는 바다에 있는 물고기에 대해서도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있는 피조물 즉 바다에 있는 물고기나 직접 예수님이 모든 물고기를 하나하나 다스리기 때문에 베드로의 낚시에 걸리는 그물조차도 예수님이 그 고기를 통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물고기떼도 통제하시고 배드로의 낚시에 걸리는 물고기 중에 한 마리 물고기도 구체적으로 통제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공중에 있는 모든 것들을 통제하십니다. 예수님은 닭 한 마리가 언제 울어야 되는지를 통제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들에 있는 들짐승까지 직접 한 마리 한 마리 통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길들이지 아니한 나귀 새끼가 왔을 때 아무런 저항 없이 예수님의 명을 따랐습니다. 여기에서 시험받으실 때 들짐승 중에 어느 한 마리도 예수님께 도전하는 들짐승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분은 전 우주를 지은 위대한 창조자이기 때문입니다. 전 피조물을 통제할 수 있는 창조자이십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복음의 전도의 시작을 나아감을 서술합니다. 예수님이 전도하신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침례 요한이 잡힌 후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고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순교자가 됐습니다. 요한이 잡힌 이후에 예수님이 전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단순한 실제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요한 사이에 어떤 경쟁 관계도 예수님이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예수님과 요한 사이 또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사람들은 경쟁심을 유발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분명히 경쟁 관계가 아님을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가 침례 요한의 제자보다 많다고 표현돼 있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자신에게로 사람들을 이끄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결코 경쟁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경쟁을 유발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결코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바울과 아볼로를 경쟁 관계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 둘 사이를 경쟁 관계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의 일에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각각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한 종은 구원자들을 죄인들을 구원하는 복음에 일을 하고, 한 종은 그 구원받은 사람들을 양육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물을 주는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기초를 놓는 것이고 한 사람은 기초 위에 쌓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일들은 서로 보완하는 것이지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따라서 다른 여러분들의 은사를 쉬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를 올바르게 쓰십시오. 각 사람에게 그 원하시는 대로 은사를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은사에 대해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은사를 올바르게 쓰시기 바라고 그것을 게을리 다루지 마십시오. 그 은사가 어떻든지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 은사를 받고 그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은사를 받은 것이 다른 사람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면 덕을 세우는 대로 쓰는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것을 들은 예수님을 조용히 기다리셨습니다. 때가 될 때 요한이 감옥에 들어가고 순교를 당할 때까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왕국의 복음을 전하셨으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선포하셨습니다.
여기는 왕국을 전하는 복음입니다. 이 말은 지금 현재 우리가 구원받는 교회 시대 복음과 왕이 오는 것을 전하는 왕국의 복음은 약간 다릅니다. 물론 복된 기초는 같습니다.
근본이 같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만 왕국의 복음이든 또는 교회 시대의 복음이든 같다는 것입니다. 왕국에 관한 복음을 전할 때, 이 왕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데 믿음의 근본은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전하는 복음을 특히 은혜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했습니다.
여기에 그 다음에 예수님이 제자라를 부르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사람은 시몬이었고, 한 사람은 안드레였는데 바다에 그물을 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언제나 바쁜 사람들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게으른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들은 그물을 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은 그물을 고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모세는 양들을 돌보는 중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또한 기드온은 포도주틀과 곡식을 떠는 가운데 부름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세관 사무실에 앉아 있을 때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쁜 사람을 불러서 쓰십니다. 사람들은 좀 느긋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잠언에 말하기를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구으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경고하기를 침대를 끼고 있는 사람들을 경고했습니다. 침상은 게으름을 상징하는 물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떤 왕에 관한 침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옥의 왕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사람의 침대 치수가 나와 있습니다. 굉장히 큰 침대였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의 침대 사이즈가 아니라 큰 침대였습니다. 여기에 이 사람에 관한 기록이 바로 침상에 관한 기록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쁜 사람을 하나님이 쓰신다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들은 그물을 치는 중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가까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느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을 예수님이 일을 하게 하십니다.
