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1장
로빈 매키온
1장 1~8절
1 솔로몬의 아가라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3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4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6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름 할지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 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8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
요나단은 다윗이 한 어떤 일로 말미암아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그 이김 때문에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한 일로 인해서 다윗을 사랑한 것입니다. 엘라 골짜기에서 골리앗을 이긴 그 승리 때문에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술람미 여인은 이 아가서에서 솔로몬이 한 일 때문에 솔로몬을 사랑했습니다. 또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의 솔로몬 됨을 인하여 솔로몬을 사랑했습니다. 솔로몬이 처해 있는 곳을 또한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을 사랑했습니다. 솔로몬은 왕위(王位)에 있었습니다.. 이 비유적인 그림은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한 일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에서 위대한 승리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것은 곧 바울이 말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됨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가 계신 그곳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늘까지 높아지고 받아들여졌습니다. 또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며 거기에 계셔서 가장 높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리스도 됨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계신 그곳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하신 강력한 일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저는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이는 저에게 모든 것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다윗이 엘라 골짜기에서 골리앗을 이긴 것 같은 승리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이 아가서는 잠언과 전도서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 중요한 부분을 봅시다. 잠언은 특히 어린 사람들을 위해서 기록했습니다.
예를 들어
전도서에서는 솔로몬은 자기의 긴 인생을 뒤돌아 봅니다. 전도서 내에서 “헛되다”는 말을 33번 사용합니다. “해 아래서”라는 말은 29번 사용합니다. 솔로몬은 해 아래서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다고 전했습니다. 전 1장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자보다 지혜를 많이 얻었다고 말합니다. 2장에서는 모든 자보다 부를 더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전 세대보다 더 지혜를 얻고 더 부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헛되다” 솔로몬은 해 아래 있는, 즉 이 땅에 있는 것 모든 것들이 헛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고지인 아가서로 가면, 우리는 청년의 일을 극복하는 것은 잠언이 할 역할이며, 또한 이 세상의 헛된 것을 말하는 것은 전도서가 할 역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가서가 하는 말은 사랑의 아름다움을 아가서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이 책의 제목이 놀랍습니다. 솔로몬의 노래(영어) 우리말은 아가입니다. 솔로몬이라는 이름의 뜻은 평화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화목제와 솔로몬의 이름이 관련이 됩니다. 솔로몬의 통치는 평화로운 화목적인 통치였습니다. 다윗시대는 반역이 있었고 여러가지 폭동이 있었습니다. 저는 솔로몬의 노래라는 이 제목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앞 책인 전도서에서는 헛되고 헛되다라는 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성전의 지성소에 해당하는 부분이 되겠습니다. 지성소라고 말했는데 영어에서는 거룩에 거룩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왕 중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왕들 중에 예수그리스도는 바로 그 왕이었습니다. 앞으로 오는 날에 주님께서는 그 의로 왕 중에 왕으로서 다스리실 것입니다. 또한 계시록에서 말하기를 “만 주의 주”라고 했습니다. 모든 주 위에 뛰어난 주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가서의 원 뜻인 노래 중에 노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노래의 내용을 자세히 봅시다. 이것은 아마 열왕기상 4장과 연관이 될 것입니다. 32절을 보면 우리는 “솔로몬이 잠언 3,000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한 말을 보게 됩니다. 저는 문학의 글들을 읽기를 좋아합니다. 저의 집에 문학의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문학의 책과 같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시입니다. 솔로몬은 노래를 일천 다섯을 지었습니다. 이것은 그 일천 다섯 노래 중에 노래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매우 놀랍습니다. 제가 도서관을 갖기를 원하는데 만약에 일천 네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책이 되겠습니다.
