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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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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giving)?

 

성경을 상고해보면 헌금 문제가 하나님 말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장의 수준 높은 가르침 바로 뒤에는 성도를 위한 연보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한 부분으로 강조되어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에서는 그 문제에 대해 두 장이 할애되어 있습니다. 그밖에 많은 곳에서 우리는 이 헌금 문제가 언급된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이 헌금문제를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자원들을 사용하는 법을 성경에서 잘 배워야 합니다.

먼저 헌금은 제사장의 제사행위임을 주목하십시오. 빌립보서 4 18절에서 바울은 헌금을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소유로 주장하고 다른 용도로 쓸 수 있는 금전이나 소유물을 포기하는 희생적인 행위를 의미 합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일은 희생을 내포합니다. 만일 우리가 희생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서 결코 축복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헌금이 제사 행위라는 것은, 그것이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에 나타나 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드린 것은 사도의 필요를 채워주었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열납되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의아해합니다. 여기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헌금의 방법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6장 서두를 읽어보면 다음 세 가지 원칙이 제시된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 연보는 준비되어야 한다.

주의 첫 날이 우리가 얼마나 드려야 할지 결정하고 그 목적을 위해 따로 모아두어야 할 날입니다. “저축하여 두어서라는 표현은 결정된 금액을 따로 구분해두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주의 상() 앞에 가져가 준비된 연보함에 넣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지만,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적당한 때까지 따로 보관해둘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월 단위로 급료를 받는 경우도 이 원칙이 적용되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경우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봅니다. 급료를 받을 때 얼마나 드려야 할지 미리 결정하십시오. 하지만 주의 첫 날에 그 문제를 생각해보되, 떡을 떼는 일 만큼 그날의 주요 의무 중 하나로 생각해보는 것이 좋은 습관입니다.

왜 주의 첫 날이 강조되어 있을까요? 분명 그날은 우리가 주 예수님이 자신을 희생하여 드리신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분은 자기희생의 비할데 없는 본이시며, 그분을 생각할 때 우리는 헌신에 대해 감동을 받게 됩니다

 

2. 연보는 모든 사람이 참여해야 한다

너희 각 사람이‥‥저축하여 두어서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아무 예의도 없습니다. 당신은 드릴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아무리 적든 간에 당신이 드릴 수 있는 것을 드려야 합니다. 과부의 두 렙돈과, 그것이 주 예수님께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기억하십시오.

 

3. 연보는 이를 얻은 대로 드려져야 한다.

흔히 율법 아래서는 그것이 기준이었다는 근거로, 따로 모아두어야 할 금액으로 10%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최소한의 의무였고, 그 외에 번제나 레위기 27장의 서원제 등 드릴 기회가 얼마든지 더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신실한 백성은 십분의 일보다 훨씬 이상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드려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신 대로가 바울의 답변입니다. 특히 신혼 초와 같은 때는 재정이 여유로울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좋은 원칙은 수입 안에서 생활하고 분에 넘치는 소비성향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얼마를 드려야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심사숙고 해서 따로 준비해야 할 금액을 결정해야 합니다. 헌금하는 습관을 당신의 삶을 건축하는 기초 중 하나로 삼으십시오.

 

고린도후서 8 1~9절을 읽어보고 다음 세 가지 지침을 살펴보십시오.

 

1. 다른 이들의 본

마게도냐 교회들이 연보의 본을 보인 사람들로 인용되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연보를 기대할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환란과 궁핍 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따로 모아두었습니다. 그들의 자원함은 바울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능력의 비결이었을까요?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마 이 고린도 성도들은 예루살렘성도들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나 그것이 그들 사이에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본에서 능력의 비결을 배우십시오! 우리의 행동은 우리를 예의주시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들로 제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보게 하십시오!

 

2. 우리의 사랑을 증명함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사랑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어려움 중에 있는 성도들은 우리가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위로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실질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사랑과 주는 것은 성경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2:20). 오직 이 방법으로만 우리의 사랑이 입증될 수 있습니다.

 

3. 주 예수님의 본

주 예수님의 본이 가장 큰 격려가 됩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부유하셨습니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지니셨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발적인 의지의 행동으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영원 세계 속에서의 모습에 비할 때 그분은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도 그분은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궁핍이나 부유한 환경이 아니라 나사렛의 비천한 환경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분의 드림(giving)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되풀이 될 수 없는 최고의 드림의 행위였으며, 갈보리에서 우리는 최고의 희생을 봅니다. 만일 그분이 값없이 자신을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구속 밑바탕에는 드림이 있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면 이러한 본을 좇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8,9장은 헌금에 대해 몇 가지 합당한 조언을 줍니다.

