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잭 헤이

베드로전서 1장 13-25절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베드로는 구원에 대해서 주로 말하고 있는데 이 구원은 구약에서 예언돼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원이 신약 성경에서 복음 전하는 자들에 의해 전파되었습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선지자들을 성령이 감동했듯이 신약 성경 전도자들에게 성령이 복음을 전할 명령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1장 앞부분에 주로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13절부터 끝까지 읽었는데 여기서는 이 구원에서 거룩으로 주제가 바뀝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거룩한 삶을 사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선 마음에 관한 부분이 있습니다. 거룩한 삶의 출발은 마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주로 유월절날 이집트를 떠날 때 허리를 동이는 것과 연결돼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는 희생된 양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월절날 양을 잡고 양고기를 먹을 때 허리를 끈으로 동이고 먹었으며 그리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이전에 있던 종의 생활을 모두 끊고 이집트를 떠나기 위해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동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지 않으면 앞으로 재앙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적인 삶의 풍성을 위해서 우리는 마음에 허리를 동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주의할 핵심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들의 출발점은 눈을 통해서, 그의 눈을 통해서 마음이 결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터넷에서 무엇을 보는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읽는 책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많은 것들 대부분의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오염시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말합니다.

 잠언은 말합니다.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그 사람의 행위가 어떠하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운동장에서 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전쟁터이지 놀이터가 아닙니다. 우리는 먼 거리를, 먼 장래를 보고 계속 행진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불행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쾌락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언을 염두에 두고 근신하라”고 말합니다. “너희에게 임할 온전한 은혜를 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로서 여러분들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라기를 바랍니다.

 이전의 앞부분에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한 소망을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산 소망이 있게 하시고”(3절)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여러분에게 가져올 은혜가 있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산 소망 중에 하나는 휴거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나타남이 여기에 포함돼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먼저 휴거 될 것입니다. 공중에 오실 때 우리 모두는 끌려 올라갈 것입니다. 우리는 휴거 이후에 주님의 영광과 함께할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그냥 지옥가지 않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영광과 상관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크고 흰 보좌의 심판대 옆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흰말을 탈 것입니다. 나는 평생 말을 탄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앞으로 흰말을 탈 것입니다. 주님의 이김의 편에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이 흰말을 탈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가지고 온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즉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이 은혜 이전에 구원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어려움 가운데 시련 가운데서도 은혜가 있다는 것도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은혜들은 영광 가운데 주님과 함께 할 은혜도 있습니다. 앞으로 올 소망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일들이 지금 현재 여러분의 삶 속에 어떻게 영향을 주겠습니까?

 여러분은 물론 순종의 자녀로서 순종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순종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사람들의 생득적인 특징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믿기 전에는 불순종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불순종의 자녀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믿고 난 이후에 달라졌습니다. 여러분은 복음에 순종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서신에서 이런 부분을 많이 말했습니다.

회개는 구원의 모습입니다. 회개하고 믿으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이 순종은 평생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자녀로서의 모습을 보일 겁니다. 이제 순종의 자녀로서 이전에 불순종하던 그러한 정욕을 따라 살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이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이전 순종치 않을 때의 정욕을 따르지 말라고 베드로가 말하는 것처럼 바울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세계에 있는 이 세상의 환경이 여러분을 압박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도덕의 기준을 성경을 제공합니다. 세상은 다르지만 이제 제시한 그 기준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세상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본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본질은 세상에 있는 것과 그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도덕의 기준이 다르고, 또한 영향력이 다르고, 또한 관심이 다르고 이 세상을 그런 면에서 본받지 말기 바랍니다.

여기는 “이전 알지 못할 때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라고 합니다. 이전에 회개하기 전 그 삶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세상 흐름에 흘러가는 것은 쉽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해 나가는 것은 쉽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순종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던 것처럼 다른 말로 말하면 이전 옛 삶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전 알지 못할 때 좇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비해서 베드로는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거룩을 말하는 베드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다섯 번 이상 서신에서 너희가 부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그것을 나중에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그분이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특성 중에 하나님의 삼위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 그리고 성령. 삼위의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이사야는 말합니다. 높이 들린 그분의 이름이 거룩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아버지여”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마귀조차도 거룩한 아들이라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영이라고 불리는 이 명칭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성령이라는 말 속에서 ‘성’은 바로 거룩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거룩하시고 그 독생자가 거룩하시며 성령이 거룩하십니다. 이 부르신 분이 거룩하십니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하신 자처럼 너희도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합니다. 그분이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거룩한 자라는 말은 그 사람의 삶 전체가 거룩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몇 군데로 잘라서 삶을 생각하거나 봅니다. 가정생활을 본다든지, 여러분은 거룩한 가정을 갖고 있습니까? 가족 간의 이 부분에 어떤 괴리가 있습니까? 이제 여러분에게 거룩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거룩한 가정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의 직장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직장에 있으면서 정직하십니까? 또한 동료들에게 유익이 되는 직장인입니까? 여러분이 쓰는 말이 적절합니까? 직장에서 여러분의 삶이 거룩합니까?