아가서 책 속에는 믿음이라는 말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인데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믿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의 공적을 따진다면 히 11장으로 가야 될 것이지만 아가서는 믿음의 공적을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아가서는 사랑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 책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이 납니다. 이것을 이렇게 연결시켜 보겠습니다. 이 아가서는 머리를 위한 것보다도 가슴을 위한 책입니다. 이 아가서는 설명하는 책이라기보다 감사하는 책입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 말이 누가 한 것인지 조차 찾기가 힘들 때가 있는데 여러분이 읽어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구절 들어가기 전에 또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면을 갖고 있는 책입니다. 이것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관계를 다루는 역사적인 면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세 사람을 다루는 설명자들이 있습니다. 그녀가 어떤 목자의 사랑하는 자라고 해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따르지 않습니다. 저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관계의 일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인 면에서의 관점입니다. 저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상징적인 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여호와간에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이는 면도 있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이해할만한 관점입니다. 또한 이것은 쉽고 명백하게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몸된교회와의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면과 상징적인 면과 그리고 개인적인 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 우리가 접근하고자 하는 관점은 개인적인 입장 이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와 각 개인인 그리스도인들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가서는 5가지 시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6가지 시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한 다음에 사랑하는 자를 그녀가 떠났습니다. 세번째는 떠난 그녀가 사모하는 면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사랑하는 자를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
2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2절에 입맞추기를 원하는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는 자를 말하지 않고서도 누구에 대해서 말하는 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누가 그 대상인지를 알 것입니다. 이 여자에게는 단 한 분만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솔로몬이 될 것입니다. 그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솔로몬에 대한 사랑은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한 분만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바로 그렇게 되어 그리스도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에 그 이름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누구인지 언급하지 않고 영어에서는 그(him)라고만 했는데 우리말에는 없음. 그녀의 마음 속에는 한 분만이 마음에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시 73:25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라고 한 것은 한 분만이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름을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원하는 사랑의 대상은 솔로몬뿐이었습니다. 요 12장에서 마리아는 아주 귀중한 나드 향유를 가져와서 누구에게 부었습니까? 다른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에게 부었습니다.
이것이 실제로 말하는 바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그녀는 내가 그에게 입맞추기를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그녀는 먼저 솔로몬에게 그녀의 사랑을 나타내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솔로몬의 사랑이 술람미 여인에게 적용되기를 먼저 원했습니다. 솔로몬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그녀의 마음을 선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된다고 여러분은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사랑이 먼저 그녀의 마음을 선점했습니다. 바깥에서 여러분에게 사랑이 다가가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사랑을 평가할 것입니다. 이 의미는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한다는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그녀가 그녀의 사랑을 조금도 표현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중에 보면 그녀로 하여금 그가 나로 입맞추게 하라는 설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8장을 보면 각도가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이것을 잘 보면 입을 맞추는 주체가 여자 쪽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솔로몬 쪽에서 입맞추는 것으로 접근해 왔습니다. 그래서 1장에서는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라고 말했습니다.
1:2절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어떤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이것이 바로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그의 사랑이었습니다.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저는 이 표현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종종 언급이 될 때에 무엇 무엇보다 낫다는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포도주가 전 세계에 있습니다. 제가 이전에 세상일을 하고 있었을 때에 제가 속해 있던 조직의 장이 있었는데 저를 선대해서 초청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처음에 말할 때 포도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 미안하다 당신은 술 안먹는 것을 내가 잊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는 포도주가 전부였습니다. 그는 온통 포도주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전 세계에서 어떤 포도주가 제일 좋은 줄 아느냐?’ 저는 포도주가 가진 것이 없기에 그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포도주가 전부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포도주보다 나은 어떤 분을 알고 있습니다. 이 사랑에 우리가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여러분 아시는 대로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가장 좋은 즐거움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낫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2절을 보면 출발은 그의 사랑의 대상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끝날 때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어디 어디에 대해서 보통 말을 하고 그리고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3절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이것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저 그냥 향기름 같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게만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향기름은 아주 향기롭습니다. 그것은 쏟아지는 향기름입니다. 그러면 향기가 풀풀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오게 되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향기를 맡게 될 것입니다. 3절에 보면 그 이름이 이것은 물론 비유이며 쏟은 향기름 같다고 했기 때문에 실제 향기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쏟은 향기름처럼 그 이름이 무언가를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름을 표현하는 하나의 표현 방식입니다.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이름이 우리들에게 모든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못박히신 그 위에 붙인 이름을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의 조소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은 다음에 그의 이름을 써 붙였는데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였습니다. 이것은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사랑합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은 없나니” 그 이름은 쏟은 향기름 같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으로 모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우리는 왜 그 이름으로 모입니까? 그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그 이름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 모임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 외에 어떤 다른 이름으로도 모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름으로 모일 수가 없습니다. 교파의 이름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찬송합니다. 우리는 그 이름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계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여러분 이 사랑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또 다른 사람들이 솔로몬을 사랑하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여기 계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제가 온 아일랜드에 있는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사랑합니다. 이 여인은 솔로몬을 사랑한 유일한 사람이 아닌듯이 보입니다. 요한도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다른말로 하면 요한 이외에도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솔로몬을 사랑하는 것은 좋습니다. 또한 요한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도 선합니다. ‘예수께서 그 사랑하시는 제자가’ 라고 5번이나 요한은 그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4절에서 두 가지 말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이것은 아주 관계가 있습니다. “나를 인도하라” “이끌어 들이시니” 마지막에 “고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4절에서는 “이끌어 들이시니”가 있는데 이것은 사랑입니다. 7절에 “내게 고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말입니다. 이 각각을 생각해 봅시다.
