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길리스
디모데후서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예수님이 공중에 오신 이후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인가를 말해주는 구절입니다.
그 상황은 그리스도의 심판대가 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각각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난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어떻게 섬겼는지에 대한 평가, 무슨 동기로 승리했는지에 대한 평가, 그리고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한 평가가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몸을 가지고 행한 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에 대한 평가 말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심판들의 목적이 무엇인가도 보았습니다. 상급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경우는 그 상급을 잃을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우리에 대한 상급을 주실 것을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신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상급에 대한 성경의 용어는 면류관이라는 단어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면류관은 왕이 쓰는 왕관이 아닙니다. 헬라어로 στέφανος(4735, 스테파노스)라는 단어는 왕이 쓰는 왕관이 아니라 경기장에서 이긴 사람에게 주는 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스는 그리스의 원래 말은 둥근 머리에 올리는 어떤 장치를 말합니다.
현대 올림픽에서는 승리자에게 메달을 수여합니다. 이 당시에 경기에서 이기는 그 사람을 향해서는 바로 스테파노스라고 하는 이와 같은 둥근 관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이 물건의 상징하는 바는 이긴 자에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면류관을 믿음으로 이긴 사람에게 주신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5가지 면류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의의 면류관이 있고, 생명의 면류관이 있으며, 베드로전서 5:4절에서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9절에서는 기쁨의 면류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썩지 않는 면류관이 있다는 것이 고린도전서 9장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전체를 합치면 5가지 면류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기쁨의 면류관, 썩지 않는 면류관.
의의 면류관
첫 번째로 의의 면류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바울이 쓴 마지막 서신서에서 이 용어가 나왔습니다. 디모데를 격려하기 위해서 디모데후서를 썼습니다. 바울의 일생이 끝나간다는 것을 직감하고 썼습니다. 바울이 떠난 이후에 디모데는 바울을 이어서 계속 주님의 일을 해 나가야 했습니다. 6절을 보면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제 곧 로마 황제 네로 앞에 서야 할 시기가 왔습니다. 그가 처형을 당해서 목이 잘릴 것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디모데에게 바울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생활을 권면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바울이 처음 주님을 만난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습니다. 4~50년 지난 이후에 그의 삶이 마감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기에 비유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그랬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다는 말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뜻으로 바울은 말했습니다. 물론 그 삶에는 고통이 있었고 어려움이 있었지만 자기의 삶이 선한 싸움이기 때문에 최고의 삶이었다고 표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쳤기 때문에 달려가기를 잘 했다고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경기의 여러 종류가 있음을 경기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100m 단거리 경기가 있고 길게 달리는 마라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거리 경기가 단거리 경주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기에 비유하면 마라톤 같은 멀리까지 가야 되는 경기입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가야 되는 경기입니다. 인내가 필요한 경기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와 같다고 묘사하는 이유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그런 동일한 표현이 사용됩니다. 우리를 둘러싼 구름같이 둘러싼 많은 증인이 있다고 바울이 히브리서 12:1절에서 말합니다. 우리를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벗어버리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앞에 있는 경주를 경주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믿음의 완성자인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이 경기를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격려를 받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가야 되는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달려가기를 권장하고, 우리 앞으로 우리 앞에 예수님이 모본으로 달려갔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참았습니다. 지금에는 하나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오늘날 이 경기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그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달려가기를 원했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모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완전한 삶을 사셨습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를 모태에서 나를 택했다고 시편 22편에서 다윗이 예언한 대로입니다. 내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시편 22편에서는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릴 적부터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몸을 갖고 생활하실 때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도 완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의지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완전한 사람이시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을, 하나님을 완전히 의지하는 가운데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한 모든 시험에서 이와 같이 완전한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행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참고 견뎌야 했습니다. 절대로 정신줄을 놓아서는 안 되고 실망해서는 안 되는 삶, 계속해서 믿음의 걸음을 걸어 나갔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십자가를 참아내셨습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했습니다. 지금 현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가는 겁니다.
