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길리스
요한복음 14:1-3절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3-18절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말씀 집회에서는 여러분들에게 장래에 관해서 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친절하시게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앞으로 장래의 모임에 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하실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일들이 신약 성경에서 차례대로 펼쳐져 있습니다.
첫 번째 장래에 관한 일 중에 맨 먼저 일어날 일은 하나님의 모임, 즉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시는 일로서 그것을 주로 우리는 휴거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님이 우리를 하늘로 들어올리는 일을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 끝이 올 것이며, 그리고 영원까지 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시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적으로 이 사실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언은 세 가지 이유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즉 지적으로 알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도록 하나님이 예언을 설계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지적인 것을 위해서, 두 번째는 마음을 위해서 계획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행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요한일서 3장에서도 앞으로 올 장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말하기를 주님이 오시는 것을 믿는 자들은 그 마음을 깨끗케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시 오시는 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마음이 정결한 가운데 살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세상의 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세계가 분해되어서 없어질 거라고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라고 베드로가 권면했습니다. 그래서 장래에 관한 일은 대단히 실질적이고 실제적인 일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지적인 면을 위한 가르침이 주어집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마음을 낳는데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게 하는 마음을 낳습니다. 이렇게 장래를 생각할 때, 세 번째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이 세 가지를 위한 목적으로 장래일이 계시되었습니다. 요한은 이 계시를 받을 때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이날 아침에는 놀라운 사건인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모임을 위해서 오시는 일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신약의 계시입니다. 휴거에 관한 진리는 구약에서는 발견할 수 없으며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지상으로 오시는데 믿는 자들과 함께 오시는 계시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로 오는데 이 땅에 하나님의 천년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오시는 말씀이 구약에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오시는 휴거는 신약의 계시입니다. 이것은 신약의 비밀입니다. 비밀이라는 말은 알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는 많은 비밀이 있습니다. 성경의 비밀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지고 하나님의 계시로 드러내는 비밀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위해 오시는 예수님의 공중 재림을 요한복음에서 최초로 계시가 시작되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오시는 이 계시는 주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세밀한 것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더 구체적인 것은 나중에 사도 요한과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교회를 위해 오시는 것은 요한에게 계시로 전해주셨지만 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것은 바울에게 계시하셨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다시 오시는 많은 참조 구절들이 바울을 통해서 주어진 말씀 속에 나와 있습니다. 또한 요한도 말했고 베드로도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한과 베드로도 다시 오심을 말했지만 세밀한 구체적인 내용들은 주로 바울을 통해서 특히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많은 다시 오심에 관한 구절들이 들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되 지상에 오시는 것으로 말씀하시면서 교회와 함께 오시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전서는 공중에 오시는 휴거를 말씀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휴거만 말할 뿐 아니라 휴거 이후에 일어난 일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시 오신다는 말을 할 때 헬라어 말에 παρουσία(3952, 파루시아)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를 나타낼 때 실제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으면 이 단어가 쓰일 때마다 세밀하게 구별되는 것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파루시아라는 말은 예수님이 오실 때 어떤 때는 공중에 직접 오시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하늘에서 공중에 나타나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2장에 보게 되면 그리스도의 심판들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도 파루시아를 말할 때 예수님이 그 자리에 임재해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구체적인 하나하나의 장들을 보게 되면 이 단어가 쓰이면서 예수님이 거기에 실제로 계신 것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는 그들의 회개와 구원에 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9-10절에서는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따라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 휴거 다음에 예수님이 오시면 환란과 관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 오실 때 예수님이 이스라엘과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쏟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그 누구도 그 환난을 들어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기 전에 믿는 사람들인 하나님의 교회는 휴거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바울은 5장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9절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는 것은 거짓된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잘못입니다. 교회가 환난을 통과한다는 가르침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 이르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는 죄인들이 회개하는 것과 관련되는 장입니다.
2장은 예수님이 재판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관한 말씀이 주어집니다.
3장은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거룩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장임을 볼 수 있습니다.
