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헤이
마가복음 1장 32-45절
32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 40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42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44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날 마지막 모습을 안식일 날에 회당에서 그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제 그 회당에서 한적한 곳으로 장소를 옮기셨습니다. 회당에서는 더러운 귀신을 다루셨습니다. 한 집에서는 열병을 낫게 했습니다. 이제는 해가 저물었습니다. 베드로의 집을 나와서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려오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 있는 최초로 나오는 저녁 해질 때에 대한 기록입니다. 구약 성경에 해가 저무는 것과 비교되는 신약의 최초로 나오는 대목입니다.
여러분은 창세기 15장에서 저물 때를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15장의 밤은 무섭고 공포스러운 밤이었습니다. 여기는 죄인들이 복을 받는 해질 때 무렵입니다. 이 두 장면은 구약과 신약을 대비하는 중요한 장면입니다. 한쪽은 두려움이 있고 한쪽은 복이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 동일한 유사한 대비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은 저주로 끝납니다. 이제 신약 성경의 마지막은 더 이상 저주가 없다는 것으로 끝납니다. 얼마나 대비가 됩니까?
구약 성경 처음 책은 창세기이고 신약의 처음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창세기 마지막은 어떤 사람이 애굽에서 관 안에 들어가는 기록으로 창세기가 끝납니다. 신약 처음 책인 마태복음은 무덤에서 살아나오는 기록으로 신약성경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비교들은 구약과 신약에 대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해질 무렵에 모든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많이 그랬습니다. 누가는 모든 사람을 고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경우든지 간에 그 필요를 전부 다 충족시키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한 분야만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어떤 영역에도 부족한 데가 없는 분이십니다. 어떤 필요든지 간에 다 충족시키는 부족한 데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 어떤 병이든지 간에 그 필요를 예수님 채우십니다. 어디든지 간에 누가든 예수님이 그 사람들에게 손을 대는 모습을 누가 기록합니다. 또한 거기는 서서 말씀하시고 고치는 것을 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개인에게 필요한 주목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관계에서 개인적인 교재를 누리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들어오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 문을 개인적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구원하는 능력을 주님에게서 발견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든지 간에 다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 마귀를 쫓아낸 것에 핵심을 두고 있습니다. 마테는 말하기를 말씀으로 귀신을 쫓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여러분은 마태복음이 왕의 복음인 것을 기억하십니까? 왕의 말은 어디든지 능력이 있습니다. 왕의 복음인 마태복음은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사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에게 드러나는 강조점들의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1장에는 바쁘신 안식일 날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시고 낫게 하시고 그리고 해가 저물 무렵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겠습니까? 그러나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한 주간의 첫날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것도 아침에 일찍이었습니다. 따라서 모임도 안식 후 첫날에 이른 시간에 떡을 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이든지 간에 일하러 가는 데는 어느 시간이든 관계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제 시간에 갑니다. 그러나 안식 후 첫날에, 직장에 갈 때는 시간을 지키고, 학교 갈 때도 시간을 지켜야 되는데, 첫날 만찬 때는 그냥 누워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왕의 왕 되신 분이 그분이 아침 이른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사야 50:4절은 매일 이른 아침에 아버지를 향해서 귀를 여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른 시간에 아버지와 교재를 나누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일찍 일어나셔서 아버지와 교제하시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의 삶에서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이 바쁜 생활 속에서 하나님 말씀 없이 하루를 시작하십니까? 기도 없이 하루를 허둥지둥 시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생활을 제대로 못할 것입니다. 사탄이 어떤 상황에 여러분을 던져놓으면 여러분은 그 상황을 대처할 수 없을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걸 지켜내야 합니다. 이것은 훈련의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훈련의 삶의 출발은 기도로 출발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어디로 갈 장소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광야로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집에 어느 구석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골방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골방에 가서 문을 닫으시고 여러분의 주의를 산만케 하는 요소들을 차단한 가운데, 우리의 삶 속에 현대적인 생각들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는 장소에서, 우리에게 계속 공격하는 외부적인 요소를 차단해서, 우리의 주의를 집중하면서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어디 멀리 가서 하나님과 관계없는 곳에서 삶을 살게 될 겁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루를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로 시작하십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거기서 기도하십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보고 따라갔습니다.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예수님께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병 낫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을 가르치고 낫게 하는 것과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는 것을 함께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집에서도 동일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바로 앞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섬겼습니다. 