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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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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8. 4. 12:42 성경연구

성경의 비유적 표현

 

어떤 생각을 더욱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 비유를 쓴다. 비유는 항상 흥미를 끌며, 보통은 분명하며, 일반적으로 눈길을 끈다.

당신이 구름 위를 일정한 속도로 날으는 비행기를 타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비행기가 동일한 속도로 비행하는 동안에는 책을 읽거나, 이야기하거나, 창문을 쳐다볼 수 있다. 비행 방식이 바뀌면, 그럴 수 없다. 비행기가 갑자기 선회하거나, 수직 기류를 만나거나, 속력을 올리면, 바로 당신은 경계심을 갖게 되고 불안하기까지 할 것이다. 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말이 부드럽게 이어지면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되고, 항로에서 이탈하거나 정상에서 벗어나면 즉시 경각심이 생기게 된다.

성령께서는 비유를 정확하게 사용하신다. E.W. 불링거는 성경의 비유들이란 책에서 200개 이상의 비유를 언급하고, 그것들을 다시 몇가지로 분류해 놓았다. 성경을 읽다 보면 언어를 언제 문자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해석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보통 우리는 성경 언어를 문자적으로 즉 단어의 표면상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으면 경험, 사실 이해, 계시된 진리, 성경의 일반적 방향이나 가르침과는 모순된다. 여기서 성경의 모든 비유가 아니라, 가장 보편적인 것 몇개만 살펴보자.

 

1. 직유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비유이며 두 개의 사물 사이에 유사성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처럼’’ “····같은단어를 사용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으니····”( 1:3).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벧전 2:25).

 

2. 은유

두번째로 많이 나오며 같이’, ‘처럼등의 단어를 쓰지 않고,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이라고 말해 버린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40:6) -은유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벧전 1:24) -직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23:1)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5:23)

이는 내 몸이니”( 26:26)

나는 생명의 떡이니”( 6:35)

은유를 잘 이해해야 할 중요성을 알려 주는 사건이 있다. 마틴 루터가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쯔빙글리와 성경교리에 대해 열띤 논쟁을 하게 되었다. 성찬시 나누는 떡에 주님께서 실제로 계시느냐 하는 문제였다. 로마 카톨릭은 신부가 떡을 거룩하게 봉헌하는 순간 떡은 더 이상 떡이 아니라 주 예수님의 신성한 몸이 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이 교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카톨릭처럼, “이는 내 몸이니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해 이 견해를 지지했다. 루터는 어리석게도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표면적 의미로 주장했다. ‘이는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실제로 내 몸이다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즉 떡이 예수님의 몸이 되었다. 그러자 루터에 반대했던 쯔빙글리는 이 말은 단지 그리고 순수하게 은유라고 지적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좋습니다, 루터씨, 당신은 나는 문이니라는 구절은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3. 알레고리(풍유)

성경에는 약간의 알레고리도 나온다. 비유나 은유처럼 알레고리도 두 개를 비교하고 있다. 직유를 확장시키면 parable(우화)가 된다. 이 우화는 영적인 진리를 자연 현상으로 표현한다(: 씨뿌리는 비유). 또한 은유를 확장시키면 알레고리가 된다. 알레고리는 하나의 사물을 다른 것으로 계속해서 나타내기 때문에 은유보다 더 복잡하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영어권에서 가장 유명한 알레고리이다. 모든 알레고리는 표면상 나타난 의미보다 더 깊은 뜻을 지닌 꾸며낸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4장에서 하갈(계집종)과 이스마엘(그 아들)을 쫓아낸 과거의 사실을 근거로 율법에서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알레고리의 목적은 과거의 사건에서 교훈을 끌어내고자 함에 있다. 시편 80, 이사야 5, 마태복음 12:43-45등이 알레고리의 예이다.