“이끌어 들이시니”가 있는데 이것은 사랑입니다. 그녀는 사랑의 가치를 평가했습니다. 7절에 “내게 고하라”. 우리는 사랑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의 그 말씀을 원합니다. 우리를 이끌어 들이시면 우리는 더욱 더 그분의 말씀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요 1장에서 세례요한이 말하는 것을 두 사도가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와 보라”고 했습니다. 그 말로 주님께로 이끌어 들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와 같이 사랑이 우리를 이끌어지면 거기는 한이 없이 이끌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출발은 단수로 해서 진행은 복수로 되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나를 인도하라’에서 ‘우리가’ 라는 복수로 바뀌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다른 말로 하면 주님께서 이 여인을 이끄니까 다른 사람도 영향을 받아서 이끌려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어떤 날 저녁에 전주남부에서 이런 것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나오미가 어떻게 룻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보았습니다.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이것은 바로 주님 계심에 대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실 때에 우리는 주님이 어떠하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영적인 힘을 주시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면 우리는 달려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더냐? 그래서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히
“왕이” 이 여인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그녀와 관련되는 한 이 분은 왕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만 왕의 왕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그는 그녀를 이끌어 들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간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나”는 단수이며 다른 말로 하면 개인적인 관계임을 말합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는 먼저 깊은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그녀는 사랑하는 자에게로 접근해 갔습니다. 이 침궁은 가까운 자리를 말하는 것이고 또한 친밀을 말하는 자리입니다. 이전에는 이 여인은 멀리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기를 “이전에는 멀리 있던 너희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고 했습니다. 먼데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 이끌어 들였습니다. 여기에 같은 문맥에서 12절을 보면 다시 왕이 나오는데 상에 앉아 있습니다.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하였구나” 그녀와 관련되는 한 사랑하는 자 그의 이름은 향기름 같았습니다. 12절에서는 그녀가 나도 기름의 향기를 토합니다.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놀랍게도 그녀가 왕의 상에 앉아 있습니다. 상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왕의 침궁은 가까움과 친밀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왕의 상은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녀가 침궁에 있을 뿐만 아니라 왕의 상에 있습니다. 또한 왕은 잔칫집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습니다. 이것은 기쁨입니다. 왕의 침궁은 가까움과 친밀함을 나타내고, 왕의 상은 교제를 의미하며, 그의 잔칫집은 완전한 기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빌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게달이라는 뜻은 어둡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의 휘장은 휘황찬란하고 밝다는 것을 말합니다. 솔로몬의 휘장은 아주 깨끗한 세마포로 만들어집니다. 게달의 의미는 어둡다는 뜻인데 행
7절 “내게 고하라” 이 말씀을 4절과 연결 시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를 인도하라’는 사랑이고 ‘내게 고하라’는 나에게 진리를 말해달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의문은 말하는데 누구에게 말합니까?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출발할 때는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출발했습니다. 그 사랑이 포도주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에 대한 사랑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맥이 말하는 바를 주목하기 바랍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자의 말씀을 듣기를 말하는 것을 문맥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큰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큰 증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락방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가르침을 아십니까? “너희가 만일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요” 그녀는 그의 말씀듣기를 원하는 것을 볼 때 그를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내게 고하라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 떼 먹이는 곳과” 그녀는 어떤 장소를 바라보기를 원한 것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미 침궁까지 갔었는데 또한 상에서 교제까지 했는데 그녀는 어떤 장소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너의 양 떼 먹이는 곳’ 이 양떼는 단수입니다. 이 양 떼의 단수가 중요한 것을 잠시 보겠습니다. ‘너의 양떼’ 입니다. 이것은 아주 아름다운 모임에 대한 그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전서 1장에서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로 썼습니다. 후서에서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썼습니다.