4장은 믿는 사람들의 위로를 위해서 예수님이 어떻게 임하시는지를 보이는 파루시아라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5장에서는 예수님의 빛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이 위로를 받는 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그 아들의 빛의 위로를 받겠습니까? 교회에 속한 모든 믿는 자들이 빛의 자녀들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곧 멸망할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9절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구원받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쏟을 진노에 들어가게 하심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주로 4장이 말하는 예수님의 공중에 오시는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휴거에 관한 더 세밀하고 구체적인 정의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휴거를 말하기 위해서 교회의 정의를 먼저 말해야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사도행전 2장부터 예수님이 공중에 오시는 그 시점까지 구원받은 모든 사람을 일컬어 단수(單數)로 교회라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보편적인 교회라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는 모두 믿는 사람들만 있는 모임을 말합니다. 보편적인 교회라고 말할 때 주의할 점은 입술로만 고백한 진짜 믿는 사람이 아닌 사람은 몸인 교회에 속하지 않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교회라는 단어는 방금 말씀드린 대로 정말로 믿은 사람들만으로 구성된 모임을 말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지역 교회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 의미는 몸인 교회 전체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과 관련된 내용으로 오늘 아침에는 네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모임의 문제입니다. 이 모임에 바울은 두 가지 약속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이 공중에 오시는 것을 데살로니가 모임에 가르쳤습니다. 마지막 절에 있는 것처럼 서로 위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따라서 이 데살로니가 모임에는 문제를 갖고 있었는데 그 문제를 생각하고 약속과 앞으로 올 사건을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듣고 모임에서 실제적으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모임에 일어난 문제들을 먼저 하나씩 보겠습니다. 이미 믿고 죽은 사람들에 관한 문제를 데살로니가 모임이 안고 있었습니다. 바로 13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믿고 나서 세상을 떠난 성도들에 대해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될지 알지를 못하는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과 함께 있을 때 장래 일을 이미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이 지상에 천년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두 번째 오실 것도 이미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지상에 오실 때 교회와 함께 지상으로 오신다는 것도 바울은 이미 가르쳤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에서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서도 영광으로 온다는 말씀을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휴거를 가르쳤습니다. 오시는 순간에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다시 지상으로 오는 것도 가르쳤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 믿고 죽은 사람과 믿는 사람이 죽는다면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의심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가르친 가르침을 이 사람들이 이미 마음에 두었다면 알았을 텐데 말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못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죽은 성도들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는 사람의 죽음에 관한 놀라운 것을 보고자 합니다. 이것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자는 자들이라고 말한 아름다운 표현만 몸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영은 잠자지 않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떠날 때 몸이 자는 것입니다. 영은 곧바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갑니다. 바울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원했다고 말했습니다. 영이 잔다는 것은 교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영은 잠자지 않습니다. 내 몸이 죽을 때 내 눈은 감기지만 나의 영은 곧 그 순간에 눈을 뜨고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그때 분명하게, 확실하게 내가 어디 있는지를 압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과 함께 본향에 가는 것을 간절히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잠자는 자들이라고 말할 때는 믿는 성도의 몸이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영원히 죽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잔다는 말은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여러분이 지난밤에 주무실 때 잠시 주무셨습니다. 잔다는 것은 다음 날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 할 때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을 말합니다. 그래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믿는 사랑하는 성도가 세상을 떠날 때 슬퍼하는 것은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입니다. 만약에 슬퍼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 없는 자처럼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놀라운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공중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믿지 않는 자와 같은 슬픔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느낍니다. 72년 전에 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8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슬펐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소망 없는 자처럼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바울은 두 가지 약속을 가르쳤습니다. 14절에 소망에 관한 약속을 바울은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데, 이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는 약속으로 위로했습니다.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온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땅으로 다시 오실 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주님과 함께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이 계시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는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15절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 살아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는 이유를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약속은 “살아남아 있는 자가 죽은 자보다 앞서지 못하리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의 근본적인 가르침의 소망의 가르침이었습니다. 14절에서 바울은 분명히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 우리의 소망의 근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는 사람들의 부활에 관한 보증입니다. 이것은 심판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보증이기도 합니다.
5:9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하게 우리의 죄 용서에 관한 보증일 뿐 아니라, 그리고 이 땅을 심판하는 심판 오시기 전에 공중으로 휴거된다는 확실한 보장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에 관한 그 확실한 보증은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혹시 예수님이 공중에 오시는 순간에 어떤 분들은 영적으로 좋지 않은 상태에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휴거는 우리의 상태와 관계가 없습니다. 5장에 나오는 것과 4장에 나오는 것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4장에 잔다는 말은 몸이 자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부분, 5장에 잔다는 말은 영적으로 약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자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인 현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공중에 오실 소망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영적으로 자는 성도들은, 이 세상 일과 이 세상 물질에 잡혀 사는 영적으로 자는 상태는 슬픕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실 것을 준비하고 있는 상태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예수님이 공중 오실 때 이 땅에 휴거 되지 못하고 남겨질까요? 그러나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잠자든 약하든 강하든 상관없이 예수님이 공중 오실 때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은 휴거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일에 관한 보장이 방금 말씀드린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공중에 오실 때 휴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자들과 함께 휴거 된다는 것을 어떻게 해야 확실히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4:14절에서 분명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데”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증거입니다. 이 두 가지 약속을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제공했습니다.
첫 번째는 데리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보다 살아있는 자가 앞서지 못한다는 약속입니다.