모임 생활은 어떻습니까? 오고 갈 때 즉 출입할 때 여러분 삶과 모임 생활이 거룩합니까? 모임은 연결된 하나의 집단입니다. 모임의 구성원들 간에는 모든 성도님들이 가장 적절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임 생활 내에서의 거룩함을 말입니다.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 속에 베드로는 너희의 삶 전체가 거룩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 모든 면에서 거룩하라는 것을 의미랍니다. 또 베드로는 다른 이유에서 왜 우리가 거룩한 자가 돼야 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맥도날드라는 분이 거룩하다는 말을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은 이 거룩에 대해서 ‘잊어버린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거룩하라고 말을 하셨지만 사람들이 잊고 있습니다. 그분이 말하는 것처럼 여러분 삶 속에서 잊어버렸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베드로는 다른 이유로 또 거룩한 삶을 말합니다. 너희가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른즉”이라고 말합니다. 자녀들은 아버지가 거룩한 삶을 살면 아버지의 거룩을 보고 구원받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한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엘샤다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여호와로 나타났습니다. 출애굽기 6장에 여러분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족장들에게는 여호와로 나타나시고, 우리가 여호와라는 명칭을 들을 때,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봅니다. 여호와라고 나타난 출애굽기 6장에서는 네 조상에게 내가 나타나서 약속한 것처럼 너희에게 그 약속을 내가 적용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니라, 엘샤다이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엘 샤다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여호와로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합니다. 이것은 아버지라는 말은 친숙함이 지나치면 안 됩니다. 이분을 부를 때 올바른 경외심을 가지고 불러야지 너무 친해서 경박하면 안됩니다. 거룩하다는 것과 아버지라는 말에 균형이 있어야지 이것에 균형이 깨어지면 안 됩니다.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도 거룩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거룩해야 되는지 다른 한 이유를 말합니다. 이분은 사람들의 얼굴을 봐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계시였습니다마는 이 말은 베드로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죄인들을 대할 때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대하신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차별 없이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고 베드로는 전했습니다. 사람들에 관한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나이가 보통 많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혹시 여러분의 아버지가 장로입니까? 여러분의 아버지가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입니까? 이것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한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장로의 아들이든지, 17절에 나오는 말씀대로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위해서 내가 다른 말로 말하면 최종적으로 그 심판대에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것으로 보면, 성경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으로 행한 일에 대해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여러분의 주님을 섬기는 시기는 끝납니다. 이제 주님 앞에 서서 우리가 이 땅에서 몸으로 섬김에 대한 평가를 받습니다. 여러분이 숨을 거두는 순간에 더 이상 주님을 섬길 기회는 없습니다. 몸으로 행한 일을 할 기회가 그걸로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동안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순종하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때 모든 사람이 주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지금 현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살펴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행위를 보고 판단하였습니다. 지난 번에 한 말을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어떤 경우든지 간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주님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 것을 의미합니다.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이 거룩하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합니다. 외모를 보시지 않는 그분을 판단하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권합니다.

 이제는 이전에 있던 삶을 버리고 말합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유월절에 관한 사건을 많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 있다가 유월절날 바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그대로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이라는 용어를 베드라는 씁니다.

