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들
로빈 매키온
오늘밤은 역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대단히 중요한 말 중에 하나입니다. 역설이라는 것은 두 개념이 명백하게 대립이 되는 모순처럼 보이는 개념입니다. 보통 일반적인 마음으로 보면 이 역설은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이러한 성경에 나오는 역설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그것을 그냥 보게 되면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역설이 되겠습니다. 왜 그렇게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 되는지를 보겠습니다. 물론 역설이지만 저에게는 말이 됩니다. 오늘밤 우리가 보고자 하는 역설은 무언가 어떤 공식을 갖다 주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의 공식을 우리들에게 일러주는 역설이 되겠습니다. 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역설로 들리는고 하면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8절을 주목하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또 동일한 생각 가운데 “너희 생각은”라고 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선언입니다. “내 생각은”라고 했는데 오늘 저녁에 볼 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일러주게 될 것입니다.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분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9절에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내 생각과 너희 생각을 비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에 큰 격차가 있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이것은 비유의 방법입니다. 비유컨대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라고 했습니다. 우리 길과 하나님의 길, 우리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의 차이만 있을 뿐 아니라 이 차이가 너무 어마어마해서 땅과 하늘의 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역설을 이해를 못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것을 말하는 다른 곳을 보겠습니다.
고전
육에 속한 사람이 나옵니다. 이 대목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나오는데 첫째는 육의 사람이 있고 이는 구원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3장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았지만 영적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마
29절이 바로 중심 말씀이 되겠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30절에도 “내 멍에는” 여러분 멍에를 마음속에 생각하십시오. 논밭은 갈 때 소 두마리를 함께 쓰는 도구입니다. 함께 밭을 갈기 위해서 멍에는 중요합니다. 이것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를 가지고 두마리의 목에 걸쳐서 함께 하도록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멍에를 메고”라고 하셨습니다. 29절 마지막에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경건치 않은 자들은 깨달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쉼이 멍에 아래서 발견된다는 역설을 말입니다. 경건치 않은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평안을 원하고 쉬고 싶다. 우리는 이것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모든 멍에를 치워야 쉬겠다고 생각합니다. 요
시 2편은 놀라운 시편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일에 관한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시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님들!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님들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복된 영적인 입장에 들어가게 되면 또한 여러분의 영혼이 쉼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러기를 여러분이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스스로의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배우기를 원한다면 29절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우리는 그에 대해서 무엇을 배웁니까? 롬
육에 속한 사람은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이는 역설입니다. 멍에 아래서 쉼이 발견된다는 것을 이해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임을 압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또한 사람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다른 것처럼 하나님의 길인 것입니다.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얼마나 높은고 하니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높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것도 역설이 아닙니까? 큰 자가 섬긴다고 했습니다. 큰 자가 종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12절 종반에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것은 세상에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에 이런 것들을 세상에서는 보지 못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에서 이런 것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힘듭니다. 저는 이전에 큰 조직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스텝이라 불리는 요원들이 있었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 요원이 되도록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높아지려면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마
여러분이 25절에서 알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는 일을 합니다.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25절을 보면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했습니다. 25절의 사람의 생각인데 26절은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25절은 이 세상의 길입니다. 여기에 믿는 자들 사이에 길이 있습니다. 26절에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이것은 역설입니다. 세상하고는 다른데 세상에서는 큰 자, 즉 위에 있는 집권자들 높은 자들이 섬김을 받습니다. 27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종이라고 언급한 것 중에 두 가지의 용어가 있습니다. 26절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몇 년 전에 제 딸 중에 하나가 책을 하나 사 왔는데 성경공부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책의 제목이 모택동의 이름 중 모라는 이름의 책이었습니다. 700페이지나 되는 아주 두꺼운 책인데 내용이 좀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모택동은 높은 자리로 올라갔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그는 올라가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눌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나니 즉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높아지는 것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벧전
고전
이것을 다루기 전에 겸손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프리카 격언 중에 ‘여러분이 만약 나무에 올라가려 하면 나무 밑 둥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아주 기초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결코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올라가는 것을 알고 올라가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밑에서부터 올라간다는 것을 결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덴 크로포드라는 스코틀랜드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 큰 일을 한 전도자였습니다. 이분이 쓴 책을 보았는데 그는 의사였지만 전도인이었습니다. 책 제목이 ‘검정을 생각하다’는 책이었습니다. 그 제목이 아주 훌륭합니다. 이분이 쓴 내용은 흑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책이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아프리카에 전도를 갈려면 아프리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 책을 썼습니다. 이 큰 분이 쓴 말이 있는데 ‘여러분이 아프리카에 전도를 갈 것 같으면 여러분은 충분히 몸을 낮추어야 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더운 아프리카로 갈 것 같으면 충분하게 몸을 낮추어라’고 이분이 썼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하는 자는 아프리카로 가지 말라는 그런 뜻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높음의 지름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으로 가서 18절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고린도 있는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고린도 사람들의 생각하는 문제점은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이 구절이 하는 의미는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말씀드린대로 역설입니다. 역설은 이렇게 말하는데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웃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려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의미를 파악하셨기를 바랍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생각을 너희 생각과 다르다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하는 말을 다시 보면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부산에서 진리를 보면서 “이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의 모임에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 다음에서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말을 합니다. 