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경건에 관한 비밀

존 그랜트

안녕하십니까? 이 저녁에 함께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먼저 디모데전서를 보기를 원합니다. 디모데전서 2장과 3 14~16절을 읽겠습니다.

 

디모데 전서 2:1~15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을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디모데전서 3:14~16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방식인 경건

여기 사도바울이 제시하는 두 가지 것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에 빌립보서를 썼습니다. 풀려났다가 다시 감옥에 갇히는 그 사이 풀려난 사이에 디모데전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옥에 갇혔을 때에는 디모데후서를 썼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후서를 읽으면 사도바울의 섬김의 마지막을 보게 됩니다. 이 서신서들을 보게 되면 바울이 이전 서신에서 쓰지 않았던 특이한 용어를 보게 됩니다. 그가 섬기는 가운데 지나면서 가장 크다고 생각한 것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는 단어는 경건이라는 단어입니다. 그가 쓴 서신들 가운데 몇 가지 것은 이 경건에 관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떤 사람이 하늘로 부름을 받고 난 후에 계속 증거가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에 있어서 지난 시절 어떤 시기보다도 바로 이때에 경건이 그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스로 물어 보시겠습니다. 경건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서의 주님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서 주님의 모습을 가진다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그의 가르침을 마감하면서 주는 가르침입니다.

디모데전서에서 무엇을 말하는가를 보겠습니다.

2 2절에서 처음 경건이 언급됩니다.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두번째 나오는 것은 3 16절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라며 경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번째는 4장에 나오는데요. 7절과 8절에서 경건을 발견합니다.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는 경건이 모든 일 즉 범사에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6장을 보시면 3절에서 바로 경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른 말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훈에 착념할 것을 말합니다. 6 5절에도 경건이 있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역시 6 11절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 온유를 좇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로 가시면 3 5절에 또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이 경건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다음 서신인 디도서 1 1절에도 믿음과 경건에 관한 진리를 말하고 있으며, 디도서는 디모데서와 동일한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디도서 1장에서는 믿음과 경건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서신들의 주제어임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계속 계속 계속 반복하여 이 단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 삶 가운데서 가져야만 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디모데서를 쓸 때에 디모데는 사도가 보내어 에베소에 있었습니다. 1 3절을 보시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에 머물라고 한 이유는 바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교훈이 그 안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로 하여금 에베소에 남아서 옳은 가르침을 가르칠 것을 명했던 것입니다. 이 서신서에서 하나의 주제에 관해서 경건한 옳은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 보겠습니다.

여기 보시면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디모데는 사도바울보다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이 서신서를 받을 때 디모데는 약 40세정도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40세가 젊다고 생각하지 않으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저를 매우 나이가 많은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아직 저 자신은 아주 젊다고 저 자신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40세라는 젊은 나이였는데 나중에 이 부분에 대해서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첫번째 두번째 전도 여행 때 방문했던 루스드라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디모데는 사도바울이 첫번째 전도여행 때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어머니가 유니스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영적인 어머니와 영적인 할머니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구원 받을 때 디모데가 매우 어린 나이였던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첫번째 전도여행을 하고 루스드라에 이르기 이전에 함께 동행했던 마가요한은 사도바울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한 젊은 사람이 자기 길을 돌이켜서 집으로 돌아가 버렸고 또 한 어린 사람이 여기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 받은 사람이 사도 바울의 두번째 전도여행에서 그를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한 젊은이가 떠나서 빈 자리를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메우도록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생각할 때는 좀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마가요한이 돌아갔을 때 매우 슬펐습니다. 그 손실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 이미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수년이 지난 후에 마가요한 조차도 다시 하나님의 일로 돌아왔습니다.

 

기도들

2장을 보시면서 이 이야기를 좀 더 진행시키겠습니다. 왜 이 주변에 일어난 일들이 경건한 주제를 가져오도록 했을까요? 이 전체 중에서 2장을 먼저 보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2 1절로 보시면 사도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장의 주제는 기도이고 모임에서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첫째로 왜 기도를 소개하고 있을까요? 여기는 이미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는데 왜 기도를 먼저 말하고 있을까요?

1절에 보시면 내가 첫째로 무엇보다 먼저 첫째로라고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께 말한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주위에 누군가와 관계가 나쁘다면 그 사람과 얘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과 관계가 나빠지면 전에 이야기를 했었다가도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더 이상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되면 서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모인 사람들이 내가 기뻐하지 않으면 그들과 대화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다루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여기에서 기도를 제일 먼저 급하게 다루었을까요?