여러분은 여기 이 땅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시민권, 즉 국적은 하늘에 있습니다. 옛날, 이전에 있던 것들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산다는 그 말의 의미로 여기서 베드로는 종종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국가에 대해서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베드로가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왕들을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있는 조직을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대정부 투쟁을 해서도 안됩니다. 정부를 대적할 때는 딱 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 정부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걸 알 때 그때는 대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운 권세에 굴복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그리고 왕들을 존경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이 땅에서 여러분이 정부를 대적하는 시민이 안 될 겁니다. 그 정부를 대적하는 플래카드를 들면 안됩니다. 나그네와 행인으로 있을 때를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산다면 이 사회에 대해서도 다스리는 사람들을 존경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로 2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사환들에 대한 이야기와 주인들에 대한 말도 나옵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라고 벧전 2:1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먼저 그 직장의 상사를 두려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직장에서 직장 상사를 복종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임금 인상을 위해서 회사에서 문제를 분쟁을 일으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이런 일과 관련해서도 그 있던 직장에서 선거를 위해서 태도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직장 생활할 때도 여러분이 나그네와 행인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또한 3장에서 가정 내에서 어떻게 행할 것이냐에 관한 부분에도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3장에서는 여성이 구원받고 남성이 구원받지 않은 가운데 부부의 관계에서 베드로는 말하면서, 그 믿지 않는 남편이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믿는 여성이 믿지 않는 남편에게 강압적으로 남편에게 믿으라고 압박을 가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순전하게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남편이 영향을 받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먼저 믿은 아내가 하나님을 경영함으로 순전함을 유지하면 그 영향이 남편에게 강하게 임한다는 것을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원칙입니다. 기본적으로 행인과 나그네로 살 때 가정 생활에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를 말합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너희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여러분의 삶 가운데 어떤 부분을 하나님이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살아가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거룩하라고 격려합니다.

이 기준 가운데 어떤 분을 기억하라고 권면하는데, 그분이 누군가 하면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저는 베드로가 은이나 금으로 구속된 게 아니라는 말을 베드로는 매우 기뻐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사도행전 3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이라고 말한 걸 통해서 만약에 은과 금으로 구원받는다면 베드로는 구원받지 못했을 겁니다.

따라서 존귀한 보배로운 피로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우리의 부정으로부터 구속받은 것은 악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난 것은, 또 한편에서는 바울은 구원이 이와 같이 부정에서라고 말했지만 구원이 율법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표현한 것을 통해서 다른 측면이 있음을 말했습니다.

 

여기에 “이전에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이라고 하는 구원의 또 다른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근본적으로 망령된 행실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허무한 망령된 삶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속을 위해서 무엇이 지불이 되었습니까?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가 자신을 드림으로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해방으로부터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어떠한 대가가 지불됐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이제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는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우리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어떤 대가가 지불됐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죄와 우리의 삶에 관한 구속에 구원의 측면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우리를 위해서 지불된 보배로운 그리스도의 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피라고 말합니다. 왜 이 말을 하는고 하니 우리를 구속한 이분에게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완전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장에서는 구속보다도 우리의 죄를 담당하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이 일을 하기 위해서 그분에게는 죄가 없다는 의미로 말했습니다.

3장에서는 우리를 화목시키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죄를 위해서 고난을 받음으로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끌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베드로는 어떠한 질적인 가치가 주님에게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를 위해서 어떤 분이 자기를 드린다면 거기에 걸맞은 가치가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거룩한 삶이 아니라면 우리의 죄를 위해서 드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만약에 구속한 대가로 지불되는 그 재물이 점과 흠이 있다면 그것은 구속이 성립이 되지 않을 겁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동일한 개념의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 양이 되셔서 희생이 됐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유월절을 지키되”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주님의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는 누룩이 들어 있지 않는 그것을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문자적으로 누룩 없는 유월절을 정말로 지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로 누룩 없는 유월절을 지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모든 누룩을 제거한 가운데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의 유월절양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으니”라고 말해서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살도록 고린도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따라서 베드도나 바울이나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의 거룩을 요구한다는 것을 공통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감히 이 갈보리의 목적에 어긋나는 삶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거룩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왜 우리가 그렇게 되는지 네 가지를 보았습니다.

이 우리의 묵상이 여러분들에게 유익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40505(일)오후말씀

 

'주옥같은 말씀들 > 잭 해이, 프랭키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약성경에 나타난 세상의 모형  (0) 2024.12.13
주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0) 2024.05.14
곧 …예수님께 여짜온데  (0) 2024.05.14
부르심과 선택  (0) 2024.05.14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0) 2024.05.14
침례 요한  (0) 2016.12.29
한나의 성별  (0) 2016.08.31
삼손의 어머니  (0) 2016.08.31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