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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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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헤이

마가복음 1장 1-13절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이번 집회에서 마가복음을 교제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데 마가복음이 격려를 할 것입니다. 또한 이 장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본들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마가복음은 실제적인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마가복음을 쓴 사람에 대해서 잠시 보겠습니다. 이 마가가 소개되는 것은 사도행전 12장에 처음 마가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마가의 어머니는 자기의 집을 개방하고 말씀을 전하는데 집을 쓰도록 허락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는 좋은 가정에서 양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 집은 말씀집회로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일 만한 큰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마가는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택하는데 마가가 쓰임을 받았습니다. 성경 가운데 이렇게 질문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말씀이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물질적인 것이나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가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하나님과 단절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많습니다.

이 마가 요한은 아주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베드로는 마가를 내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아마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통해서 마가가 구원을 받은 듯합니다. 복음 안에서 낳았다고 하는 말씀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영적인 자녀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증거를 통해서 구원받은 여러분의 영적인 자녀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만약에 영적인 자녀를 갖고 있지 않다면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지으시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마가는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듯합니다. 마가의 처음 섬기는 그 장소는 이제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주님을 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마가가 순종하다가 잠시 곁길을 갔지만 골로새 성도들에게 마가를 받아들이라고 골로새서에서 말합니다.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마가를 데려오라. 그가 나에게 유익한 자라”고 바울은 썼습니다. 마가는 주님을 섬기다가 초기에는 실패를 했지만 나중에는 회복이 된 듯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 실패가 마지막이 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실패한 다음에 다시 회복이 돼야 합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에서 10년을 보냈습니다. 이제 다시 10년 후에 돌아와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이 가능했습니다. 메시아를 낳는 사람을 돌보는 일을 나오미가 맡았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복되어서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하나님께로부터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로 말미암아 격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비록 실족했을지라도 회복되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돌보십니다.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실패한 종을 통해서 완전한 종을 섬긴다고 하는 말들을 종종 합니다. 특히 마가 요한에 대한 경우에서 그런 말을 합니다.

 이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네 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왕으로 태어난 자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이 마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왕을 보라”라고 하는 말씀이 있는 이유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을 종의 특성을 가진 분으로 묘사합니다. 언제나 바쁩니다.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급히 이동하십니다. ‘곧’, ‘즉시’라는 말이 마가복음에 많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곧’, ‘즉시’라며 상황이 급변하는 것을 많이 기록합니다. 대단히 바쁜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음식을 먹을 겨를이 없다고 기록한 데가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마가복음을 종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이 특히 이사야서에 “나의 종을 보라” 하는 말씀과 연결돼 있는 복음입니다.

누가복음은 참된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상세한 기록이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는 참된 사람이셨습니다. 사람의 아들로서 즉 인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누가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하는 말이 “이 사람을 보라”라는 말이 누가 복음에 나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의 그 선언이 바로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이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사도 요한은 이사야에 나오는 “네 하나님을 보라” 하는 말씀에 근거해서 요한복음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복음이 예수님의 4가지 측면을 묘사하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묘사하는데 복음서 하나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치 한 제사가 예수님의 측면을 다 설명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레위기에는 제사가 다섯 가지로 선정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네 가지 다른 측면들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그 삶의 향기로움을 한 요소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요소가 한 예수님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 복음서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네 가지 아름다운 측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충분히 설명을 하려면 한 시간으로는 들을 수 없습니다.

 이제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족보, 즉 계보가 없음을 금방 발견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계보가 있습니다. 마태는 그 계보를 왕의 계보로 잡아서 묘사합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으로 묘사합니다. 이 마태복음의 계보는 마태복음 1장에 나와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은 누가복음에도 계보가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계보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출발점인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는 족보, 즉 계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 누가 그 조건을 따지겠습니까? 마가는 예수님이 일하시는 그 장면을 바로 출발점으로 잡았습니다. 또한 요한복음도 계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을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계보도 없고 그리고 창조된 적도 없는 그리스도의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분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아주 단순하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입니다. 마가는 침례 요한의 사역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러 오셨습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가복음이 출발하는 출발선입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일의 시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좋은 복음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취한 순서와 같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할 때 마가복음과 똑같은 순서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출발부터 복음을 시작합니다. 1절에 종이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종이 바로 아들입니다. 말라기에 이러한 동기로 되어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숨기거늘” 이런 표현이 마가복음 말라기에 나와 있습니다. 바로 아들이 숨긴다는 표현이 말라기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이 그러합니다. 1절에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종처럼 섬기는 아들입니다. 여러분은 비유에서 “아들아 가서 일하라”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비유를 여러분이 읽으신 적 있을 겁니다. 여기에 일하러 가기에 바쁜 아들이 등장합니다.

마가는 이사야의 예언을 소개합니다. 이사야서에서의 침례 요한의 특징을 인용해서 말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내 길을 예비하리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어디든지 왕이 가는 그곳에는 왕을 위한 길이 예비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침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의 길을 예비하도록 안내하는 종이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왕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에 관한 근본적인 가르침이 있기 때문에 깊이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섬기기 위해서 일어나셨는데 그런데 이사야가 한 말에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말할 때 그 주가 바로 여호와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에서 여호와라고 하는 그 명칭이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에게 적용이 됐습니다.

