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헤이
우리는 앞서 구약성경에 나타난 전쟁들이 신자가 영적 대적들과 끊임없이 벌이는 갈등을 묘사해 줌을 살펴보았다. 그 세 대적은 세상과 육신과 사탄이다.
구약성경의 역사에서 이끌어 낸 영적인 교훈은 전부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롬 15:4). 구약성경에 나오는 몇몇 장소가 세상 체제의 여러 측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줌을 이 장에서 짧게나마 살펴보기 원한다.
소돔
우리는 소돔이 비윤리적이고 타락한 세상의 특징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소돔에 찾아온 낯선 두 사람을 보고 그곳의 동성연애자들이 집단 성폭력을 계획할 정도였다(창 19장),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신 메시지에 이하면, 하나님은 소돔의 혐오스러운 태도를 가자 없이 비판하셨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창 18:20). 제임스 스트롱은 “부르짖음”이 비명을 지를 정도의 뜻이라고 해석했다. 소돔 남자들의 잔인한 범죄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이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이다. 만일 집단 성폭력이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소돔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졌던 일이라면, 공포에 질린 비명이 계속해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다.
소돔에 사는 사람이 성안에서 벌어지는 성적인 타락과 그에 동반되는 폭력을 무시할 수 있었다면 소돔에서의 생활은 매우 만족스러웠을 것이다. 주 예수님은 소돔 사람들의 생활이 겉보기에는 정상적이었음을 시사하셨다(눅 17:28).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오늘날로 치면 시내에 해당하는 곳은 활기가 넘쳤다. “사고 팔고.” 농업과 건축업이 활발하게 돌아갔다. “심고 집을 짓더니.” 그러나 이렇게 정상적으로 보이는 생활의 이면에는 비밀리에 행해지는 것이 아닌 대놓고 행해지는 도덕적 타락과 방탕이 있었다. 이러한 죄악을 일반 시민들이 용인할 뿐 아니라 지지했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지역에서 소돔성의 이러한 모습들이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의 서구 사회에서는 한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졌던 합당한 도덕적 기준을 다시 정립하려는 시도가 일고 있다.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위선적인 사람들은 나쁜 행동을 정죄해야 한다는 요구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나중에 그들 자신이 가해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날 텐데도 말이다. 분명한 것은 유명인사들이 어린이 학대나 범죄행위에 대한 뉴스가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보도되는 이야기들은 서구 사회의 건전하지 못한 상태의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뉴스는 사회 전반에 도덕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신자들은 소동이 대표하는 여러 죄악을 허용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신자라 해도 주위에서 일어나는 여러 죄악된 행동에 익숙해져 있으면 그러한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혐오스러운 것인지를 잊을 수 있다. 우리의 도덕적인 잣대가 제대로 작용하는지를 유의해서 살펴야 한다.
애굽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 생활로부터 구속받기 전에 거했던 곳으로, 거듭나기 전 우리를 속박했던 세상 체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준다. 특별히 애굽은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상징한다. 애굽과 관련해서 “죄악의 낙”(히 11:25) 이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모세는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4-25). 이러한 즐거움이 모세에게 “잠시 누리는 낙으로 보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 모두 일시적임을 나타내 준다. 심지어 마음이 강퍅한 죄인이었던 로버트 번즈조차도 세상의 쾌락이 얼마나 금세 시들해지는지를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는 유명한 서사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쾌락은 양귀비 같다네
꽃을 꺾으면 시들고 만다네
강에 떨어지는 눈송이 같다네
잠시 하얗지만 녹아서 영원히 없어진다네
보리얼리스 춤과 같다네
있는 듯싶더니 금세 없어진다네
아름다운 무지개의 형상 같다네
폭풍 가운데 사라진다네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생활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의 하찮은 즐거움으로 인해 그 노예 생활의 짐이 가벼워진 듯한 착각에 빠졌다(민 11:5). 이러한 일시적인 즐거움이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큰 방해가 된다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가!”일락”이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함께 말씀의 씨앗을 결실치 못하게 하는 가시떨기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눅 8:14). 세상의 즐거움이 이토록 해롭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느 신자가 옛적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듯이 “우리가 … 애굽으로 돌아가자”(민 14:4)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을 만족하게 해주셨다고 고백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하시며 …”(시 107:9). 그리스도인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시 36:8)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집회로 모일 때 “그리스도 외에는 만족케 할 수 없으니” 라는 찬송을 부른다. 우리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처럼 흥분과 오락을 찾으러 드나든다면 이러한 고백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성별된다는 진리는 때로는 지리적으로 분리됨을 의미한다. 세상의 즐거움에 대한 성경의 경고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적절하지 않은 장소에 가기를 피할 것이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잠시 내려갔던 경험은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다(창 12:9-20).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창 26:2)라는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받았다. 스포츠 경기장이나 극장에 단 한 번 방문하는 것이 우리를 영적인 타락으로 인도할지 모른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여리고
퇴폐적인 가요 문화나 쉽게 폭력으로 이어지는 스포츠 경기의 치열한 경쟁에 비해 여리고는 세상의 매력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여리고는 “종려의 성읍”(신 34:3)이라고 기록되었다. “…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왕하 2:19). 다시 말해, 환경 자체는 꽤 매력적이었지만 그 토양은 비옥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세련되고, 교양 있고, 단아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 이러한 세상의 측면은 순수한 듯 보이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는 영역이다. 이러한 영역은 신자의 영적인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구주에 대한 이해를 더 진보시켜 주지 못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 간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어두움의 일”은 “열매 없는 일인 것이다(엡 5:11). 여리고로 대변되는 세상의 측면은 신자의 삶을 전혀 풍요롭게 해주지 못한다.
바벨론
바벨론(바벨)은 니므롯과 그의 영토 확대의 야망과 관련하여 성경에 처음 등장한다. 바벨과 관련된 사건들은 니므롯이 천체를 숭배하는 내용의 종교를 만들려고 했음을 보여준다(창 10:8-10; 11:1-9). 바벨론은 우상숭배의 요람이었다. 이는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의 참 백성을 맹렬히 반대하는 사악한 종교 체제를 상징한다(계 17장).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처음에는 유대인들로부터, 그 이후에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았다. 콘스탄틴은 이러한 추세를 뒤집어 기독교를 대중화시켰다. 이때 콘스탄틴은 기독교에 이방종교의 요소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의 의식까지 혼합시켰다. 이제 기독교는 신약성경에서 명하는 원래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종교가 되었다. 교회와 국가 간의 결합은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고, 종교개혁이 이뤄낸 중대한 변화도 이때의 슬픈 유산을 없애지 못했다. 세상종교 가운데 존재하는 바벨론적 체제는 오늘날에도 흥왕한다.
참 신자들은 이런 바벨론적 체제로부터 빠져나와 신약성경에 나타난 원리를 따라 모이는 사람들과 함께 모이기를 기뻐한다. 이들은 신약성경의 원리를 그대로 따르기를 원한다. 이들에게는 종교의식에 필요한 여러 용품이 필요 없다. 이들이 따르는 단순한 형식의 예배는 거듭나지 않은 육신적인 마음에는 아무런 매력이 없다. 이들은 바벨론이 단지 종교의 탈을 쓴 세상의 발현이라는 본질을 정확히 이해한다.
우리의 첫 번째 대적인 세상이 주는 위험에 대해 우리 모두 깨어있자. 세상은 우리를 영적으로 무너뜨리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이 여러 측면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올 때 이를 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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