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 요한
프랭키 차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1:15).
우리는 사람이 태어나는 다섯 가지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아담은 창조되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이브는 아담에게서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부모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는 성육신으로 이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침례 요한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침례 요한은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를 평생 나실인이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의 부모는 요한이 나실인이 되는데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누가복음의 주제를 보겠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필요한 이유는 각각 다른 관점에서 주님에 대해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복음서의 공통된 주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은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마가복음은 온전한 여호와의 종 그리스도 누가복음은 인자되신 그리스도 요한복음은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합니다.
또한 사복음서를 장소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산꼭대기가 나옵니다. 왕 되신 그리스도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산꼭대기는 주제와 적합합니다. 일곱 개의 산꼭대기가 장소로 등장합니다 그 모든 곳에서 주님은 주권을 가지신 왕으로 묘사됩니다.
마가복음은 네 개의 복음서 중 가장 짧습니다. 이 복음서에는 집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다양한 집을 방문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히 3:2)했습니다 그처럼 마가복음은 주님을 여호와의 종으로 묘사합니다. 12번에 걸쳐 다른 집을 보입니다.
요한복음은 장소를 뽑아내긴 조금 어렵습니다 물질적, 지형적 장소가 아닌 상징적 장소를 그리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거하시매”의 원어는 “성막을 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성막의 복음이라고 불립니다.
누가복음에서 다루고 있는 장소는 성전입니다. 침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제사장의 직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났으나 그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복을 내리는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패턴입니다. 결국 어두움 가운데 빛이 비쳐지는 결말로 끝납니다. 사가랴도 결국 찬송을 하게 됩니다. 성전에 있는 벙어리 제사장으로부터 이 복음서는 시작 됩니다 그러나 이 복음서의 끝에서 우리 주님의 부활을 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심을 봅니다. 그에게 경배 드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기쁨으로 축복을 받게 됩니다.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이것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만나든 하나님께는 풀지 못하실 게 없습니다. 우리 구세주는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모두 주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성전의 복음서입니다. 성전은 유대인의 경배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믿지 못하고 다른 길로 갈 때 항상 신실한 소수의 남겨진 자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그 남은 자들을 묘사하는 부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곱 명의 성도가 나옵니다. 요셉과 마리아, 안나와 시몬, 사가랴와 엘리사벳, 침례 요한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을 때 영접하여 기뻐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가난의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안나는 외로움의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육체적인 연약함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외로움과 육체적인 연약함을 가진 성도들을 헤아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으로 결혼 전에 불명예를 얻게 됩니다 사가랴는 실망의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직을 계승할 아들이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불임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했습니다. 침례 요한도 거절당했습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나타나시게 됩니다. 그리 고 그들은 주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실망스러운 나날 가운데서 그러합니다. 우리도 실망의 나날 가운데 계속 주님을 신뢰하고 나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상황을 바꾸실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그들의 상황 가운데로 모셔드렸습니다. 제사장이며 선지자이며 왕이신 주님을 모셔드린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주님 앞에서 달리는 자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제사장의 계보를 말해줍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왕의 계보를 말해줍니다. 시몬과 안나는 선지자로 예언의 말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선지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왕으로서 주님을 환영합니다. 이 인물들을 주님과 함께 연구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 임신하지 못하는 태를 열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처럼 사라가 아이를 임신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삭에게서 우리는 순종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야곱은 일의 사람, 에서는 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라헬로 인해 요셉이 태어납니다. 요셉은 영광스런 자리의 사람입니다. 그는 이집트의 높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성별이 주제인 삼손은 마노아의 아내의 태를 열어 힘의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한나의 태를 열어 사무엘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 기도로 싸우는 용사였습니다. 침례 요한에게는 그리스도를 약속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게 오시지만,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거절할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침례 요한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고 태어납니다.
사가라와 엘리사벳은 하나님께서 주실 아들을 기대했습니다. 아들이 태어나 제사장직을 이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지만, 그들의 기대를 이루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이 되지 않고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선지자와 같은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예비하는 앞서가는 선지자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기대를 넘는 것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흥분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대로 하나님이 주시지 않아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배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에게서 난 자 중 침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없다.” 침례 요한은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보다 더 큰 선지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보다 나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가랴의 실망을 기대로 바꾸셨습니다. 그는 많은 기도 후에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 대답이 온 것입니다. 그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 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13).