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과의 시간을 갖고 사귐의 가치관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두 개는 균형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너무 집중합니다. 어떤 한쪽의 시간을 너무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엘리야 보고 가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곳에서는 다른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떨 때는 가서 숨으라고 말씀하시고, 어떨 때는 가서 왕에게 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두 개가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제자들을 부르실 때 두 가지 이유로 불렀습니다. 첫 번째는 함께 있기를 원하시고, 두 번째는 천국 복음을 전하려고 보내시고, 함께하고 그리고 보내시는 것이 두 개가 동시에 균형을 잡아야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함 없이 지속적으로 섬기게 되면 안정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섬김의 힘이 있으려면 성소에 있는 시간이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베드로가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말한 다음에 예수님이 이런 뜻으로 말씀하는 겁니다. “그 일보다도 아버지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사람들의 영광을 예수님이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인기를 끄는 곳으로 제가 가시기를 말씀드린 게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인기가 있는 마을뿐 아니라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따라서 예수님은 어디 가든지 간에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들이 섬길 때 우리의 마음속에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사람들 눈에 보이려고 일한다고 하시며 길가에서 기도하고, 또한 기도하면서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자랑하듯이 기도하고, 또한 베풀 때는 나팔을 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자신을 베푸니 오라고 나팔을 불었다고 주님께서 지적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하는 뜻은 우리가 얼마나 관대한지 아시오라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들이 금식할 때 모든 사람이 알아보도록 표시를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 눈에 즉 죄인들 눈에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올바른 일을 하면서도 나쁜 동기를 가지고 일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 모두의 그 동기가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4:5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한 것. 모든 것에 관한 시험을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제시한 섬김의 그 동기를 주님이 다 드러내실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일하심에 관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사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십니다. 따라서 다른 마을들로 가장 인기가 없는 마을들일지라도, 복음에 관하는 예수님에게서는 모든 것이 열려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는 아무런 인기가 없는 곳에서 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작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우리가 일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경우는 우리가 일할 다른 데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만약에 비유로 말씀을 드린다면 예수님이 어떤 성으로 섬기러 보냈습니다. 그 성으로부터 사람들이 왔습니다. 그러나 집은 비어 있습니다. 다시 내보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제 사람을 초청하러 보낼 때 처음에 성으로 보냈다가 마지막에는 많은 반응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너희가 산울가로 그쪽으로 바로 가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우리의 충성과 연결돼서 1년이면 그 섬김을 끝내는 지역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성으로 가고 동네로 가고 산울가로 가는 것처럼 주님이 직접 우리의 방향을 지시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복음 전도 집회를 하는데 모임으로 사람들이 안 오면 이 장소를 놓아두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복음관에 사람이 안 오면 바깥으로 나가서 장막을 치고 복음을 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혼들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는 새롭게 일할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영역을 방향을 지시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의 눈을 들어보라. 밭이 휘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지시도 있습니다. 따라서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는 분명히 이른 시간에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전하시고 그 다음에 귀신을 쫓아내시는 원리가 여기도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40절에서는 문둥병자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 문둥병자가 왔습니다. 사람들은 이 문둥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기가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제 삭개오가 주님께 가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삭개오를 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혈류병이 있는 여인은 몰래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바디매오도 군중들이 주님께 집권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군중들이 막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읽을 때 어떤 상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이 군중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점점 다가옵니다. 말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입술을 가리고 말을 했을 것입니다. 저는 군중 사이에 큰 길이 열리면서 예수님께로 이 문둥병자가 접근하는 걸 제가 머릿속에 생각합니다. 간절하게 구하면서 예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경외해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복음 집회에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이야기를 하기를 원하시면 저를 깨끗히 할 수 있나이다라고 예수님께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변화산상에서 내려온 이후에 한 사람과는 말이 다릅니다. 