7절 후반에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이것은 뭔가 의심을 갖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슬프게도 많은 성도들이 때로 방황하고 헤맬 때가 있습니다. 그의 양떼를 발견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헤매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즉 어떻게 나만 헤매게 되는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복수를 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여기에 양떼가 있습니다(그의 양 떼가 아닌 동무의 양 떼임). 물론 솔로몬의 양떼도 있는데 솔로몬이 친구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양떼가 많은 동네를 제가 알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많은 양 떼 가운데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다른 양떼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매들이 머리에 너울을 안 쓰는 양떼의 무리가 있습니다. 또한 모임에서 여자들이 참예하는 곳도 있습니다. 여기의 양떼는 복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양떼가 또한 있습니다. 여기서 그녀가 찾는 양떼는 바로 그러한 양떼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참된 양떼가 그의 찾는 양떼인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8절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그녀는 사랑하는 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양떼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질문은 어느 정도 책망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알지 못하겠느냐?-영어) 왜 아직 모르느냐? 이런 의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반복 표현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알지 못하느냐?” 마땅히 알아야 되는데 알지 못하느냐?라는 의미로 말이죠. 7절에서 하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랑하는 자가 관심 있는 곳을 또한 알기 원했습니다. 그녀가 그에 대한 사랑을 말했는데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이 여자를 아주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으며 그녀의 진가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충고를 보면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라고 했습니다. 제가 구원받은 바로 직후에 어떤 사랑하는 형제님이 저에게 소책자를 주었습니다. 아주 얇은 소책자였는데 그것을 읽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 제목은 이것입니다. ‘양들의 발자취’였습니다. 그의 양떼입니다. 지역모임의 진리를 기록한 소책자였습니다. 술람미 여인에게 사랑하는 자의 대답을 보면 여기는 명백한 길이기 때문에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앞서서 갔습니다. 여기 진해 모임의 교제 가운데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한국에 있는 모임들이 있습니다. 아일랜드에 모임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150년 더 이전에 이미 모임이 있어왔습니다. 몇 세기 전에 우리보다 먼저 발자취를 남기며 길을 걸어갔습니다.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이 말이 아름답습니다. 그녀에게 어떤 것을 요구했는데 너의 염소새끼를 먹일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염소라는 말은 어떻게 되는 의미인 것입니까? 솔로몬은 어린 자들에게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순전한 젊은 사람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양떼는 단수이고 목자들은 복수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한국에서 전날에 교제를 한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만 교회 장로에 대해서 언제가 교제한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진해에서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에 목자들은 복수이고 양떼는 단수인 것을 보십시오.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하나님은 어린 사람의 과정이 없이 성숙되는 것을 결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문제는 뭔지 저는 모릅니다. 서방 세계에서의 한 문제는 젊은이들이 증가하는 것이 관련되는 문제입니다만 젊은 사람들이 모임을 떠나가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모임에서 젊은이들이 양육을 받지 못하니까 나가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그 마음 속에서 거역하는 마음을 가지고 떠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새끼를 먹일지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목자들의 장막 곁이라 했기 때문에 다른 데서 먹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벧전 5장에서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말한다고 했습니다. 목자들은 양들 가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보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장에 대해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에 대해서 모든 문제들을 그 사랑이 풀어주고 있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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