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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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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퇴보는?

사도 바울이 이 땅의 수고를 마칠 즈음에 로마에서, 성경에 기록된 가장 슬픈 고별(告別) 중 하나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동역자였던 데마가 로마에 있는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갈 뜻을 비쳤습니다. 우리는 왜 그가 거기로 가는지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사도 바울은 데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데마로 하여금 사도 바울 곁을 떠나게 한 것이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슬프게도 우리가 데마를 본 마지막 모습은, 아마도 세상 쾌락의 길로 가기 위해, 사역의 길을 떠나는 자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인 열망이 식어진 때를 회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되돌아간 자(a backslider)는 세상과 짝하여 자기 길을 가기 위해 주님을 섬기는 삶에서 의도적으로 등을 돌리는 자입니다. 되돌아간 자는 세상의 사고방식대로 생각하고 결국 세상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신자를 가리킵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자 중 어떤 이들은 지역교회의 교제를 떠나가지만, 어떤 이들은 세상과 교회에 양 다리를 걸치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매우 슬픈 상태이기에, 우리는 그 원인이 무엇이며, 과연 그런 자가 다시 회복되어 주님 일에 예전같이 쓰임받을 수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탕자는 종종 복음메시지에서 죄인의 비유로 인용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다가 그분에게서 등을 돌린 자에 대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데마의 경우처럼, 그 둘째 아들을 방황하게 만든 것은 먼 나라의 유혹, 세상의 유혹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린 신자들의 삶에 퇴보를 가져오는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무엇인지 잘 보여줍니다. 세상은 매력적으로 보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것 저것 제한이 많아 보이기에 우리는 주변의 쾌락을 좇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왕궁에서 말년을 보냈습니다(왕하 8:1~6). 그러나 어떤 대가를 치른 후였는지요! 그가 길을 돌이킨 것은 돈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얻기 위해 간증을 무너뜨리고 그 자신과 그의 가족을 문둥병의 저주에 빠트렸습니다. 이 물질만능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경종이 되지 않나요?

롯은 물이 넉넉한 요단 평지를 바라보고 나그네의 길보다는 안락한 생활을 택했습니다. 지금도 어떤 이들은 롯의 자취를 좇아, 사역이 힘들면 등을 돌리고 떠납니다.

엘리멜렉은 기근을 만나자 가족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퇴보의 길에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갈 수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삼손은 불경건한 여인의 유혹에 굴복하여 하나님을 위한 능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오늘날도 사단의 방법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매력, 돈에 대한 사랑, 안락한 삶에의 유혹, 고된 사역, 구원받지 않은 여인의 아름다움, 영적인 둔감함 등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옛 길로 돌이키게 합니다. 그런 상태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그 책임을 다른 이들 탓으로 돌립니다. 실은, 다른이들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훌륭한 사람과 같이 있다고 해서 그런 문제에서 자동적으로 면제되는게 아닙니다. 데마는 사도 바울 곁에 있었고, 게하시는 엘리사 곁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들 결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을 곁에 둘 수 있을까요?

그러면 우리가 그처럼 곁길로 가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씨앗이 뿌려진 것은 그것이 자라서 눈에 띠기 훨씬 이전입니다. 퇴보는 우선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질병이 그렇듯이 얼마간은 그 징후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집회에는 나가지만 관심은 다른 데 있습니다. 수양회 자리에 앉아있지만 마음은 먼데 있습니다. 떡을 떼는데 참여는 하지만 아무 새로운 감동 없이 구태의연하고 진부합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과 성도들은 잘 몰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잘 압니다. 혹시 당신의 마음에 퇴보의 초기 증상이 감지되지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어가서, 왜 우리의 영적인 일에 대한 관심이 감소되고 사단으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 다른 관심거리들을 집어넣게 허용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봅시다. 분명 주된 이유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늘 사귐 가운데 있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주신 자원들을 통해 곁길로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본요소들에 충실한다면, 우리의 삶이 세상에서 발견하는 어떤 것보다 매력적이고 또 만족스럽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자기를 거절하는 자들이 경험하는 삶보다 덜 매력적이고 덜 기쁘고 덜 만족스런 삶을 주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분은 믿는 자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셨으며, 이제 그것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믿는 자의 책임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런 슬픈 상태에 있다면, 혹 다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조바심 날 수 있습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오고, 나오미가 모압에서 돌아온 사실에서 용기를 얻으십시오. 그처럼 회복이 가능합니다만, 그러나 당신이 회복으로 이끄는 길로 발걸음을 내딛어야만 합니다. 그 가련한 탕자는 돼지들 중에 앉아 자기 죄를 자복하고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결연히 말했습니다. 나오미에 대해서도 롯기 1장에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 땅에 나가 사는 동안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일들이 새로 생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가기로 단호히 결심하지 않으면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기쁨을 다시는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런 단계를 밟지 않는다면 앞날은 밝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제자의 길에서 돌아선 다음 정말 가치 있는 일에 형통한 사람의 예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은 종종 이상합니다만, 그러나 그 방법은 항상 그분의 말씀과 일치를 이룹니다. 당신은 스스로 예외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자신의 삶을 잘 관리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신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행복과 기쁨과 만족과 그리고 소유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경고의 말을 명심하십시오.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혹 마음을 다른 데 두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너무 늦기 전에 단호한 결정을 내리십시오. 당신은 혹 퇴보자의 길을 저만치 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돌이키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당신의 상태를 자백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인생은 너무 짧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쉬 지나가기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그분의 인정을 받을만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삶을 사느라 우리의 생애를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과, 동료 신자들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 앞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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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