기도는 대화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대화를 끊는 침묵의 상태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집안의 분위기는 매우 냉랭할 것입니다. 가족과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는다면 차가운 기운이 가정에 감돌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침묵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서 나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하기를 먼저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왜 기도를 먼저 이야기한 것인지 또 한가지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많은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성도들이 기도를 했어야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기도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증거가운데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기도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첫번째로 가져온 이유가 이런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가 기도에 대해서 사용한 단어들을 살펴보시겠습니다. 기도를 말할 때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말했습니다. 이 네 가지는 무슨 의미입니까?

먼저 간구를 살펴보시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누군가의 특별하고 특정한 필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요구하고 내가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을 하나님 존전 앞으로 가져 가는 것입니다. 각각의 것들을 따로따로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두번째 사용한 단어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일반적인 특징으로서의 단어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즐거운 마음이 됩니다. 이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주님 앞에 다가갈 때에 우리는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에 도고가 또한 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두 가지 단어 중 간구는 우리의 요구를 하나님 앞에 제시하는 것인데, 이 안에 있는 내용은 멀리 떨어져서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나아가 친밀 가운데서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까워졌을 때 여기에 친밀한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 감사가 또한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기도는 감사를 드리므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감사할 때 주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여기 보시면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되어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거짓교사들을 인해서 감사드릴 수는 없겠죠.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래서 감사를 드릴 때는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가 주님 앞에 서 있을 수 있는 그 은혜를 감사하는 것이며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그 은혜를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드릴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좀더 내려가시겠습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지를 보시겠습니다. 이미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이 나왔습니다. 여기 보면 2절에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도 나와 있습니다. 이 당시에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정치세계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그기에 실망해서 그런가요? 그기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가 답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복음이 퍼지는 데에 평안한 환경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정부가 막지 않으며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는 데에 형통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할 때에 모든 경건과 단정함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이 이유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당선이 되던 저 사람이 선출이 되던 간에 우리의 목적은 복음이 편만하게 전파되는 환경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이것을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기도를 하는 것과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속에 무엇을 가지셨는지를 보겠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기를 우리에게 요구하시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평안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남자와 여자가 복음으로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영혼이 구원받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5절과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구원받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루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잘 알려진 성경구절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절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것을 주목해 보시겠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다 하였습니다. 이 말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다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온 우주적인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받았다라는 우주적인 구원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모든 사람의 연고로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속전이 되도록 자기 자신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남자나 여자나 누구에게나 갈보리 그리스도께서 속전으로 주어진 이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도록 열린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0 28절에서는 조금 다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8절에 보시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 즉 속전이라는 대속물로 주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하는 것은 위하여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0 28절의 이 대속물은 즉 속전은 많은 사람, 즉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한 속전입니다. 여기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의 이 속전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에게 만이 그 속전을 누리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경건한 가운데서 형제자매들이 기도를 하셔야 하는 이유입니다. 형제들은 입으로 소리를 내어서 모임가운데서 기도를 하시고 자매들은 침묵한 가운데서 속으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지역모임에서 기도하게 하는 경건

이제 8절은 지역모임에 모였을 때에 기도를 하는 것을 다룹니다. 각처에서 남자들이 할 때 이 각처는 모임이 모이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각처에서 남자들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했기 때문에 그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이것은 남자는 기도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사람이 다 말하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남자라면 목소리로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남자는 기도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기도집회에 지루하면서도 냉랭한 기도집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기도에 대해서 뭐라고 사도바울이 말했는지 기억하십니까? 8절에 남자들은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손을 들고 기도하라는 의미로 생각하십니까? 주님께 찬송을 드릴 때 이렇게 하고 찬송을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있는 영국에서도 이렇게 손을 들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집단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거룩한 손입니다. 이것을 모양으로 보여드린다면 거룩한 손을 보이라는 말입니다. 저희가 죄로 인해 손이 더럽혀지지 않았음을 나타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기도에 여러분이 스스로 합당하다는 것을 나타내라는 말입니다. 내가 부정직한 일을 했다면 나는 거룩한 손을 가지지 못합니다. 나는 거룩한 손을 갖고 있습니다 라고 거짓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깨끗하고 거룩한 손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깨끗한 손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떠한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대한 표시입니다. 우리가 만일 깨끗한 손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깨끗해지기까지 우리는 잠잠하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더럽혀진 손을 갖고 있으면 안됩니다. 모든 믿는 자들이 죄를 짓습니다. 항상 매번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가끔씩 때때로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죄가 용서 받습니다. 다시 하지 않도록 우리가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깨끗한 손을 내어 보여서 들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임에 모이기 전에 우리의 손은 이미 깨끗해져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기 기도집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기도할 때에 분노와 다툼이 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 분노는 화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화난 상태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다툼이라는 것은 내 자신 속에 있는 의심과 속에서의 다툼을 말하는 것입니다. 속에서 의심하고 자꾸 되뇌이다 보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분노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다투는 것을 말합니다. 분노는 다른 사람과의 다툼을 말한다면 다툼은 내 자신의 속에서 일어나는 다툼을 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잠잠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기도를 드려야 됩니다. 이것이 형제님들이 기도집회 전에 스스로를 준비해야 하는 준비입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기도할 것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지 내가 기도할 것을 작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예비하고 준비해서 오지만 상황이 바뀌어서 시간이 모자라거나 집회가 그와 같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여러 일들로 인해서 기도를 드릴 수 없는 상황도 있습니다. 이것이 형제들, 남자들이 기도해야 하는 모임의 방식이라면 자매님들은 어떻겠습니까?