“무서워 말라 사가랴여!”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잔잔한 평안입니다. 그는 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그에게 위로와 확신을 준 후 천사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성경의 인물 중 태어나기 전에 이름을 가진 인물은 몇 명일까요? 여덟 명입니다. 이스마엘, 이삭, 솔로몬, 요시야, 마할샬렐하스바스(이사야의 아들), 믿지 않는 자 고레스, 침례 요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침례 요한은 회개를 전해야 합니다. 그는 앞서 달린 자입니다. 남은 자들을 모으고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합니다. 이 일은 회개를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구속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속할 자.” 오랜 시간 기다린 그의 기도의 응답이 주어졌을 때, 그는 믿지 못했습니다.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눅 1:14).
기쁨은 일반적인 의미이나, 즐거움은 특별한 단어입니다. 이것은 기름부음을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기름부음을 받는 기쁨을 여러 차례 노래했습니다. 사가랴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오직 성령을 통해 오는 기쁨만이 영원하고 지속됩니다. 이 기쁨은 아들을 낳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은 침례 요한을 주님 앞에서 예비하여 달리는 자로 향하게 하시는 기쁨입니다.
“므두셀라를 낳은 후 심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에녹이 므 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라”(창 5:22).
에녹은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문제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우리는 힘의 사람 삼손, 기도의 사람 사무엘, 성령의 사람 침례 요한을 보았습니다. 모임에서 주님을 섬기는 힘을 원한다면, 그 힘은 오직 성별로부터 나옵니다. 이 세 명의 나실인은 그의 어머니가 성별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 어머니들의 성별이 나실인의 삶에 아주 중요했습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 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1:15).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우리가 믿을 때 성령이 내주하심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태중에 있는 아이가 어떻게 그 믿음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이 말씀은 그의 어머니가 성령 충만함을 입었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그의 모태에서 성령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이 칭찬은 엘리사벳에게 하는 것입니다.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눅 1:24).
마노아의 아내는 포도나무로부터 난 것은 어떤 것도 먹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어머니에게도 적용됩니다. 어머니가 섭취한 것은 태중 아이에게 들어갑니다. 엘리사벳은 구약 성경을 통해 그가 지켜야 할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었습니다.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홀로 지내는 시간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임 안에서 바쁘게 생활합니다. 하지만 조용히 주님과 홀로 있는 시간을 가벼이 여기면 안 됩니다. 그로부터 엘리사벳은 더 큰 섬김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계시를 받은 후 엘리사벳을 만나게 됩니다. “엘리사뱃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 1:41).
성경에서 성령 충만함을 입은 사람은 9명으로 기록됩니다. 9는 성령님을 상징하는 수입니다. 갈라디아서 5:22절에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브살렐, 그는 성막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4명의 인물이 성령 충만을 입습니다. 스데반이 순교 당하며,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강력한 설교를 할 때 수천 명의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가 성령 충만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입니다.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많은 전도여행을 성령 충만함으로 합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엘리사벳은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마리아를 조언하기 위해서입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자주 방문했을 것입니다. 연로한 성도는 젊은이에세 조언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삶에 여러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문제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지혜를 얻게 되고 그 결과 좋은 조언을 하게 됩니다.
사가라는 묵상을 위해 성령 충만을 입습니다. 68절부터 그의 경배가 나옵니다. 이 말씀은 그의 묵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묵상은 매 순간 신선한 경배를 하나님께 드리게 합니다. 사가랴처럼 영적인 실행을 통해 나옵니다. 엘리사벳은 조언을 위해, 사가리는 묵상을 위해 성령 충만을 입습니다.
침례 요한은 어떤가요? 그가 할 일 을 위해서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그가 취해야 할 태도를 위해서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단지 “소리”라고 합니다. 때때로 설교자!은 자신을 높입니다. 그러나 침례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이 높아지고 나는 낮아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분의 신들메를 매기에 합당치 않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것을 부모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서 배웠을 것입니다.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눅 1:60). “저 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힌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눅 1:63).
여기 사가랴의 변화된 모습이 나옵니다. 세상이 우리 아이를 끌어가게 놔두지 말기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 아이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 부부처럼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놀라운 유산입니다.
우리는 이 어머님들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마노아의 아내로부 터 지혜를 보게 됩니다. 한나로부터 흔들리지 않음을 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을 통해 다른 압력에 굽히지 않음을 봅니다. 삼손의 어머니로부터 남편을 양육에 어떻게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한지 봅니다. 한나로부터 아들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중요한지 봅니다. 그리고 엘리사벳을 통해 어머니의 확신이 그녀의 아들을 기르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봅니다.
이 영적인 원리들이 가족들 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이 모든 원리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적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데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의 복음전도를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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