여러분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이 서신을 읽고 올바르게 반응을 했을까요? 누가 함께 오고 누가 남을 것인가? 혹시 사람들이 생각을 이리저리 했을까요? 서로 몰라서 의문을 가졌을 때 바울은 이 서신을 통해서 분명히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말했습니다. 16-17절도 마찬가지로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앞으로 일어날지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는 친히 주님께서라고 말씀하시는데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직접(친히) 오시네.” 이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혼자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오실 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오십니다. 그리고 지상으로 오실 때는 영광을 입은 교회를 데리고 오십니다. 그리고 힘 있는 천사들을 대동한다고 말합니다. 수많은 하늘에 군대를 동원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상이 아니고 신부인 몸인 교회를 데리러 올 때는 혼자 오십니다. 따라서 바울은 “주께서 (중간에 빼고) 친히 하늘로 좇아”라고 하신 말씀의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대동하지 않고 친히 오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하늘의 보좌에서 공중으로 오시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이건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공중으로 온다는 게 왜 중요한고 하면, 공중은 지금 현재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사탄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싸움은 하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혈과 육으로 싸워서는 안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실제로 혈과 육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적은 눈에 보이는 대적이 아닙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어두움에 속한 자들에 관한 싸움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따라서 공중은 사탄이 지금 지배하고 있는 영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사탄은 이 땅에 존재하기보다도 공중에 존재합니다. 계시록 12장에 따르면 이 공중에 있던 사단이 땅으로 내어 쫓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화가 있을진저”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마귀가 화를 가지고 땅에 내려갔기 때문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셋째, 하늘에서 마귀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귀는 공중 영역을 정했습니다. 그 영역에 주님이 공중으로 오십니다.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호령과 함께”라고 했습니다. 이 호령이란 말은 군대 용어입니다. 이것은 사령관이 명령을 내리는 군대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라고 했습니다. 마치 천사장의 소리입니다. 왜 천사장이 이 소리를 말해야 됩니까? 천사장은 한 사람이 언급되는 것을 성경에서 알 수 있습니다. 미가엘이며 전쟁을 담당하는 천사입니다. 이 미가엘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공중에 오실 때 호령과 한사장의 소리로 오시는 이유는 이 공중을 사탄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탄을 예수님이 제압하십니다. 공중에 권세 잡은 사탄은 예수님이 모인 교회를 공중으로 들어올릴 때 아무런 방해를 할 수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무덤에 있을 때와 같이 무덤에 계셔도 예수님을 아무런 제약을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중으로 예수님이 오실 때 사탄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 호령은 사령관의 호령입니다. 이 강력한 힘을 가진 사령관의 명령입니다. 이 사탄은 이 명령을 듣고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동시에 이 호령은 무덤에 있는 모든 자들이 듣는 호령일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팔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왜 바울이 하나님의 나팔이라고 말했을까요? 우리는 구약에서 은나팔을 봅니다. 이 나팔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팔 가운데 일부의 나팔은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데 사용됩니다. 예수님이 호령을 하실 때 사탄의 힘을 무력화시킬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믿는 사람들을 모으는데 이 호령이 기능을 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는 말과 주의 호령과 연결을 시켰습니다.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라는 말도 호령과 바울은 연결시켰습니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말했습니다.
이때 믿는 사람들의 몸이 어떻게 변하는지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설명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는 주로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에 관한 것을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서 15장에 가게 되면 거기는 주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표현이었습니다. 이 몸으로는,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즉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은 이미 썩어 있지 않습니까? 이 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해야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우리처럼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이 지금 이 순간에 공중에 오시면 우리의 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어느 순간에도 오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서 오시는 일 이전에 있어야 되는 사건은 성경에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구약 가운데 예언들을 예수님이 교회와 함께 오는 것을 예언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공중에 오시는 그 예언 사이에 어떤 예언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가치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말씀 집회 중에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러한 모임이 곧바로 예수님 앞에서 그대로 모임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때 예수님이 공중에 오시는 순간에 살아있는 우리들의 몸을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존재로 말입니다. 살아있는 현재 우리의 상태는 죽을 몸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굴복하는 몸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실 때는 우리는 죽음에 굴복하는 몸이 아닌 몸으로 변합니다. 따라서 “이 죽을 몸이 불가불 죽지 않을 몸을 입어야” 합니다. 그 몸이 어떻게 변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은 분명히 요한일서 3장에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또 말하기를 “순식간에 홀연히”라고 말했습니다. 변화하는 시간을 말했습니다. 바울은 “순식간에 홀연히”라고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정말로 찰나의 순간을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말하기를 전자나 원자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순식이라는 말은 눈을 한 번 깜박거리는 시간입니다. 눈을 반쯤만 깜박거리는 시간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 앞에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몸이 그 순간에 변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해서 예수님과 함께 올라가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거기에서 있을 그 모임은 얼마나 놀라운 모임이 되겠습니까? 수만 수천의 믿는 자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도행전 2장의 모임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마지막 모임까지 이 교회 시대 마지막 구원받은 사람까지 포함했습니다. 교회 시대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들려 올라가는 그 일 말입니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헤어짐이 없습니다. “함께”입니다. 그래서 함께하는 것을 생각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는 함께 하는데 지금 현재는 함께하지 못하는 분열이 있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믿는 자들이 넘어지는 것은 슬픈일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서로 비난하는 것도 슬픕니다. 그때는 공중에서는 더 이상 이와 같은 분열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와 같이 실제적인 말로 이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하기를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라고 바울이 말씀의 가르침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항상 서로 위로할 뿐 아니라 서로 격려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높이기를 바랍니다. 서로 떠받쳐 주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으로 주님이 복 주시기 바랍니다.
2025년 5월 3일 강서 특별집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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