그때 그 아이의 아버지는 말하기를 “무언가 하실 수 있으시면”라는 조건을 붙였는데, 그러나 이 문둥병자의 마음속에는 그런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죄인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는지를 이 사람은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을 여러분이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걸 다시 한 번 생각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칼비니즘에는 이 부분에 대해서 의문표를 붙입니다. 이것은 총체적인 특권이라고 그럴까요? 말하면 이미 총체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은 특권을 받는다는 입장을 생각하면 겉으로는 좋아 보입니다. 사람들이 이 역량으로 말미암아, 이 말 속에는 어떤 개인이 믿을 능력이 있다고 하는 철학적인 사상이 포함돼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믿을 마음을 안 주면 여러분은 못 믿는다고 하는 그런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복음이 열렸다고 하는 말과 상충이 되는 사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어떤 죄인도 천국 가는 데 차별을 받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누구든지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러나 누구나 다 믿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둥병자는 전적인 믿음을 가지고 원하시면 나를 깨끗할 수 있다고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이 원함의 예수님의 신성의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온 우주에 열려 있는, 이 온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널리 알리시는 주님의 뜻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들으시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향해서 회개하고 돌아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경험 속에서 십자가의 피 흘림의 정결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보고 예수님은 긍휼이 여기셨습니다. 이 복음서 전체에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동정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무리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그때는 예수님이 목자로서 무리의 양들을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군중들을 긍휼히 여긴다면, 여러분이 처해 있는 환경을 생각해 보시면서 수백만 사람에게 주님을 전할 수 있다면, 여러분이 그 군중들에게 긍휼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을 부여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충족할 힘이 여러분에게 있겠습니까? 여기는 군중에 대한 긍휼이 아니라 한 개인에 대한 긍휼입니다. 한국 성경에는 “민망히 여기사” 민망이라는 말이 긍휼이라는 말입니다. 이전에는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았습니다. 베드로 장모의 손에 존경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은 손을 잡고 일으키셨습니다. 여기는 손을 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혼이든지 간에 손을 대십니다.
만약에 다른 사람이 손을 대면 그 사람은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운동병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어머니도 이 문둥병자에게 접근하면 가라고 하실 겁니다. 그냥 집에 있어야 될 겁니다. 광야로 갔어야 했을 겁니다. 외롭게 성 외곽에서 혼자 살아야 했을 겁니다. 그 문둥병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외롭게 성 밖에서 살아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손을 내밀어, 그를 낫게 하기 위해서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현장에 가지 않고도 얼마든지 말씀으로 사람을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수로보니게의 여인에게 예수님이 손을 직접 대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가라 나았느니라. 그 또한 종의 백부장의 종도 예수님이 직접 손을 내밀어 대지 않았습니다. 그 백부장은 내 집에 오시는 걸 나는 감당치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말씀만 하셔도 낫게 할 수 있는 분이신데, 멀리 계셔도 낫게 할 수 있는 분이신데, 그러나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냈습니다.
민망이 여겼다는 말은 불쌍이 여겼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삶 속에 많은 짐을 지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가 거기에 가담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손을 대고 관여해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재미있는 표현은 성경에서 문둥병을 낳는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릴 때 문둥병은 죄의 부정을 의미한다고 말씀을 앞 시간에 드렸습니다. 이사야는 우리가 부정하다.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면서 내가 부정하다고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시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니 모든 사람이 부정하다고 그랬습니다. 죄는 모든 것을 더럽게 하고 부정케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하늘에 들어가는 조건을 말할 때 더러운 자는 아무도 성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갈 겁니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피로 깨끗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둠과 어두움의 죄가 여러분을 부정케 했는데 그것은 전부 해결이 됐습니다. 그렇게 “깨끗함을 받으라” 했더니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누가는 의사이기 때문에 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누가는 말하기를 온 문둥병이 몸에 있는 사람에게 이 사람의 병이 이 사람 몸 전체를 더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곧 깨끗해졌습니다. 특별한 경우이지만은 즉각적으로 문둥병이 해결됐습니다.
여러분이 죄인이었던 걸 생각하면 놀랍지 않습니까?
찰스베스그는 이런 말을 썼습니다.
“누구든지 완전히 더러워진 자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완전히 깨끗해진다”
이것은 아주 대비적인 표현인데, 극단적으로 부정한 자가 극단적으로 깨끗해졌다는 대비의 표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가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있다가 해결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원합니다. 죄있는 사람이 용서받은 것은 은혜의 트로피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마약에 중독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제 중독된 가운데 있다가 그 사람을 놀랍게 구원을 받게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는 남에게 자꾸 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그것이 때때로 정말로 지혜로운가 생각을 합니다. 빌립보 간수는 구원받은 이후에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만, 구원받은 간수가 빌립보 전 성의 사람들에게 증거했다고는 기록이 없습니다.