알레고리로 표현된 성경구절을 읽을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엉뚱한 해석을 하기 쉽기 때문이다. 성경에 알레고리가 나온다고 해서, 성경의 모든 부분을 알레고리로 해석해서도 안된다. 자세한 것은 다음 호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4. 역설(파라독스)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또 다른 비유에는 역설, 즉 겉으로 보기에는 모순되는 듯한 표현이 나온다. 예를 들어 친절하려면 매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역설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에 이같은 역설적 표현이 성경에 종종 나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16:25).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5. 아이러니

성경에는 아이러니도 나온다. 아이러니칼한 표현은 어떤 생각을 정반대의 의미를 담는 방식으로 나타낸다.

아이러니의 한 형태인 풍자는 어떤 진술의 진정한 의미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술에 더 큰 힘을 가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다.

바알 선지자들에게 한 엘리야의 말은 분명 비꼬거나 아이러니칼하다.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하매”(왕상 18:27).

욥도 친구에게 비꼬고 있다.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12:2).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3:33에서 아이러니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6. 의인화

성경의 비유 중 가장 흥미있고, 풍부한 것은 의인화이다. 이는 사물에 사람의 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너희 눈이 그를 긍휼히 보지 말며”( 13:8, 우리 말 개역 성경에는 너는으로 되어 있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며 “( 6:3).

토지가 처량하니”( 1:10).

별들이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 5:20).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85:10).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1:15).

이러한 비유적 표현이 없다면 우리의 말이나 글은 매우 무미건조할 것이다.

 

7. ()의 의인화

이 유법은 하나님에게 인간의 특징을 부여한다.

이단에 관한 글을 쓰는 윌터 마틴은 몰몬교도들을 자기 강연에 초청했던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 주었다 몰몬교에 관한 강연의 마지막에 마틴은 몰몬교도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자 한 젊은 몰몬교도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약 내가 성경에서 하나님이 살과 뼈로 된 몸을 갖고 있다는 것(몰몬교 교리 중 하나임)을 보여주면, 당신은 죠셉 스미스와 브라이엄 영(몰몬교의 창시자)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겠느냐?” 마틴 박사는 만약 그렇게 된다면 분명히 깊은 인상을 받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젊은 몰몬교도는 다음 성경구절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출애굽기 33:11,20, 욥기 34:21, 야고보서 5:4, 이사야 30:27. 이 구절들에는 하나님의 얼굴, , , 입술이 나온다. 그 몰몬교도 청년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하나님은 코가 있고, 눈이 있고, 발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고차원의 인간입니다. 이제 우리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세요. 하나님은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틴 박사는 그 젊은이에게 그럼 이번엔 다른 구절도 좀 찾아봅시다. 시편 91:4을 읽어 주시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 몰몬교도 청년은 읽었다. “(하나님)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마틴 박사는 , 이제 하나님은 어미닭이시군요? 하나님을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닭으로도 생각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젊은이는 당황해서 앉았다. 마틴 박사는 이 순간을 이용해 말했다. “당신이 인용한 구절들은 의인법을 쓴 구절들입니다. 하나님은 고차원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말씀하시기를 영은 살과 뼈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23:19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우리는 성경의 비유를 조심스럽게 살펴서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8. 이와 유사하게 사람의 느낌이나 감정을 하나님께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이 그같은 감정을 갖는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슬픔, 괴로움, 기쁨, 후회, , 미움, 복수, 불쾌, 시기, 동정 등이 비유적으로 하나님께 사용되고 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6:6).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20:5).

하나님이 잊으시거나, 생각하거나, 웃거나, 낳거나, 보거나, 냄새 맡거나, ()타거나 등을 하실 때 이는 비유적 표현인 것이다.

 

9. 성경에는 또한 과장법도 쓰인다.

어떤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문자적 의미보다 더 많이 말하는 수법이다. 이 방법은 성경에서 꽤 자주 쓰인다.

애굽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8:17).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1:28).

물매로 돌을 던지면 호리도 틀림이 없는 자더라”( 20:16).