 

1. 결심과 행동은 같이 가야 한다(8:11)

종종 우리는 드리려는 마음은 있지만 그 목적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과연 드릴 수 있는지, 혹은 드리려는 결단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인지 몰라 주저하곤 합니다. 오래 기다릴수록 결심한 것을 드릴 가능성은 희박해집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드리고픈 소원을 주셨으면 지체하지 말고 실천에 옮기십시오.

 

2. 당신에게 있는 것에서 드리라(8:12).

드리고픈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 능력 이상을 드리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필요를 보고 우리의 기여가 너무 적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드리는 일을 중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충당해야 할 필요에 따라 측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유에 따라 측정됩니다. 중요한 요소는 먼저 드릴 마음이 있느냐입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우리에게 주지 않은 것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기를 기대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더라도 당신이 가진 것에서 드리십시오. 과부의 두 렙돈이 어떤 이들에게는 심히 하찮케 보였지만 그 참 가치가 하늘에 기록되었습니다.

 

3. 평균케 하기 위해 드리라(8:14,15).

바울의 권면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짐을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부족하지 많은 사람들이 부족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었습니다. 필요를 공급한 사람들이 나중에 궁핍하게 될 때 이제는 전에 그들로부터 필요를 공급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경험케 됩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는 예루살렘이 궁핍했으나. 후에는 고린도가 궁핍할 수 있었습니다. 이 또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증거가 아닐까요?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면 우리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드리기를 주저해야 할까요?

 

4. 합당한 태도로 드리라(9:6,7).

인색함으로 하지 말고 너그러이 해야 합니다! 만일 농부가 인색하게 심는다면 풍성한 결실을 거두지 못할 것이나, 넉넉하게 심는다면 넘치는 결실을 거두게 됩니다. 우리의 드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최소한을 드리는 것이 아닌 풍성히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농부는 파종을 넘어 추수를 바라보고 또 그 파종과 추수의 관계를 잘 아는 까닭에 파종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처음 드리는 행동 너머로 추수 날을 바라봅니다. 당신의 상황을 바라보고 당신이 얼마나 드릴 것이 적은지, 혹은 그 상황에서 받을 수 있는 최소량이 얼마인지 결정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열린 마음으로, 너그러운 심령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접근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허락하신, 베풀고자 하는 소원을 축복하실 것입니다. 인색한 마음과 협소한 전망은 신자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드리지 말고 마음을 정하고 드려야 합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를 주신대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으며. 이제는 마음에 정한대로 드려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드리기를 원하시는지 그분 앞에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약속을 하고 그것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헌금은 별 생각 없이, 별 기도하는 마음 없이 무심코 행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인색함으로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드리기를 기대하십니다. 인색하게 드리는 자는 자기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 돈으로 다른 것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헌금으로 가난하게 되었다고 아쉬워합니다 그는 자원하는 마음이 아닌 의무감에서 드립니다. 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그에게는 얼마나 슬픈 길인지요. 그러나 즐거이 드리는 자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줄 알고, 정한 것을 아낌없이 드립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드리는 자인지요! 사도행전 4장에서 바나바가 보여준 본을 보십시오. 그는 땅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가져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데는 두 구절로 족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정했고 즉시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얼마나 다른지요. 그들은 희생 없이 사람들의 인정받기를 원했으며, 그들의 결국은 얼마나 슬픈지요.

 

5. 누가 유익을 얻는지 이해하고 드리라(9:8~15).

우리는 선물을 받는 사람들이 그 헌신의 행위의 우선적인 수혜자로 언급될 줄로 기대할 만하나, 그러나 본문을 보십시오! 우리는 6절에서 심는 자가 거둔다는 것을, 그리고 8절에서 주는 자가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도록 모든 일에 모든 것을 넉넉하게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우선적인 수혜자는 당연히 혜택을 받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얼마나 기이한지요.

동일한 원리를 빌립보서 4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는 19절 약속을 의지하지만, 그러나 그 아름다운 약속의 배경은 종종 잊습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두 번 이상 바울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로마에 도착한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주었습니다. 그들의 풍성한 선물을 받은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너그러운 연보에 크게 감동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한 놀라운 약속을 의지할 수 있으려면 동일한 조건을 충족시키고 그들처럼 너그러이 드려야 합니다.

 

6. 그것이 가져오는 결과를 알고 드리라(9:11~15).

직접적인 결과는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가 어느 정도 채워졌다는 것이었으나, 그보다 한 단계 높은 결과는 그들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손길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런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에서, 최고의 선물, 말할 수 없는 선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물, 측량할 수 없는 선물을 받았다는 감사가 흘러 넘침으로써 가능합니다.

우리의 드림의 결과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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