이 이사야의 말씀의 사건과 마가복음의 말씀의 사건을 예수님이 신성을 가졌다고 하는 증거의 하나입니다. 여호와는 구약의 명칭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이라는 명칭으로 신성이 언급됐습니다. 다른 성경과 여러 구절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에서는 “내가 왕이신 여호와를 보았다”고 증거했습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말하는 그 왕은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2장에서 요한은 그분이 예수님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사야가 말하는 여호와가 예수님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6장에서 말하는 그 영광은 예수님의 영광이며 예수님에 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8장에서는 이사야가 여호와께서는 넘어지는 자들의 걸림돌이라는 말씀으로 설명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거치는 자의 반석이라고 하는 이사야 8장의 말씀을 인용해서 증거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삼위에 신성이 예수님에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입니다. ‘하나님 아들’이기보다도 ‘하나님 아들’입니다. 여러분은 많은 종교계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현상들을 보십시오. 특히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간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이 가운데서 죽으리라.” 누구든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들은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가복음의 1장에서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회개를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실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새 경륜의 복음을 전할 때 회개하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도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전했습니다. 형제님들! 복음을 전할 때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복음을 전할 때 죄의 실상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를 요구하고 믿음을 갖도록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거절하면 지옥 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을 해야 합니다. 거절하는 자들에게 “망하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타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편 예수님이 못 박힌 것을 전하는데 냉랭한 마음으로 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전할 때도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할 때 못 박힌 것과 십자가에서 내려지신 것과 부활하신 것을 빠뜨리지 말고 다 전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가운데 회개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침례를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 관해서 말한다면은 침례는 구원받은 결과의 현상입니다. 침례는 구원의 필수 요소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명백하게 믿음이 구원의 조건임을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가운데 침례를 받도록 권장합니다.

침례는 결과적이지만 구원과 연결이 됩니다. 바울은 구원받고 금방 침례를 안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렸습니다. 왜 침례받기를 머뭇거리느냐?라고 바울에게 와서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일어나서 침례를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구원받은 지 3일 됐는데…

여러분 가운데 이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 구원받고 아직도 침례를 안 받으신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이 구원받고 3일 정도 지났습니까? 3개월이 지났습니까? 그럼에도 아직도 침례를 안 받았습니까? 아직 3년이나 됐는데도 침례를 안 받으셨습니까? 침례는 구원의 근본이 아니잖아요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물론 당신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순종을 근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를 삼고 침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성경에는 구원받고 나서 침례 안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배신자가 아니면… 왜 마가복음 내에서는 마치 마지막 끝장 부분에 침례가 구원의 조건처럼 기록돼 있는가 하면 구원받은 사람은 마땅히 신뢰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침례 요한이 어떤 옷을 입었는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6절에 보면 약대 털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구약의 신자 가운데 동물의 가죽을 입은 신자들이 종종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그들이 양의 가죽을 쓰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고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옷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종은 과시하는 종이 아니었습니다. 먹는 음식에 관해 요한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메뚜기와 석청, 즉 야생꿀을 먹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아마 밥을 안 먹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기 때문에 그가 귀신 들렸다고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일반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접근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너무나 야생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아마 귀신 들렸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분에게 다가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어떤 옷을 입든 간에 어떤 모양이든지 간에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마가처럼 어떤 경우에서는 자기가 뭔가 하는 것처럼 과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외식적인 행동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어떤 경우는 장례를 치르는데 곡도 하지 않고 잔치하는데 악기를 불면 춤추지 않는다고 잘못된 반응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지적하셨습니다. 장례식과 결혼식 때 처음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장례식 때 장례 흉내를 내지 않고 결혼식 때 기뻐하지 않는 반응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아이들이 순전한 것처럼 어린아이가 되라고 권면하십니다. 또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서 행동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요한은 순진했기 때문에 꾸밈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영적인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그 기준과 그 수준이 여러분 주변 사람들을 압박할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왜곡되고 삐뚤어진 세계에 산다고 말했습니다. 어둠 가운데 여러분들은 빛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바랍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빛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따라서 침례 요한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침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은 어떻습니까? 10절에서 말하기를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 분명히 복음을 전함에 있어 요한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침례 요한이 기적을 행하지 않은 것에 대비해서 예수님은 능력으로 큰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따라서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잠시 멈춰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요한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침례 요한은 그 태중에서 성령이 충만했다고 말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구원받고 나서 종종 따로 성령을 받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이 구원받는 순간에 성령이 내려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믿고 구원받는 순간에 성령으로 또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음과 동시에 여러분은 회개합니다. 성령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성경은 권합니다. 성령 충만하라고, 이 성령 충만하다는 말은 지금 내주하시는 성령 외에 다른 성령을 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신격의 한 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믿을 때 받는 그 인격의 하나님의 위는 믿은 이후에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더 많은 성령을 여러분이 받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말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어떤 경우는 성경에서, 어떤 경우는 성령 충만과 대비해서 화가 많은 것도 충만이라고 말하고, 기쁨이 많은 것도 기쁨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분노로 가득찬 것도 충만으로 말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어떤 사람이 분노로 충만하든지 기쁨으로 충만하든지 충만하다는 말은 어떤 요인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통제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복음 전하신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실 겁니다. 그 나사렛 온 회당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분노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분노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절벽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치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분노한 감정이 그들을 지배한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충만된 그 요소가 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 충만하다는 뜻은 그 사람이 성령으로 통제받고 성령이 그 사람을 인도하고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코 신비로운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계 내에서 성령 충만하면 특별한 일을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은 말하기를 성령 충만하면 이상한 방언을 말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귀신을 쫓아낸다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성령 충만하면 병을 낫게 하는 신비한 능력을 갖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침례 요한은 그 태 중에서부터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기적을 하나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성령 충만한 것이 반드시 기적을 행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성령의 통제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굽혀서 그분의 신들매를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도 잠시 멈춰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신발 끈을 풀까요? 모세를 통해서 예를 들어보면 불붙는 가시덤불 나무 사건에서 보듯이 그 불꽃 가운데서 접근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하시고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발끈을 푼다는 말은 거룩한 곳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수아도 하나님의 보내신 그 사자 앞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신성 앞에서 신발을 벗어야 하고 신발 끈을 풀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서신 그 어떤 땅도 그 땅 자체가 거룩한 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여러분의 어떤 곳에서도 여러분의 신발을 거룩하기 때문에 벗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어떤 또 다른 상황에서 신발을 벗어야 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룻에 대해서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를 구속할 수 있는 다른 친척이 있는 것을 알고 접근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때 신발을 벗겼습니다. 만약에 유업을 물지 않으면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구속을 그 유업을 되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신발을 벗어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되사기 위해서 신발을 벗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발을 벗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그의 신들매를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는 말을 합니다. 또한 침례 요한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두 침례가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침례 요한의 세례요, 하나는 성령 침례입니다. 두 침례 요소에 쓰이는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이고 하나는 성령입니다. 요한은 침례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침례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분은 성령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

