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버지의 두 아들 그리고 두 아버지의 집
로빈 매키온
오늘 저녁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두 아버지를 말씀 드리고 또한 두 아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 아버지의 집들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눅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요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요
우리는 여기서 두 아들을 봅니다. 탕자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얼마나 먼 나라에 머물렀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는 결국 마지막에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두번째 언급되는 아들을 보면 그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습니다. 이분도 아버지를 따났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서 나갔는데 긴 여행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늘 아버지 집을 생각했습니다. 잠시 이 세상에 계시다가 그리고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아들을 보고자 합니다. 또한 두 아버지의 집들도 보고자 합니다. 특히 두 아들을 대비시켜서 보고자 합니다. 첫번째 여러분이 주목할 것은 탕자는 아버지 집을 떠났는데 먼 나라에 갔습니다. 먼 나라에 갔는데 아버지가 보내어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보내지 않았지만 그는 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한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왔는데 그는 보냄을 받아서 왔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6,7,8장 이 세 장들에서 여러분은 “보냄을 받았노라”는 말씀을 16번 볼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16번이나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다’고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들을 구원하셨는지를 아십니까? 물론 여러분을 지옥에 보내지 않게 하실려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구원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아직도 구원받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은 오늘이 구원받을 날입니다. 만약 여러분은 죄 가운데 돌아가시게 되면 지옥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은 죄 가운데 돌아가시게 되면 여러분은 아버지의 집에 갈 수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보내셨기 때문에 오셨습니다. 예를 들어 갈
제가 질문을 드려 보겠습니다. 두 아들이 왜 아버지의 집에 거했습니까? 첫번째의 탕자의 경우를 보면 그가 아버지 집을 떠난 것은 한가지 이유인데 구절이 아주 명백합니다. 그는 죄를 짓기 위해서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서는 죄를 지을 수가 없어서 죄를 짓기 위해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죄를 짓기 위해 아버지 집으로부터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허랑방탕하게 탕진했습니다. 그는 죄를 짓기 위해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또 한 분은 높은데서 아버지 집을 떠났는데 그분은 왜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까? 그는 죄를 없애기 위해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땅에 오신 우선되는 목적이었습니다. 죄를 없애기 위해서 오신 그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례요한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요
또 하나의 두 아들 간에 대비를 보고자 합니다. 탕자는 그 아버지 집을 떠났는데 그 자신의 뜻을 행하려고 떠났습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자기의 뜻을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게 돌아올 분깃을 아버지께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멀리 떠났습니다. 그 자신에 행함을 위해서 멀리 떠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위에 계신 아버지 집에서 오신 그분은 자신의 뜻을 행하러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
요
이 두 아들 간에 또 하나의 어떤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탕자는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분명히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이 찢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많은 믿는 그리스도인 부부들을 아실 것입니다.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자녀들이 구원받지 않습니다. 오늘까지도 세상 바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국에서 수년 전에 아주 경건한 과부이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한 딸을 키웠는데 나이가 들어 과년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했고 어머니를 떠나 탕녀가 되기 위해 런던으로 갔습니다. 그 자신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그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어머니를 만나려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녀로부터 어머니는 아무런 정보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조차도 어머니는 몰랐습니다. 그녀의 어머니가 매일 한 것이 있는데 그녀의 딸이 떠난 이후에 여러 해 동안 식사 때에 그 딸이 없는데도 그 딸의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 어머니는 그 탕녀가 돌아오기를 원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매일 밤 그 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녀가 대단히 위험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결코 집에 와서 문을 두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방을 잠그지 않고 늘 문을 열어두었습니다. 그 후에 그 탕녀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녀의 방문을 열었습니다. 식탁의 자리가 두 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탁자에 앉아서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에 손을 대었는데 그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돌아가셨는데도 그 어머니는 그녀를 위해서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제가 말씀드린 탕녀가 집으로 돌아왔고 또 탕자가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많은 탕자와 탕녀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의 탕자는 자기가 먼 나라에 있고 자기 손이 비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그 탕녀의 이야기를 얼마 전에 읽었습니다. 그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돌아오는 것이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탕자는 자기 자신이 즐기기 위해서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늘로서 오신 그분은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
이 두 아들에 관한 명백한 대비를 계속 보고 있습니다. 이 탕자는 많은 일들이 탕자의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집을 떠나고자 하는 것을 탕자는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큰 아들은 집에서 아버지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기 전에 돼지를 치라고 말을 했다면 아마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당장 떠났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염려들이 이 탕자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거절하는 모습 중의 하나입니다. 많은 일들이 이 탕자의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상되는 일들이 이 탕자의 마음을 지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높은 곳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떠난 그분은 먼 나라에 와 계시지만 앞으로 다가올 일들 때문에 마음이 점령되지를 않았습니다. 기근이 와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늘로부터 온 높은 곳에서 오신 그분께서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있어도 그 일 때문에 마음이 분유(紛揉)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유월절 만찬 자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주의 만찬을 제정하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을 읽을 것입니다. ‘누가 팔 줄을 아신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을 팔자가 누구인지 또는 이 사건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주님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팔 줄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요
