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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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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1-34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32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우리가 토요일날 마가복음 1장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가운데 참례 요한의 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배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침례 요한은 충성스럽게 실행했습니다.

예수님의 침례와 그리고 광야에서 시험받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과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는 것을 결론적으로 우리가 보았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합하면 다른 각각의 가르침의 다른 측면들이 나옵니다.

한편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헌신된 삶에 관한 교훈의 측면이 나올 수 있고, 또 한 부분에는 가르침의 중요한 요소를 이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리고 성령 침례라고 하는 가르침의 중요한 요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실제적인 실행의 측면을 이 가르침에서 보았습니다. 우리는 야고보, 요한, 베드로, 안드레가 그 부르심에 어떻게 임해야 되는지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도 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행하시는 것을 방금 읽은 말씀에서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날을 기록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삶을 육체로 사신 그 날들을 한 날처럼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단히 놀라운 일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그분이 우리처럼 몸을 가지시고 한 날을 사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또한 요한복음에서 어떻게 표현했는지도 보았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한 날 어떤 일을 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삼일 째라고 하는 말씀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은 영원에 계셨던 분인데 바로 한 날, 한 날, 한 날 사는 사람이 사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영원히 계셨던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나이를 드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살쯤 되던 해라고 하며 영원한 그분이 나이를 드시는 것을 누가는 기록했습니다. 또한 이분이 30세쯤 되실 때라고 하는 나이를 또 기록했습니다. 성육신의 이 비밀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분은 본질적으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이 땅에서 한 날 한 날을 사셨던 몸을 가지셨습니다.

이날은 안식일이었으며 쉬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바쁜 날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쉬는 그날에 주님은 바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밤이 됐는데도 한 사람이 찾아왔기 때문에 밤에도 일을 하셨습니다. 3장에서 밤에 일을 하셨지만 4장에서는 한 낮에 어떤 여인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5장에서는 안식일인데 그분이 베데스다를 방문해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쉼없이 일하셨습니다. 대단히 바쁘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가 도전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모든 날들이 많습니다. 이 쉬는 날에 나는 무엇을 해야 될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쉬는 날에 영원에 관련되는 일을 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영적으로 그다지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런 일들에 시간들을 낭비하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1:21절에 안식일에 예수님이 가버나움을 방문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본 동네라고 알려진 동네였습니다. 나사렛은 그분의 자란 동네라고 말하며 이 양쪽이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으로 가셔서 그 일을 하시는 중심지를 가버나움으로 잡으셨습니다. 여기서도 대단히 위대한 몸을 가지신 분의 신비스러운 삶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분이 하늘과 하늘의 하늘이라도 용납할 수 없는 분이신데 말입니다. 이분이 지질학적으로 지형학적으로 제한된 곳 즉 베들레헴, 나사렛, 가버나움 등에 와 계십니다.

이 회당에서 두 가지를 행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귀신을 내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가르침입니다. 계속 이 내용을 읽어나가면 이 순서로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서도 가르치시고 그리고 사람들을 낫게 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바로 이런 점이 강조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가르치시기를 먼저 하시고 그 다음에 사람들을 낫게 하셨는데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가르침입니다.

이걸 제가 왜 강조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어쩌면 기적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지역에서 기적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은사는 오늘날에 사용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기적이 있다 할지라도 그 강조점은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큰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가르침이 먼저 나오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거듭남에 이 말씀이 어떻게 역사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을 거듭나게 한 것은 기적이 아니고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마지막에 너희가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장부터 나가는 것도 이 순서와 원리를 어기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나오는 삶의 가르침도 1장과 같이 거듭남의 힘이 말씀이기 때문에 삶의 실천의 힘도 말씀으로 진행이 된다고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갓난 아이같이 말씀의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거듭났기 때문에 그 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 가운데 공적인 말씀 가르침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 많으실 겁니다. 공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개인적으로 말씀을 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절대적으로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의 훈련은 매일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는 것을 통해서 가르침을 위한 지속의 바탕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시며라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이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그 교훈에 놀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이 음성을 듣는 사람들 마음속에 놀라움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여러분이 구약의 한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을 읽었을 것입니다. 그 만나를 왜 만나라고 불렀습니까? 만나라는 말은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만나는 그 어떤 것도 닮지 않았으니까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미를 붙인 것입니다. 동일하게 그분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볼 때 감탄을 일으키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교훈의 논란이, 예수님이 하신 일에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놀랍니까?

여러분이 복음서를 읽고 나가면 계속 이런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굉장히 놀라움을 가지고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면서 그들은 놀랬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경이로움을 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 마음속에 커다란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것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타인보다 상하였고”라는 말씀처럼 말이죠.