이 하는 말의 의미는 명백하게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미련한 자가 되어라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 라는 뜻입니다. 다음 19절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20절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이 세상의 지혜에 대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바를 보기 바랍니다. “헛것으로 아신다”라 하셨습니다. 여기 있는 역설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놀라운 것은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는 미련하게 되어라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 미련하게 된다는 역설입니다. 이 세상에서 미련하게 되는 것은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웃을 것입니다. 어떤 젊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문제냐고 묻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미련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지혜롭게 되는 것인데 예를 하나 들어보면서 어떤 초점을 찾고자 합니다. 저는 럭비 선수였는데 아주 공격적인 선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나중에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원 받은 지 3개월 후에 저는 럭비를 그만 두었습니다. 럭비뿐만 아니라 술집에 가는 등…. 이런 것들을 그만 두었습니다. 럭비 선수 중에 제가 좀 거친 선수였는데 심판이 제 얼굴을 치려고 할 정도로 거친 선수였습니다. 럭비 선수를 그만 두었는데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제가 럭비 선수를 택했다면 제가 여기 있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여기에 있기를 원합니다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지도하던 지도자 그 사람은 럭비에 아주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의 럭비 코치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말하기를 저에게 앞으로 2년 후에 아일랜드의 대표선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도자가 저에게 말한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런 입장에서 저는 아일랜드의 럭비선수가 될 뻔 했습니다. 제가 그만 두었을 때 그 지도자는 매우 화를 내었습니다. 손가락질을 하면서 ‘너는 바보야’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는 성경을 몰랐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쓸 때에
롬
이것을 마음에 두시고
22절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여기에 있는 역설은 무엇입니까? 놀라운 것은 종이 되기 위해서 종이 되었습니다. 종에서 해방되어서 또 다른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역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말이 되지 않는 말이 아닙니까? 이 말씀도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는 말씀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말이 안되는 말이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들이 보는 관점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 세상 측에서 볼 때 미련한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종이 되기 위해서 종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18절에 “죄에게서 해방되어” 그래서 죄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죄의 종으로 우리는 태어났습니다. 18절 마지막을 보면 해방이 되었지만 다시 종이 되었습니다. 여기 종은 노예란 뜻입니다. 놀라운 해방이 되고 자유로워졌는데, 14절에 보니까 더 이상 죄가 주관치 못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종입니다. 이제는 죄가 아니고 의의 종입니다. 의는 죄와 반대가 됩니다. 요일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은 많은 도전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웃에게 어쩌면 여러분의 가족, 직장, 학교, 등에서 여러분이 해야 될 것을 선택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의를 선택하게 될 경우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로부터 해방이 된 이후에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때때로 우리는 선택의 비용을 지불해야 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만일 거짓말 하는 압력에 처해지게 된다면 그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죄로부터 해방이 되어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의를 택해야 합니다.
22절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이 구절 초반에도 죄에서 해방된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저의 생애에서도 해방된 경우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죄를 지었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죄를 짓기는 하지만 계속 짓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6장 초반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로마서에서 10번)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는 죄를 계속 행하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하나님의 종, 즉 노예가 되었습니다. 논리적으로 말하게 되면 하나님의 종이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출
고후
9절 중반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10절 종반에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것도 역설 중에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약할 그때에 강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어떤 편의점에 가서 사람들 앞에 서서 ‘나는 약하기 때문에 강하다’고 말해보십시오. 아마 여러분을 의사에게로 데려갈 것입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내가 약할 때에 곧 강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에 있는 역설은 아주 단순합니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여기서 약하다고 말할 때 바울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이 약한 것과 강한 것을 동시에 말할 수 있었습니까? 바울이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약한 것은 나의 것이고 강한 것은 그리스도의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여기서 뭔가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큰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넉넉하게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
이 일을 구약을 통해서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삼상 17장에 강한 골리앗이 있습니다. 그는 강하고, 크고,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베틀채 같은 창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다윗을 맞으러 나왔습니다. 큰 거인이 칼을 들고 창을 들고 방패를 드는 사람까지 데리고, 그 앞에는 작은 체구의 다윗이 있는데 창도, 칼도, 방패도 없습니다. 또한 가슴에 흉갑도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약함의 표시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 블레셋 사람과 네가 싸우러 갈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보니까 어린 젊은 사람이라 왕까지도 다윗을 눈 아래로 보았습니다. 사울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윗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양은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자와 곰이 다윗이 기르는 양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양들을 구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블레셋 사람을 다윗이 대항하기 나왔습니다.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은 모욕하고 무시했습니다. 명백하게 다윗은 약합니다. 다윗은 막대기와 물매를 가졌습니다. 물매 주머니 안에 돌 다섯개를 가졌습니다. 여러분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실 것입니다. 강력한 거인이 쓰러졌습니다.
북아일랜드의 주일학교에서 교사가 어린아이들에게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돌을 아실 것입니다. 그 돌이 거인의 이마에 박혔습니다. 적은 소녀 아이가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만약에 거인이 피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그 아이가 아주 총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일학교 선생님이 가르친 것은 그 돌을 하나님이 인도했다고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거기서 교훈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다윗은 명백하게 약합니다만 다윗이 말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에서 나를 구했다고 했습니다.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나를 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약한 자의 그림자입니다. 주님 안에서 그는 강했습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받는데 때때로 매우 더딥니다. 이 역설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첫번째는 멍에 아래 있는 쉼의 역설을 기억하십시오.
두번째는 낮아짐이 즉 겸손이 높아진다는 역설을 기억하십시오.
세번째는 지혜롭게 되기 위해서 어리석어지는 역설을 기억하십시오.
네번째는 노예가 종이 되기 위해서 종에서 풀려나는 역설을 기억하십시오.
마지막으로 강해지기 위해서 즉 약해짐으로 강해지는 역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 전체 역설들을 만약에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어떤 처방전 또는 설명서를 가지게 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승리의 비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 복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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