또한 베드로의 모습은 특징적입니다. 안드레와 베드로의 언급이 특이합니다. 안드레를 종종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고 형제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마치 그림자처럼 언급되는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관한 기록들 중, 또한 마리아 중에서 어떤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라고 언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다른 곳은 다른 마리아가 나오는 면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뒤에 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이런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는 누구누구의 아들이라고 이렇게 불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사람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안드레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라고 불리었습니다. 여러분 안드레처럼 어떤 사람의 그림자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공적인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한 번 전할 때 수천 명이 구원을 받는 도구가 됐습니다. 처음에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도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개인적인 쓰임을 받는 도구였습니다. 요한복음에 세 번이나 안드레는 어떤 개인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처럼 사실은 베드로를 먼저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이 안드레입니다(요 1:42). 요한복음 6장에는 예수님께 안드레가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헬라인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어떤 경우에 공적인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는 공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그렇게 수가 많지 않습니다. 여기는 자매님들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모든 형제님들이 공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한 사람이 혼자 목회자가 되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형제들이 동일한 목회자라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는 사람만 전도자의 일을 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은사를 주시는 그대로 쓰는 사람을 하나님이 쓰십니다. 교사 은사를 받은 사람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분명히 있어서 예수님의 어떤 것들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 한 사람한테 각각 알맞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같은 사람은 수가 적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드레 같은 은사를 갖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서에서 특이한 한 사람을 보겠습니다. 누구에게 전도지를 가지고 전하러 나갔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주변에 어떤 전도자가 사람이 많은 가운데 가서 복음을 전할 때 마음에 열심을 가지고 전하는 겁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대적하고 있다는 그런 상황입니다.
여기에 복음을 전하러 오게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쓰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다. 대적하는 상황에서는 누구에게 내가 부탁을 해서 거기에 가라고 하는 말을 잘 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저는 부탁을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께 사람을 오라고 초청한 그 초청의 마지막이 언제냐고 제가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안드레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공적으로 하지 못하는 일을 안드레 같은 사람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대답하는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부름을 받았을 때 핑계를 대면서 즉각 응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도 하나님 부름 받았을 때 즉각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18절에 보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며 그 행동이 아주 민첩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일을 주실 때 여러분은 즉시 반응하십니까? 여러분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말씀이 명할 때 그 말씀에 즉각 곧이라는 표현처럼 응답을 하십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종들이 있다면 하나님이 말씀을 주실 때 그 말씀에 즉각 반응하십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곧이라는 표현이 나왔던 것처럼 즉시 응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조금 더 가시다라는 표현이 나와 있는 것처럼 조금 더 가셨습니다. 여기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두 형제가 같은 날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어떤 일을 위해서 어떤 일을 그만두는 상황에서 여기서 보면 야고보가 먼저 부름을 받았습니다. 전 생애에 주님을 섬기는 그 시기 가운데서 여기서 구원받은 순서는 야고보가 먼저이지만 전 생애를 놓고 볼 때 요한은 오랫동안 주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야고보 요한처럼 다르게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야고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기간이 순교하기 전까지 사도행전 12장까지만 있는 그런 짧은 선교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렇게 부르셨다면 이 기간은 하나님에게 대단히 중요한 기회입니다. 여러분은 결코 더 이상 시간을 갖지 않겠지만 이제 어떤 왕들은 아주 젊은 나이에 자기 조상 다윗을 따랐습니다. 요시아 왕은 16살 때 조상 다윗의 길을 따라가고자 결심을 했습니다. 마음속에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중요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40살에 죽었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닙니다. 어떤 왕은 오랫동안 섬기고 어떤 왕은 짧은 시간 동안 섬겼습니다. 마치 야고보와 요한처럼 말이죠.
여기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사람들 중에 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를 여러분이 과소 평가하지 마십시다. 우리는 모두 요한처럼 오래오래 섬기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야고보처럼 짧은 기간 동안 주님을 섬기기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물을 깁는 일을 하다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물을 깁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쓰임에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마치 깁는다는 것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갈라디아 6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수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격려하고 돕는 것은 마치 그물을 깁는 것과 같습니다. 아비 세베대와 삯군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우선하고 자기가 하던 일을 이차적인 일로 자리매김을 올바르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비와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굳건히 예수님을 따르는 결심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최우선적인 관심의 과제가 되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아버지 세베대와 삯군들을 배에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버렸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요한과 야고보의 살림은 넉넉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희생이 때로는 요구됩니다. 요한 마가가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가를 잠시 보았습니다. 요한 마가도 그렇고, 야고보의 형제 야고보도 그렇고 예수님을 따르는데 희생을 치렀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인생에서 어떤 길을 택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택한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쩌면 모세같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할 때 그 결정이 영원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통해서 결정하면 도움이 됩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을 더 귀한 보화로 여겼다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으면 결심해야 되는 지점이 올 겁니다. 구원을 받아야 될 사람은 선택하는 선택의 선택지가 하늘이냐 지옥이냐 했습니까? 여러분이 순간순간 선택의 순간이 올 겁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것이 하늘인지 땅인지를 선택할 것입니다. 구도자는 하늘인지 지옥인지를 선택할 것입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5월 4일(토) 오후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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