이 말씀과 동일한 원리로 십자가에 고난받는 모습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이로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그 일에 사람들은 경이로움을 갖습니다. 시편 18절에서는 예수님이 한 일들이 어떤 경이로운지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됐다고 하는 사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하신 것이라고 하는 기록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이로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멸시받던 나사렛에 있던 그분이 하늘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에 얼마나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일입니까?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그 일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일이든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회당에서는 그분이 가르치시는 그 태도가 권세가 있는 태도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무엘에 대해 기록을 봅니다.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더라.” 때로 우리는 말씀을 전할 때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바로 땅에 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계속 사람들 속에 들어가지 않고 말이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말이죠. 사무엘이 말은 한 말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무엘 말 이상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서는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권세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실 때 명백하게 뚜렷하게 조금도 애매하지 않게 말씀을 선언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기록에 기록되었으되 내가 말하노니” 이런 권세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신성의 권세가 이분이 아시는 말씀 모두를 통해서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권세를 가지고 말씀하는 그 모습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경이로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전할 때 태도를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권위 있게 말하려면 그 근거가 말씀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개인적인 견해를 가지고 권세를 나타내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말씀을 전할 때 성경에 근거한 바탕을 가지고 말씀을 전한다면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 회당에서도 예수님은 이와 같이 권세 있는 자세로 말씀을 나타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이들이 마음속에 감동은 안 했더라도 권세 있는 태도를 보고 이들은 놀랬습니다.

여기서 또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 소금으로 함같이 고르게 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일을 나쁜 방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일을 나쁜 태도로 말한다면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말을 해야 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권면을 받고 순종하도록 그 태도를 올바르게 해야 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권세 있는 말에도 놀랬지만 예수님이 드러내는 은혜로운 태도에 이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이날 나사렛 회당에 모인 사람 중에 귀신 들린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할 때 혼자 한 게 아니라 다른 천사들을 경유해서 집단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다는 기록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마귀와 그 사자들이라는 말에서 용과 그와 함께하는 무리들이 있음을 성경은 기록합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같지 않습니다. 마귀는 무소부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서울에 있음과 동시에 동경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동경에 있다면 그 마귀는 뉴욕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무소부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생각하기 바랍니다. 마귀가 동경에 있기 때문에 서울에 없다는 말을 우습게 여기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많은 무리를 거느리기 때문에 자기는 없어도 얼마든지 역량을 가진 존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마귀의 사자를 보내서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어떤 거짓 사도들을 마귀의 일꾼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 마귀와 그 사자들은 대단히 활동적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에서 마귀의 활동을 많이 볼 수 있지만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마귀가 가장 많이 활동한 그 시기와 지역은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이스라엘 지역이었습니다.

이 마귀와 그 사자들은 다른 형태로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3장에는 마귀로 말미암아 어떤 여자가 꼬부라져서 허리를 못 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귀가 어떤 아이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기도, 어떤 경우는 마귀가 말을 못하는 벙어리 귀신이라 불릴 만큼의 영향을 준 적도 있었습니다. 이 마귀와 그 사자들을 더러운 귀신이라고 칭했습니다. “더러운!” 이 세상에 있는 패역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의 활동의 근본은 기본적으로 더러운 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한 새로운 발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새로운 죄를 개발하지 않고 원래 있던 그 대적을 더욱더 격려해서 더욱더 더럽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성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세계의 이런 부도덕한 행위의 근본에는 더러운 귀신으로 불리는 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더러운 귀신은 종교적인 환경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 회당에 있기를 이 더러운 귀신이 좋아했습니다. 여러분 잘못된 가르침이 바로 사단의 활동적인 영역이 되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바울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영에 대해서 말을 했습니다. 마귀의 가르침이라고 바울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 세계에 있는 기독교계를 보게 되면 패역한 가르침을 내는 집단에는 항상 그 배경 속에 더러운 귀신이라고 하는 사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겨자씨를 말씀하시며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무에 새가 깃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공중의 새는 사단의 활동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있는 전 세계 기독교계를 모으면 도움이 됩니다. 그 속에 새들이 깃들인 것처럼 더러운 귀신의 사상에 있는 영역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종교계에 이러한 마귀적인 활동이 깃들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단의 가르침인 마귀와 귀신의 가르침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더러운 귀신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럽게 하려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온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말씀을 파괴하려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마귀는 자기의 결국이 멸망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마귀의 멸망은 그 마귀가 존재가 없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5장에서 말씀하시는 그 가르침의 뜻은 명백합니다.