 

자매들의 기도와 경건

자매님들의 잠잠한 기도는 형제님들의 입술로 드리는 공적인 기도와 마찬가지로 능력이 있는 기도입니다. 영적인 경건한 자매님들은 모두가 잠잠한 가운데 잠잠한 기도를 지역모임에서 드려야 합니다. 자매님들은 자기 자신이 기도 드리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내 보이겠습니까? 그것을 9절과 10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아담한 옷을 입습니다. 겸손한 상태의 옷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뽐내기 위한 세상적인 옷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부나 자기의 패션과 멋을 자랑하는 것으로 치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행으로 자기 자신을 알리는 자매님이 필요합니다. 자매님의 단정함은 값진 옷이나 진주 같은 것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건한 자매님들의 단장은 선행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들이 자매님들과 형제님들이 기도모임에 기도하러 모일 때에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11절에서 여자는 왜 지역모임 가운데서 말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매님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선행을 한다. 나는 아담한 옷도 입는데 왜 목소리를 내어서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까? 11절부터 15절까지가 그기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매님들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매님들이 형제님들보다 영적으로 못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매님들이 형제님들보다 덜 중요하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형제님들보다 자매님들이 덜 가치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매님들은 형제님들과는 다릅니다. 기도할 때에 형제님들보다 다른 일을 다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역할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가 모였을 때 자매님들은 왜 입으로 소리 내어 기도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이유를 사도바울은 주고 있습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고 말합니다. 일절 순종함으로 배우라고 말합니다.

제가 제 아내와 처음 결혼했을 때를 기억해 보면 그 당시에 제가 참석하던 성경읽기 집회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젊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읽기 시간에 여러가지 대화를 합니다. 그기에 매우 경건한 자매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모든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잠잠한 가운데 듣고만 있었습니다. 몇번에 성경읽기 집회가 지난 다음에 언젠가 그 자매님이 말했습니다. 성경읽기 집회가 끝나고 홀 밖으로 나온 상태이었습니다. 형제님 3절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어떻습니까?라고 자매님이 말했습니다. 4절은 맞는 것 같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또 말했습니다. 성경읽기집회를 참석하고 있는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이 그 자매님이 성경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님은 경건한 자매님이기 때문에 집회 동안에는 잠잠히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알려 주면서 말할 때에도 매우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자매님들이 왜 공적으로 집회에 참여하면 안되는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이것이 남자의 자리를 빼앗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남자의 권세를 가로채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자가 말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를 말할 때에 아담이 먼저고 이와가 다음이라는 순서를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가운데 남자가 인도자입니다. 그리고 여자인 하와는 돕는 배필, 돕기에 합당한 배필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14절에 있습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했습니다.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않았습니다. 사단인 뱀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아담은 분명히 알았지만 꾀임을 당한 것은 하와였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을 때 하와는 뱀에게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그런 일은 나에게 묻지 말고 아담에게 가서 말했어야 한다고 아담한테 말씀하세요. 그러면 아담은 꾀임을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이 잠잠해야 하는 이유가 두 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창조 가운데 질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가운데 여자의 머리는 남자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순서와 질서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질서 가운데 들어가 있다는 자체가 놀라운 특권입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낫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수행해야 하는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 다 중요합니다. 이것을 하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자매님들이 너울을 쓰고 계신 것을 보고 있습니다. 자매님들이 잠잠하고 계신 것도 제가 봅니다. 천사가 이것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모여 있는 이 모임에서 천사가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을 살펴봅니다. 천사들은 살펴보고 이것을 이제 주목합니다. 자매님들은 하와가 실패했던 것을 순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자리를 자매님들은 잡고 계십니다. 하와는 그기에 실패했습니다. 또한 사단이 실패한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를 갖기를 갈망했습니다. 모임에 있는 자매님들을 천사들이 바라봄으로써 더 지적이고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15절에 무엇을 말하는지를 또 보시겠습니다.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여자는 집에서 자기가 유지해야 되고 가져야만 되는 집안에서의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주신 그 자리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자가 가져야 될 자리를 추구하는 것이 여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남자는 남자의 자리가 있고 여자는 여자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제 결혼하게 되면 여자는 아이를 갖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자리를 경유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움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대해서 순종하고 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자의 책임입니다. 남자는 또한 다른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의 가족과 아내를 위한 양식을 공급하는 일이 필요 합니다. 그래서 자매님들이 지역모임 가운데서 가져야 할 자리는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을 스스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영적인 경건한 삶 가운데서 항상 가져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자매님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잠잠해야 된다는 것은 저는 동의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기에 참석한 형제님들은 이것을 하셔야 됩니다. 지역모임에 모일 때에 그 모임에 합당한 역할을 형제님들은 수행하셔야 됩니다. 자매님들에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십시오라고 말하게 된다면 그러면서 남자는 자기의 자리를 가지지 않는다면 저는 지역모임에서 오랫동안 잠잠해 있었기 때문에 시작하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짧은 기도라도 시작을 하십시오. 모였을 때에 찬송을 선택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모든 집회에서 모든 감사를 매번매번 말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집회에서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언제든지 드릴 수 있도록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만 좀 더 하시겠습니다.