또 하나 두 아들의 차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탕자가 한 일을 보십시오. 그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부자 청년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자기의 삶에 관한 살림을 나누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탕자의 기사를 보게 되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라고 했습니다. 그가 얼마를 가졌는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재산을 다 모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부 잃었습니다. 허랑방탕하여 다 썼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또한 기근이 생기면서 굶주리기 시작했고 탕자는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높은 아버지 집에서 오신 그분께서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습니다. 저는 요
양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그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아무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5장에서 누가는 그물이 찢어지니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고기 잡는 기적의 기사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경우인데 요 21장에 여기도 많은 고기가 잡혔는데 153마리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나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은 잃어버려지지 않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물이 찢어져 고기를 잃었습니다. 핵심은 누가복음의 그물이 찢어졌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물이 짖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5,000명을 먹인 기적을 아실 것입니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복음서에 다 나오는 유일한 기적입니다. 여러분은 떡이 남아 열 두 광주리를 거둔 것을 알 것입니다. 요한만이 왜 남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남은 것을 거두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요한복음은 잃지 않는 복음서입니다. 요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난 후에 그는 가난해졌습니다. 그러나 높은 아버지 집에서 오신 그분께서도 가난해 지셨습니다. 탕자는 가난해졌습니다. 왜냐하면 허랑방탕했기 때문에. 여러분 고후
또 하나 두 아들간에 대비를 보겠습니다. 탕자는 집을 떠나 있을 때 집에 계신 아버지와 어떤 접촉을 가졌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알겠습니까? 저는 명백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하는 말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먼 나라에서 죽었다 잃었다 했기 때문에 결코 접촉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 집에서 오신 그분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와 접촉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
양쪽 다에서 무언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탕자나 하늘로서 오신 그분이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버지께 무언가를 간구한 것을 아십니까? 탕자가 집에 있을 때는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을 말씀드리자면 그가 집에 왔을 때 기도했습니다. 먼 나라에서 탕자가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되겠다. 그러나 그때 먼 나라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집으로 왔습니다. 멀리서 아버지가 보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높은 곳에서 오신 그분께서는 어땠습니까?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요 17장에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4절에 “이 땅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나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다 이루었사오니” 그러나 탕자의 기도는 “내가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하늘로서 오신 아드님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이 땅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나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다 이루었사오니” 우리가 만약 하늘로 가기 전에 기도한다면 어떤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했다고 하늘로 가기 전에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내게 주신 일을 내가 다 이루었다고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하늘로 가기 전에 한 기도를 혹시 기억하십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아버지의 집을 바라보았습니다. 다음에 주목할 것은 이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부끄러움 가운데 돌아왔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예술가들이 탕자가 집으로 돌아온 것을 그린 예술가의 작품이 있는데 너덜거리는 옷을 입고 비참한 모습을 그린 작품이 있었습니다. 몸 전체가 더러워져 있습니다. 탕자가 먼 나라에 산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부끄러운 가운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자기 죄를 고백하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늘로 오신 그분께서 하늘로 가실 때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읽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에서 “하늘로 올리우시니” 다른 말로 하면 하늘이 그분을 정중하게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는 하늘이 받았다고 했습니다. 구름이 가리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보통 비를 내리는 구름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영광스러운 구름이었습니다. 탕자는 부끄러워하는 가운데 집으로 갔습니다. 하늘에 아버지 집에서 오신 그분은 하늘로 가실 때 놀랍게 가셨습니다. 저는 종종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그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승리를 가지시고 히브리서에 따르면 모든 하늘을 통과하여 높이 올라가셨다고 했습니다. 9장에서는 참 하늘에 들어가셨다고 말합니다. 그 본향으로 승리한 가운데 가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영광 가운데서 보셨습니다.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내 우편에 앉으라고 아드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할 때까지” 그 본향에 승리한 가운데 가셨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 미래를 전망하면서, 풍성한 영광 가운데, 영원한 나라로 이 땅에 있는 동안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다가 그 본향에 우리가 승리한 가운데 가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면서, 계속 하늘과 접촉을 갖는 가운데서 말이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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