 

10. 또 성경에서 매우 자주 나오는 것으로 환유법이 있다.

이 비유에서는 어떤 사물과 관련된 것이 그 사물 자체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환유는 유사성 때문이 아니라 직접적 관련성 때문에 사용된다. 예를 들어 글을 잘 쓰는 사람에게 좋은 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 이때 손은 실제로 글을 쓰는 행위를 나타내는 환유이다. 환유법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원인이 결과를 나타낼 때 쓰이는 경우가 있다.

결코 칼이 너의 땅을 지나지 않을 것이며 라고 했을 때 은 전쟁을 가리킨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51:7). 우슬초는 뿌리는 의식을 할 때 쓰는 작은 나무이다. 여기서 우슬초는 죄를 사하는 피를 가리킨다.

이같은 환유는 창세기 40:9, 갈라디아서 3:13, 베드로전서 2:24에 나오고 있으며 여기서 나무는 교수형 틀을 가리킨다.

결과가 원인으로 쓰이는 환유법도 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25:23). 여기서 국민은 두 어린 아이를 가리킨다. 이 아이의 후손들이 국민을 이루게 될 것이다.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9:17). 벙어리 귀신이란 귀신이 벙어리인게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을 벙어리로 만드는 귀신이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2:29,30). 늙은 시므온은 구원을 본게 아니라 구원을 해 주실 분, 그리스도를 본 것이다.

주체와 관련된 환유법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장소의 이름이 그 곳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든지 혹은 어떤 그릇이 그 안에 담긴 것을 나타낸다든지 하는 경우이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19:9). 여기서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 즉 삭개오와 그 가족들을 가리킨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고전 11:26). 여기서 잔은 그 안에 담긴 것을 의미한다(만찬 예배에서 포도즙을 쓸 것이냐 포도주를 써야 하느냐 하는 수많은 논란도 이 구절이 비유적 표현임을 지적함으로 피해 갈 수 있다). 이 비유는 복잡해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런 비유를 그 기술적 특성에 대해 조금도 생각지 않으면서도 매일 대화에서 잘 쓰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이 비유를 잘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때때로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 또 다른 비유로 제유법이 있다.

한 사물의 일부로 전체를 가리킬 때 쓰인다.

너희가 나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 되리라”( 43:38). 여기서 흰머리는 늙은 야곱 자신을 가리킨다.

 

13. 생략법

이론상으로는 비유의 하나는 아니나 여기서 설명하는 것이 편리할 것 같다. 문장내에서 한 개 흑은 그 이상의 단어를 생략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공간이 생긴 경우이다. 이때 생략된 단어는 문법적으로는 필수적이나, 의미의 변경없이 생략될 수 있다. 이 방법은 보통 작가들이 독자에게 시간을 절약시켜 주고자 할 때나, 강조된 단어에 더 주목하도록 하고 싶을 때 쓴다.

마태복음 14:19은 예수님이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영어 성경에는 주다는 동사가 생략되어 있다)로 나와 있다. 이 구절에서 떡을 주다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다. 이 생략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이 무리에게 떡을 준 것은 중요하지 않고 단지 제자들은 그 수단이었을 뿐, 주님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14. 합성(polysyndeton)도 비유의 일종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속도를 늦추어 차례대로 나오는 각각의 항목에 특별히 주목하도록 하기 위해 쓰인다. 이 비유에는 그리고(and)’라는 단어가 계속 사용된다. 창세기 1장에서 그리고는 최소한 100번은 나온다. 창세기 22장이나 누가복음 15장 같은 유명한 구절에서도 이 수법이 쓰이고 있음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수법은 성경 전체에 걸쳐 나오고 있으나 최근의 성경 번역본들은 이를 제거해 버리고 그 결과 독자들에게 이 비유의 교훈을 놓치게 하고 있다.

 

15. 이와 반대되는 비유로 비합성법(asyndeton)이 있다.