 

경건의 비밀

이제 3장으로 옮겨 가시겠습니다. 14절과 16절에서는 끝맺음을 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2장은 경건한 가운데 산 삶을 말했습니다. 3장에서는 경건의 비밀을 다루고 있습니다. 비밀이라는 단어를 좀 보시겠습니다. 한국말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비밀이라는 것은 무언가 감추인 것을 말합니다. 무언가 내게 비밀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의 이 비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의 비밀은 전에 감취었다가 이제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것을 말합니다.

숙제를 좀 드릴까요? 신약성경 전체를 보시고 비밀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살펴보십시오. 답을 먼저 말씀드리면 여기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한 서신서에서 쓰면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여기서만 말했습니다. 아주 간단한 숙제죠. 잠을 안 자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여기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두 개의 비밀이 크다고 말해졌습니다. 경건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전에 감취었다가 이제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시겠습니다. 이 비밀이 바로 이것입니다. 육신으로 나타나셨으며 죄가 없으신 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므로 말미암아 이 비밀이 드러났습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그리스도는 감취어져 있었습니다. 비밀이었습니다. 15절을 보시면 지역교회를 의미하는 두 가지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5절의 앞쪽을 보시면 지역교회에서 어떻게 행하는지의 태도가 매우 중요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6절에서는 지역교회에서의 믿음과 경건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는 지역교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하여야 될 것을 16절에서는 무엇을 믿어야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가지가 핵심입니다.

 

감독의 역할을 통한 경건

사도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지역모임으로 한동안 모이지 못했습니다.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지만 이것을 네게 쓰는 이유는 내가 만일 지체하였을 경우다라고 하였습니다. 3장에서는 먼저 감독의 역할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8절에서 13절까지는 지역교회에서 일을 하는 집사들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지역모임에서의 감독 또는 장로와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 여기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러분들이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자격은 감독이나 집사만을 위한 자격 조건이 아닙니다. 이 조건은 모든 믿는 자들이 가져야 하는 자격입니다. 이렇게 사시는 분 만이 지역모임에서 장로든 집사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감독이라는 말을 나타내는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3가지 종류가 나옵니다. 이제 감독이라는 말이 여기서처럼 살펴보는 사람으로서의 감독이라는 말이 하나가 있습니다.

감독이라는 말을 생각해서 보면 여러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기능을 말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맡겨진 일입니다.

두번째 단어는 장로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나이가 많아야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에 있어서 성숙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세번째는 목자라는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이 단어를 썼습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안내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두어가지를 말한 다음에 제가 스코틀랜드로 돌아가게 됩니다. 제가 외부로 많이 돌아다니고 몇 번 밖에는 스코틀랜드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저를 감독으로 인정해 주지를 않습니다. 한 사람은 되겠지요. 그러나 약속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감독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 그 감독이라는 것을 지역모임이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장로로 세워진 뒤에 장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가운데 사람들이 알아보고 세워진 다음에 양무리를 인도하게 되는 목자가 됩니다.