마귀가 말하기를 “때가 되기 전에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멸한다는 것은 없애는 게 아닙니다. 고통스럽게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마귀는 자기들이 멸할 시기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와 그 사자들이 불못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씀에서 봅니다. 멸한다는 말은 없어지는 게 아니라 그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더라. 이 마귀와 귀신들은 사탄과 함께 영원한 멸망인 불모의 고통을 공유하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면에서 귀신은 자기 자신의 어디에 갈지를 알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정체성을 이 귀신 들린 사람 귀신도 알았습니다. “당신이 누구인 줄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더러운 귀신”, “거룩한 자” 이 둘을 비교해 보십시오. 여기에 엄청난 갭이 있습니다. 여기에 거룩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베들레헴에 오시기 전에 이사야 6장에서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불리는 분이셨습니다. 마리아에게 잉태가 예고될 때 나실 거룩한 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들레헴에 태어날 것을 예고 이후 30년 지난 다음에도 동일하게 귀신이 하는 말이 “거룩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거룩은 그대로입니다. 이제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당할 때, 이제 거룩한 자를 배반한다는 말을 베드로가 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들어간 분을 언급할 때도 거룩한 자라고 언급했습니다. 따라서 거룩한 자는 썩음을 당치 아니한다고 말했습니다. 33년 동안 땅에 몸을 가지고 계실 동안에 어떠한 더러움도 이 거룩을 침범하지 못했습니다. 그 주변에 있는 어떤 죄도 예수님을 오염시키지 못했습니다.

지금 현재는 하늘에서 대제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시고 죄가 없으시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분으로서 이 마귀가 하는 말이 옳다 할지라도 주님은 이 마귀로부터 조금도 방해받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귀신을 꾸짖어서 말씀하시기를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잠잠함은 4장에 나오는 잠잠함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폭풍우가 일어났을 때 잔잔하라 명하신 것과 여기에 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많은 성경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갈릴리의 광풍은 마귀가 일으켰다고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무리들의 우두머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배에서 예수님이 주무시는 것을 마귀는 알았습니다. 숨을 쉬고 계시기 때문에 마귀는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일어나셔서 광풍을 꾸짖으신 것처럼 대적하는 사탄을 꾸짖어서 잠잠케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귀신을 꾸짖으시고 그리고 쫓아내셨습니다. 또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첫째로 그 가르침 교훈에 놀라고, 그분의 권세에 놀라고 또한 권세를 가지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또한 권세를 가지고 더러운 귀신에게 명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소문이 온 갈릴리로 사방으로 퍼졌습니다.

이날의 예수님의 출발은 회당에서였습니다. 이제는 베드로의 집으로 무대를 옮기십니다. 그 집에는 병든 자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본관은 가버나움에 남아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소개할 때 베데스다의 베드로를 소개했습니다. 베데스다와 가버나음은 가까이 있는 동네였습니다 아마 베드로를 살펴보면 베드로는 일 때문에 이 가버나움으로 내 왕에서 연결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자리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산다면 그것도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도 어떤 지역에 한정돼 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더 활동적으로 무대를 넓게 갖는 분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활동하실 때 이를 위해서 그 작은 지역에서 부르신 다음에 다른 지역으로 이르러 보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역으로 복음을 들으러 온다는 것은 대단히 여러분이 복된 것입니다. 복음의 전도를 위해서 자기 태어난 집과 고향을 떠나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제 이렇게 다른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나는 소수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 일을 위해서 어떤 특별한 방법을 가지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 마음을 일으키셔서 어느 지역으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걸 듣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질 때까지는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머무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아는 친지들이 예수님이 머물렀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면서 안 계신 것을 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분명히 예수님이 친척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라난 거기서 있어야 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다른 곳에 있어야 했는데 바로 12살 때 있었던 그것이 바로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처럼 여러분이 친지들과 아는 사람과 함께 이처럼 계속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리고 어떤 경우는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일을 위해서 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실제적인 일 가운데 부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위해서 여러분의 가정과 있는 친지들을 버리고 다른 데로 갈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에 대한 관심 때문에 베드로는 연결돼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 베드로의 장모가 아팠습니다. 열병이었습니다. 여기서 이 열병은 영적인 열병과도 연결이 돼 있습니다. 나중 장에 보면 문둥병이 나옵니다. 문둥병은 죄의 부정함을 나타냅니다. 또한 2장으로 가면 중풍병이 있습니다. 이 죄는 마음은 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 소용없는 사람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에는 우리가 연약할 때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가 힘이 없을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열병이 있습니다. 이것은 삶 가운데 초조해하고 긴장하는 상태의 병이며 고요함이 없고 평안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병을 주님이 다루셨습니다. 저는 이 표현의 말씀을 대단히 좋아하는데 “곧 그의 일로 예수님께 여짜온대” 그 상황이 즉시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곧 이 열병을 낫게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걸 해결하려고 사방팔방으로 우리가 노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해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하고 기도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온갖 것을 다 해보다가 나중에 주님께 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께 가는 겁니다. 문제는 이것저것 해보다가 나중에 주님께 아뢰는 게 아니라 바로 있는 그 문제를 주님께 바로 알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주인이 돼서 그렇게 사방팔방으로 움직이지 말고 말입니다. 예수님께 와가지고 요령을 알려드리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직접 관여하시도록!