어느 구절이 연속해서 나올 때 각 부분이 중요하긴 하나 그보다는 계속 그 다음으로 넘어가 독자들이 마침내 크라이막스에 도달하게 한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14:12-14), 가난한 자, 병신, 저는 자, 소경 같은 목록은 빨리 지나가서 문장의 끝에 있는 약속된 축복에 주목하게 한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 다음에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한 사람을 말씀하신다. 모두다 변명하면서 오지 않는다. 자신의 초대를 정중하게 거절한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난 집주인은 종들을 보내어 다른 사람으로 연회장을 채우게 한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주목해 보자. 이번에도 그 목록은 똑같지만 합성법을 쓰고 있다. “빨리···나가서····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14:21).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 볼 수 있다. 왜 동일한 목록이 합성법으로 쓰이고 있는가? 여기서는 여러 종류의 개인 각각에게 주목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비합성은 빨리 문장의 끝에 있는 크라이막스로 달려간다. 목록이 중요하긴 하나 크라이막스보다는 덜하다. 합성법은 목록의 각 항목에 주목하게 한다. 성령께서 이 비유를 쓰실 때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천천히! 이것을 생각해 봐라. , 이번엔 이것을, 이제 이것을. 여기서 합성법이 사용된 목록을 보자. 그리고 문맥을 살펴보자. 이 비유를 사용한 이유를 금방 알 수 있게 될 것이다.”(18,19절에서처럼 무엇을 샀으니 갈수 없다고 변명할 수 없는) 가난한 자 그리고(아마 20절에서처럼 결혼했으니 갈 수 없다고 하지 않을) 병신들, 그리고(19절에서처럼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지 않을) 저는 자들, 그리고(18절에서처럼 밭을 샀으매 나가 보아야겠으니 안된다고 하지 않을) 소경들, 여기서 그리고’(and)는 한 단어에 불과하다. 일상 대화에서 우리는 이 단어 그리고를 많은 사물이나 생각을 연결 시킬 때 사용한다. 그러나 성경에서처럼 그렇게 많이 쓰지는 않는다. 영어에서는 보통 문장 하나에 접속사도 하나이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을 한번 살펴 보자.

성령께서 그리고’(and)라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를 보자. 우리는 사용된 언어의 아름다움과 권위 때문에 그냥 읽어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고는 모든 곳에 있다. 자주 새로운 장이 그리고로 시작되고(: 22) 성경의 새로운 책도 이 의미심장한 접속사 그리고로 시작된다(: 레위기). 이 비유적 표현을 제거해 버린 번역은 성령께서 강조하신 것을 빼앗아버린 셈이 될 것이다.

 

16.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으로는 완곡법이 있다.

우리는 거친 단어 대신 부드러운 단어를 쓰고자 할 때 완곡법을 사용한다. 즉 죄를 감싸줄 때 완곡법을 쓴다. 술주정뱅이를 애주가로, 간통을 스캔들로, 호모를 소돔주의자로 부른다. 쓰레기 청소부를 환경미화원이라 부르는 것은 직업을 좋게 불러주는 일종의 비유법이다. 성경에서는 미묘한 감정이 개입된 경우 일반적으로 완곡법을 쓴다.

다윗이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고 물었을 때 구스 사람이 대답한다.

내 주 왕의 원수와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하 18:32). 이 구스인은 두 개의 완곡법으로 다윗에게 압살롬이 반역자임을 상기시키고 그가 죽었음을 또한 암시하고 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3:9)라고 룻은 보아스에게 말했다. 이는 청혼을 뜻하는 완곡한 표현이다.

더 중요한 성경의 비유들이 여기 저기 산재해 있다.

, 그건 단지 비유일 뿐이야하는 말이 비유적 표현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비유는 매우 강력한 표현 수단이다.

성령께서 이같은 방식을 사용하실 때는 그 말해진 내용에 강력함과 중요성을 더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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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