 

집사의 일을 통한 경건

집사라는 말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이것은 일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종이라는 단어입니다. 제가 오늘밤 이렇게 하고 있는 이 일은 종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성도들의 종으로서 여기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스승으로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여러분들을 섬기기 위해서 여기에 서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을 찾아보실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사도행전 6장에는 봉사라는 단어가 말씀을 전하는 것 외에 또 다른 일에도 봉사가 쓰였습니다. 재물을 다루는 것이 또한 종의 일입니다. 모임의 일로 서신을 쓰고 주고 받는 것도 종의 일입니다. 모임을 청소하는 것도 또한 종의 일입니다. 복음집회에 오는 사람들을 환영하고 안내하는 것도 종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십시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이 자격이 필요합니다. 보세요. 홀을 청소하는데 이 자격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모임에서 어떤 방식이든지 간에 섬기고 싶고 일을 하고 싶으시면 이 자격이 필요합니다. 밖에 말씀을 전하러 나가면 저는 모임 안에서는 더 이상 종으로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집에서 영적이지 않게 막 살고 도 세상에서도 그렇게 살고 있다면 모임에서는 종으로서 섬길 수가 없습니다. 이 마감하는 말씀에 있어서 내용이 이러합니다. 우리의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나타나는 경건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을 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강조되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성도들입니다. 이 공간은 하나님의 집이 아닙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 하나님의 집은 지역모임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하나님의 집입니다. 여러분 성도님들이 여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장소에서 성도님들이 모이시게 되면 다른 장소가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건물이 아닌 모인 성도들이 말이죠. 여기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될 것을 알게 한다고 할 때에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그 한 가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여기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모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서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고 불러내셨습니다. 그 의미는 여러분들이 주님께 속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삼으셨습니다.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하는 세번째 장인데요. 또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표현했습니다. 터라고 하는 것은 기초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초는 그 위에 짓기 위한 토대를 말합니다. 지역모임은 견고한 토대를 가져야 합니다. 그 토대 위에 무엇을 짓겠습니까? 기둥입니다. 기둥은 증거를 말합니다. 기둥을 세워놓으면 누구나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지역모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여러분들의 증거를 세우기 위한 단단한 기초로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견고한 터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그리고 이 터는 기둥을 떠받칩니다. 여러분들이 증거를 받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증거가 서 있도록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그 기둥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태도에 대해서 말한 이후에 믿음에 대해서 전환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경건의 본

여기서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만약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잘못되었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틀려버립니다. 우리가 터 위에서 증거의 기둥을 세울 때에 우리의 믿음의 토대는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터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못되면 나머지 모든 것이 잘못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경건의 비밀이었는데 이제는 드러나는 것입니다. 경건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뿐만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형태로 나타나셨습니다.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습니다. 그 스스로의 영으로 의롭다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의롭게 되셨음을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것은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는 의미는 성령에 의해서 옳고 합당한 방식으로서 일을 하신 것으로써 그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에게 보이셨다 했습니다. 주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를 기억하시죠. 겟세마네 동산에서 천사들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의 아들께서 땅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천사들은 놀라워하면서 바라본 것입니다. 땅에서 살고 있는 죄가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죄를 지을 수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이것을 천사들은 놀라워하면서 바라보았습니다. 천사들은 아담이 타락하는 것을 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천사들은 타락할 수 없는 사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국에서 전파되셨습니다. 우리는 국가라는 제도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영접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이 기뻐하고 만족하여 그의 돌아오심을 영접하고 영광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모든 방면에서 만족케 하시는 분이 바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경건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면 그의 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나중에 영광가운데 하늘로 영접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기를 바라시는 방법대로 우리가 살아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유일한 한가지 방법은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셨기 때문에 하늘의 영광가운데 올려 영접되셨습니다. 바울이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따라가야 되는 그분은 경건한 삶을 사셨습니다. 천사들이 놀라워하면서 그분을 보았습니다. 하늘로 놀라운 환영가운데 영접되어 올라가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면 주님을 따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에 주님께서 계시도록 해야 됩니다. 이렇게 경건을 다루는 두 장을 보셨습니다. 내일 아침에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디모데전서에서 경건에 대한 내용을 좀더 나눌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고 교회이고 경건의 비밀이었습니다. 이제 내일 아침에는 경건함 가운데 연습하는 것에 대한 말씀을 교제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