7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고 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인 그 코스를 마쳤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 결승선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는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끝까지 결승점까지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에 결승선을 올바르게 통과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상급을 받지 못할 겁니다. 바울은 이것을 견디어 냈습니다. 많은 것들을 참아냈습니다. 마지막까지 계속 진행했습니다. 경기에서 다섯 사람이 출발하지만 결승점에 도달하는 첫 번째 사람은 한 사람입니다. 그런 가운데 바울은 파선해서 여러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끊임없이 믿지 않는 유대인으로부터 핍박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꿋꿋하게 계속 참아내면서 진행했습니다. 따라서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올림픽 게임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경기자들은 반드시 그 규칙을 지키면서 경기를 해야 합니다. 만약에 그 규칙을 안 지키면 그 경기자는 실격을 당합니다. 믿음을 지켰다는 이 바울의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지켰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라는 말은 믿을 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말합니다. 믿음은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실체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는 표현으로도 바울이 증거했습니다. 그 경기의 규칙을 모두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갖고 있는 책임입니다. 경기 끝날 때 상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규칙을 준수해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믿음의 규칙을 안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거절하고 바울을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슬프게도 주님께로부터 받게 될 상급을 잃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후로는 나를 구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에 사도 바울은 불의한 황제인 네로 앞에 설 것입니다. 네로 황제는 불의하게 사도 바울을 정죄했습니다. 어느 한 날 바울은 말한 대로 의로운 재판장 앞에 설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재판장이고 의롭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도 바울은 불의한 재판관 앞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이 의롭게 판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특별한 면류관인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은 의롭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순간에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여러분 모두는 의롭게 되었습니다. 신분적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은 의롭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삶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내가 의롭게 살았다는 것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신분적으로 의로울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의로운 재판관 앞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는다고 말을 했습니다. 덧붙여서 바울이 말하기를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말이죠.
우리가 의로운 분을 기다린다면 나의 삶이 의로워질 것입니다. 나타날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시선을 잃는 순간에 그 사람은 그만 나락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 의의 면류관을 모든 사람에게 주실 것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의롭게 산다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실 것을 계속 기다리며,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것처럼 그리스도를 바라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같이 의롭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
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2:2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10일 동안 환란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우리는 여기에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표현을 봅니다. 이 면류관은 환란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삶을 견뎌낸 사람들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야고보서 1:12절에서 분명히 나와 있듯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이니라.” 야고보는 시험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 인도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만일 시험을 만나거든, 내가 시험을 만나거든 만날 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만약이 아니라 만날 때도 아닙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모든 믿는 사람들은 반드시 시험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반드시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시록 2장에서는 믿음의 시험이 있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멀지 않은 북쪽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핍박을 받는 조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성경을 가지지 못하는 나라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성경을 소지하기만 해도 사형을 당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북한에 있고 믿는 자라는 것이 드러나면 감옥으로 갈 겁니다. 북한에 있는 믿는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서울에 있는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시험입니다. 아마 여러분이 직장에서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시험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나 대학에서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받는 시험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족 가운데서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가족에서 형제들이 형제 자매가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있고 나의 의붓 어머니가 있고 만약에 그걸 생각할 때 올바르게 생각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환경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여러분 가족 가운데서도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구원받기 전에 결혼했는데 남편이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 형제들 가운데는 안 믿는 부인을 두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결혼 가운데서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따라서 각각 다른 환경이지만 각각 다른 시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경제적인 시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건강 때문에 시험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각각 다른 형태로 시험을 통과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왜 이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참고 있는가를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시험은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는데 이 시험이 그 사람을 인내를 키우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12절에서는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이것에 옳다 인정하였음을 받은 후에라는 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인정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인정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참는다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인정을 받을 겁니다. 이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겁니다.
모든 믿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소유했습니다. 이미 영생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생을 취하라.” 디모데는 이미 영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영생을 누리라고 권면합니다. 이 영생은 삶의 질입니다. 영생을 취한다는 말은 삶의 질을 영생과 연결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6:17절에서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고 말했습니다.
18절에서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말합니다.
19절에서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이 영생의 질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에 이 땅에 있는 물질을 가지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쓴다면 이 영생을 취하며 질을 가지고 사는 삶이 아닙니다. 만약에 선한 일의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다면 그 영생에 맞는 질의 삶을 사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참된 생명을 사는 생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영생을 이미 갖고 있지만 영생을 취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강조드리지만 모든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이미 가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믿는 사람이 이 영생의 질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영생에 걸맞은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따르면 생명의 면류관은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은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미 컵에 가득 찼습니다. 어떤 사람들보다 어떤 사람은 더 큰 컵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큰 컵을 가진 것처럼 영생을 더욱 많이 누린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다른 면류관으로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영광의 면류관
베드로전서 5:1-5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4절에서 베드로는 영광의 면류관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 영광의 면류관은 모임의 장로들, 즉 감독들에게 주는 면류관입니다.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어필을 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말하기를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의 참여할 자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감독들, 즉 장로들을 격려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일을 계속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장로라는 말은 영적인 성숙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는 “갓 입교한 자도 말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장로라는 말은 성숙함을 말하는 것임을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성숙이 아니라 영적인 성숙을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장로의 일을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이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라고 먼저 말했습니다. 장로의 일은 이중인데, 양무리를 치고 그 양들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양들을 친다는 말은 양들을 돌본다는 뜻입니다. 망을 본다는 뜻입니다. 이 일을 임할 때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자원함으로 하라고 그랬습니다. 아무도 안 하니까 내가 해야 되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실행할 의지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 장로를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선한 일을 사모하는 자라야 한다고 바울은 조건을 말했습니다. 이 선한 일을 사모한다는 말은 자기가 자원해서 사모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앞서서 자원해서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자고 하는 사람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열심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득이함이 아닌 자원하는 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기가 올발라야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러운 일을 탐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에서는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잘 다스리는 자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말했습니다. 왜 배나 존경하라고 바울이 말했을까요? 왜냐하면 양들을 돌보는 것과 장로 일은 너무너무 힘든 일임을 바울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을 돌보면서 더러운 이를 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잘 다스리는 장로를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는 말은 이 장로들은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도우라는 뜻입니다. 존경하라는 말 속에는 월급을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장로를 인도함을 따라 도우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그 동기가 순수해야 된다는 말은 베드로가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라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 동기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3절에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장로는 반드시 모본이 돼야 합니다. 양들이 목자를 따라가듯이 그 목자가 본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들은 다른 성도들이 따라갈 만한 모범 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장로들은 앞으로 상급을 받을 것을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4절에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는 것을 베드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영광의 면류관을 어디에서 받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수여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날 때 이 면류관이 수여될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심판대는 하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지상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보지만 하늘에서는 못 보지 않겠습니까?