마치 그것처럼 주님은 이 사람에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올까 봐 주님이 그것을 염려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겸손과 예수님의 정중함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가서 전하라고 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달랴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때 여행하실 때 그달랴를 통과하셨습니다.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 집에 가서 하나님이 어떻게 너에게 했는지를 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가라는 말씀을 마가에서 찾은 적 있습니까? 마가복음 5장에서는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로 출발해서, 이 말은 여러분이 첫 번째로 증거할 곳이 어디냐면 여러분의 집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일에 많은 경우는 처음에 집에서 시작하고 출발합니다.
어떤 경우는 하나님이 가정 내에서가 아니고 다른 나라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다른 나라로 보내기 전에 그 사람을 먼저 자기 집에서 일하라고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에서는 내 집으로 가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주변에 있는 마을들로 가서 보고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으로 가서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러 나아가게 될 겁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이 점점 영역이 넓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집, 그리고 성, 그리고 온 세상,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고?” 이사야는 말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어떤 경우는 때때로 가서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삼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고라고 했습니다. 그는 제사장에게로 가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이 사람에게 부정하다고 선언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불쌍하다고 선언한 그 제사장에게로 이 문둥병자 낳은 사람이 가야 했으며, 깨끗하게 되었기 때문에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새 두 마리를 먼저 취해야 합니다. 새 한 마리는 죽여야 하고, 또 살아 있는 산 새는 죽은 새의 피에 묻혀서, 그리고 산새를 하늘로 날려보내야 합니다. 이 새 두 마리는 명백하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 때문에 이 문둥병자가 놓임을 받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깨끗하게 하기를 원해서 먼저 예수님은 죽으셔야 했고 그리고 부활하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았다고 선포될 문둥병자의 오른쪽 귀에 기름과 피를 바르고, 엄지손가락에 기름과 피를 바르고, 그리고 엄지발가락에 기름과 피를 발라야 했습니다. 이 낫게 된 문둥병자가 그 삶을 전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바울의 말 가운데 회개하고 우상으로부터 나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표현이 있듯이, 죽은 우상을 섬기는 종의 생활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쪽으로 변했다는 것을 선언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전체적으로 그 삶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우리들에게 이와 같이 권면합니다. 근본적인 하나님의 은혜는 이와 같이 우리들에게 요구합니다.
“네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
사랑하는 동료 성도님 여러분! 여러분은 이 모범을 따르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생생한 구원받은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용하게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몸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피가 귀에 칠해졌습니다. 피가 칠해진 귀는 하늘의 가르침에 집중하고, 이 자원하는 마음이 하늘을 향해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귀는 하나님의 음성에 열려 있습니까?
손은 어떻습니까? 이 손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 조금 전에 우리는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잡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손을 잡자마자 나아서 그 손은 예수님을 섬기는 손으로 변했습니다. 우리의 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쁜 손입니까?
우리의 발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아름다운 발을 갖고 있으니까 복음을 운반하는 아름다운 발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얼굴보다도 발이 아름답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얼굴을 치장하는 데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굴이 아니라 우리의 발이 아름답기를 원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이사야가 말했습니다. “내가 가겠나이다.”
믿고 나아가는 사람의 발이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찬송하는 걸 들은 적 있을 겁니다.
“내가 가야 할 곳에 주님이 가야 할 곳에
내가 가고 있습니까?
나의 귀와 나의 손과 나의 발이 주님을 섬기는 데
총체적으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로마서 6장에는 말합니다.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따라서 문둥병자였던 이 사람은 모세의 명에 따라 예물을 드리려고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사람은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서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말하기를 예수님 말씀보다도 내가 가서 전하면 사람들이 임팩트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제사장이 낳은 문둥병자가 오면 제사장은 나았다고 선언을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번도 평생에 문둥병이 낫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아니 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걸 살펴서 그러나 예수님은 문둥병을 낳게 했습니다.
여러분은 순종하는 제사장들입니까? 올바르게 제사장 일을 하고 있습니까?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가서 큰소리로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경우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겁니다.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게 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면 그것이 복음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집회의 마지막 중요한 노트를 하나 제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만약 어떤 이유든지 간에 주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그것은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이번 집회의 마지막 중요한 노트로 남기겠습니다.
여러분이 깨끗함을 받은 죄인이었다가 주님께 나아가서 여러분 마음이 순종하는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올바른 태도를 나타내는 사람이 되고, 이 사람은 자기 생각에서는 순수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을 다 듣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하는지 하는 시험이 될 것입니다.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복주시기를 바라며 여러분의 증거의 삶에서 이 말씀들이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4년 5월 6일(월) 오후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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