주님께 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안수를 한다든지 온갖 행위들을 하면서 해결하려고 사람들이 노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빨리 와달라고 하는 요청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행 가운데서 한 번도 초조하신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 자리에 와야 된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그러지만 예수님은 성경에 보면 멀리 있어도 얼마든지 낫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어떤 자기 자녀가 성경에 나오는데 병이 들었으면 그것을 보통의 방식으로 주님이 해결할 수 있도록 주님께 알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멀리서도 왕의 신하의 부하의 병을 낳게 한 것을 통해서 그 자리에 가지 않고도 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이 왕의 신하 되는 사람은 힘이 있으니까 사람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혹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직접 주님께 기도하지 않고 누군가를 보내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 가서 막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까? 문제가 어쩌고 저쩌고 하고… 더 좋은 것은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현재 주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의 구하는 것에 넘치도록 하실 분으로 분명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획 A는 우리의 모든 계획 B를 능가합니다. 예수님께 다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히스기야처럼! 어느 한 날 히스기야를 초조하게 만드는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초조하게 하는 편지를 받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 편지를 하나님 앞에 주님 앞에 펼쳐놓았다고 말했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그대로 펼쳐놨습니다. 자신의 일로 자기가 하지 않고 주님의 권위를 하도록 그대로 펼쳐놨습니다.

그래서 “곧 그의 일로 예수님께 여짜온데 나아가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것을 나타내는 다른 복음서의 묘사와 차이나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여기에 이 병을 마가는 열병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은 심한 열병이라고 그랬습니다. 누가는 의사였습니다. 누가는 의사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상황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누가가 볼 때는 심한 열병이었습니다. 문둥병자에게서도 그 문둥병이 온몸에 퍼졌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사람의 손도 누가는 그의 오른손이라고 딱 잘라서 말합니다. 의사는 오른쪽 손인지 왼쪽 손인지를 잘 압니다. 그리고 몸 상태를 의사는 정확하게 압니다. 그래서 오른손 마른 자라든가 사람들을 접촉하는 일에 의사인 누가는 민감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시몬의 장로 옆에 섰다고 표현했습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 곁에 서 있듯이, 마가는 이런 의사의 자세보다도 실제로 활동하는 것을 강조하며 손을 잡아 일으켰다고 표현했습니다. 이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요한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영원한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을 사람들이 손을 댔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실제적으로 몸이 닿았던 겁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기댔다고 기록합니다. 어떤 여인은 예수님의 옷 깃단에 손을 댔다고 말했습니다. 이 여인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손을 잡은 것을 기억합니다.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그분의 손이 이렇게 가까이 접근해서 육체적인 접촉을 했던 겁니다.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기에 다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즉시 열병이 떠났다고 다른 설명 없이 성경은 말합니다.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는 이 표현 “곧”이라고 하는 다른 표현입니다.

마가는 곧 떠났다고 말하고, 누가는 금방 일어나서 섬겼다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순간적으로 여인이 나았으며 그리고 바로 활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 받으면 바로 섬긴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구원받으면 예배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구원받으면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는 낫자마자 바로 섬겼습니다. 순간적으로 회복되고 바로 섬겼습니다. 어떤 경우는 섬기는 것에 대해서 어떤 측면으로 성장, 즉 성숙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다 똑같지 않습니다. 내가 벙어리인데 말을 하며 오는 것 이게 다가 아닙니다. 시간 순위에 따라서 다 똑같은 게 아니고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 형편에 맞게끔 섬깁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구원받으면 바로 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개념의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는 바울은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상을 버리고 사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했습니다. 구원받자마자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다메색으로 가던 사울이라는 청년은 빛을 받은 순간에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여러분에게 권해드립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섬기시는데 바쁘시기 바랍니다.

2024년 5월 6일(월) 오전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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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