기쁨의 면류관
데살로니가전서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에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를 생각하고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모든 데살로니가 믿는 사람들이 서 있을 때, 그 데살로니가 모임에 성도가 모두 있는 것을 볼 때 바울은 기뻐할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 앞에 드러나는 것을 바울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이 면류관은 혼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사람들에게 주는 면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도 안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그 일에 대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결과를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가게 되면 그때 못 봤던 결과를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씨를 뿌리고도 그 결과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지만,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을 그때 가서 볼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연결고리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씨를 뿌리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자라게 돕는 사람이 있고 나중에 그것을 추수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를 위해서 증인의 삶을 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말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리스도를 증거한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구원에 대해서 책임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복음이 퍼져나가는데 수고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이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전도지를 주는 것도 이게 포함되겠습니다. 많은 혼들이 전도지를 받고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어느 스코틀랜드 어느 마을에 1년 전에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며칠 지난 다음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떤 여인이 전도지를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 아내하고 함께 그 여인을 방문했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전도지를 받고 읽고 예수님을 이미 믿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제 전도지를 뿌리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한국에는 어떤지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전도지를 뿌리는 상황이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수단이 되지 않겠습니까?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하십시오. 친척들에게 계속 증거하십시오. 여러분의 직장에서 계속 복음을 증거하십시오. 그리고 영혼을 얻기 위해서 계속 찾으십시오. 그날에 여러분은 기쁨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썩지 않는 면류관
마지막으로 고린전서 9장입니다. 이 9장에서는 바울이 전도인의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영혼들을 얻는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절에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바울은 혼들을 얻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경기하는 경기자처럼 삶을 살았습니다.
24절에서는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절에서 말하기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바울은 경기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경기장에 경기하는 자는 절제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조절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들이 절제하고 스스로를 자제하는 것에 대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27절에서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내면의 적을 갖고 있어 이것은 육을 말합니다. 이 육이 영을 대적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해야 나의 삶을 주님 앞에서 훈련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생각해 여러분의 삶은 이와 같이 영적으로 훈련을 받는 삶입니까?
여러분은 말씀을 읽기 위해서 매일 시간을 따로 떼어 놓습니까? 묵상하기 위해서 시간을 따로 씁니까? 여러분은 기도하기 위해서 시간을 따로 떼어 놓았습니까? 우리는 매일매일 음식을 먹기 위해서 시간을 따로 내지 않습니까? 아침, 점심, 저녁처럼, 우리는 우리의 몸에 대해서는 결코 게으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과 혼을 위해서는 게으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혼은 말씀으로 양육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열심히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죠, 바울은 여기서 혼들을 구원받는 데 돕기 위해서 자기를 절제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말하기를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의 자격 상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경기장에 경기하는 경주자가 그 규칙을 위반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급은 잃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상을 잃어버릴 면류관을 잃어버릴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진행해 나갑시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받기 위해서.
그 면류관은 감람나무 잎으로 되거나 올리브 잎으로 된 면류관이나 월계수로 된 면류관이 아닙니다. 월계수의 면류관은 며칠 지나면 잎이 시들어 떨어집니다. 따라서 썩는 면류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받는 면류관은 썩어지는 면류관이 아닙니다.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입니다. 그 면류관을 천년 왕국 동안 지속된 다음에 영원토록 지속이 될 겁니다.
의의 면류관을 생각하십시오. 생명의 면류관을 생각하십시오. 영광의 면류관을 생각하십시오. 기쁨의 면류관을 생각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이 중에 몇 개는 받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2025년 5월 4일 강서 오후 말씀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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