이 침례가 언제 일어났습니까?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그로부터 정확하게 열흘 후였습니다. 그때가 오순절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전 세계로부터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아마 다락방에서 일 것입니다. 여러 곳에서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왔습니다. 갑자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습니다. 거기를 잘 보면 “앉은 곳에 충만하더니”라고 기록해 있습니다. 가득하더니 충만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는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마치 침례 받을 때 물에 사람이 잠기듯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령으로 잠기는 묘사가 거기 나와 있습니다. 이 성령 침례는 역사적으로 한 번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것도 오순절 날, 여러분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이런 말씀을 듣습니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라는 기록입니다. 따라서 성령 침례는 성령의 역사로 모인 교회를 형성하는 역사를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성령의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성령 충만도 들었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성령이 우리를 통제하고 주관하는 원리도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결코 성령 침례를 받으라고 권면하지 않습니다.

 성령 침례는 오순절 날 일어난 역사적인 일입니다.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침례에 대해서 마가는 약한 행동을 합니다.

“요단에서 침례를 받으시고”라고 기록합니다. 물에서 나올 때 하늘의 갈라짐을 말했습니다.

하늘이 갈라진다는 말은 굉장히 강력한데 마가는 나중에도 이것을 소개합니다.

동일한 표현이 예수님 십자가에서 못 박혀 달려 돌아가실 때에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표현을 동일한 표현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물체가 버티지만 더 큰 힘이 그 물체를 찌르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동일한 원리로 하늘이 갈라지지 않으려고 버티지만 더 큰 힘이 하늘을 갈라지게 찢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조금 전에 우리가 봤습니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닙니다. 이 목소리는 하늘로부터 나오는 목소리였습니다. 침례받은 분에 대한 언급을 하늘 목소리가 말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제 느낌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아드님을 보시고 너무 기뻐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 아들을 알려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이 폭발한 것입니다.

약 30년 동안에 예수님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자랐습니다. 이 예수님의 생애를 아무도 그 근본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너희 가운데 서신 분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침례 요한은 증거했습니다. 처음에 침례 요한조차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 아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시 눈길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출생에서부터 나사렛의 삶에서부터 목수 생활을 하면서부터 그리고 공생애 바로 직전까지도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이러한 기쁨을 갖다 드릴 수 있습니까? 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을 선사하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이 기쁨을 선사할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우리는 에녹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습니다. 옮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구원 안 받은 분이 계시다면 구원 안 받은 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러나 구원받으면 기쁘게 할 수 있고 또한 믿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언급한 다음에 그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한 말을 생각하시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어찌하든지 기쁘게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왜 바울 당신은 그렇게 하나님께 민감하시오?라고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조만간에 가서 서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를 평가하는 때가 올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십시다.

예수님은 이런 면에서 완벽했습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감사합니다.

 2024년 5월 4일(토) 오전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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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