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2. 9. 22. 12:07 횃불/1980년

오늘날의 방언(4)

방언의 사용

성경은 우리에게 방언을 사용한 중요한 세 가지 목적을 가르쳐 줍니다.

(1) 고린도전서 14 22절은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보통 이교도들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믿지 않았던 이스라엘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성경은 명백하게 방언의 가치는 믿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순절날 베드로는 군중들에게 방언을 하는 자신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선지자 요엘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라고 예언했습니다.

히브리서 2 3,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큰 구원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오순절날 표적이 일어난 목적이 사도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진정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에 관한 바울의 기록을 고린도후서 12 1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다시 한번 여기서 표적은 믿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또다시 바울은 고린도전서 1 22절에서 명백하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은 유대인들에게 장차 오실 메시야와 하나님의 사자들은 어떤 표적들을 행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러한 표적들은 그리스도는 참으로 메시야이며 사도들은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듭거듭 그의 청중(믿지 않는 자)들에게 자신은 구약성경에서 메시야가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사역을 행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순절날 표적을 행한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표적은 항상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2) 방언을 사용한 두번째 목적은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어떤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순절날 사람들은 놀라고 기이히 여겨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2:8) 그들은 열 두 나라나 열 세 나라에서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 말함을 듣는도다”( 2:11).

군중들 중 얼마는 메시지에 흥미를 느꼈겠지만 대부분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별로 배운 것이 없는 갈릴리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으며 놀라운 표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에 모였던 사람들은 열 둘 이상 되는 나라에서 왔지만 그들 각인들은 자기 나라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전했던 사도들은 결코 전에 그 언어를 지도 못했고 공부한 적도 없었습니다. 군중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들은 그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변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고전 14:6)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두 구절을 통하여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악기를 예로 들어 말했습니다.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고전 14:7,8) 명백하게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방언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메시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만난 사람이 외국인일 때 자신의 말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또 상대방이 하는 말을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면 아무 것도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고린도 성도 중 몇 명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자에게 표적으로써, 또한 믿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성도들은 그들의 은사를 자랑했으며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날카롭게 고린도 성도들에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언을 말하는 것은 무익하고 쓸데없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고절을 보면 그들이 방언을 마치 미친사람처럼 말한 것 같으며 아무도 그 방언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방언은 듣는 사람들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바울이 고린도전서 14 2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방언 하는 자가 하나님께 방언을 한다면 하나님은 이해하십니다. 또한 방언 하는 자신은 이해할지 모르나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3) 방언을 말하는 세번째 목적은 믿는 자들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오순절날 방언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을 믿었으며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이 매일 그들에게 더해졌습니다.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배우는 일에 많은 시간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형성의 완전한 모형입니다. 고린도전서 14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주장합니다. 참석한 사람 중에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언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수년 후 바울은 에베소에 보낸 서신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세우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4:1114). 고린도 성도들은 방언을 더 이상 누구에게도 유익을 끼치지 못한, 다만 자신의 유익과 과시를 위해서만 사용했으며 바울은 그런 고린도 성도들을 장성하지 못한 어린 아이라고 불렀습니다. 에베소서 말씀을 볼 때 우리는 모든 진정한 은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 이상 어린아이로 있지 않고 영적으로 장성하도록 돕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원칙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성도들은 은사를 다른 목적에 사용함으로써 영적으로 어린 아이였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실패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실패한 것을 다음 세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표적-방언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표적이 될 수 없었습니다.

(2) 전달-방언을 통해 전달된 메시지가 없었습니다.

(3) 세움-방언을 알지 못했고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를 세울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날 참석한 많은 사람들에게 방언으로 말함으로 놀라운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베드로는 증거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의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통하여만 구원에 이르고 자라게 된다고 했습니다(벧전 2:2). 오늘날에 사는 우리도 위 세가지 면을 시험해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세가지 원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방언은 그리스도인이 받아야 할 가장 큰 은사가 아니며 그보다 우리에게 사모해야 할 더 큰 은사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특별히 예언하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고전 14:1,39), 여기서 초기에도 방언보다 나은 은사가 있었지만

고린도 성도들의 대부분에게는 그러한 은사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반대 이유들에 대한 변증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펴본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고린도전서 14 39절에서 바울 자신이 방언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방언은 은사 가운데 하나였으며 성도들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법대로 바르게 사용했다면 틀림없이 유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은 항상 주어지는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이 문제는 후에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이유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4 5절에서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살펴보았습니다. 방언은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한다면 교회를 세우는 유용한 표적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외국어를 배웁니다. 방언의 은사를 가지고 실제적으로 신령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필자는 서부 유럽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 백명을 만났습니다. 방언을 하는 미국 사람은 저에게 자신이 하는 방언이 자신이 일하고 살았던 그 어느 나라에서도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상 그들 중 몇몇은 저에게 다른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 언어를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언어를 배우기란 상당히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또 한가지 이유로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4 18절에서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방언은 바울이 전도여행 당시에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용되었으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수많은 나라를 방문했던 바울보다 방언을 더 많이 사용할 가치를 가졌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에 있어서 그가 기적적으로 방언을 말하게 되었든지 아니면 그 자신이 배운 외국어였든지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두가지 다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방언을 할 때 고린도 성도들과 같은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4 19절에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성경에 관해 가르치는 것이 방언을 말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랑을 구하라

이제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으로 가서 방언을,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랑과 연관해서 성령님의 감동함으로 기록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이 단순히 사랑에 관해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은사들의 사용을 사랑과 연관해서 가르쳐 주시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은사 중에 제일은 사랑이며(고전 12:31)또한 사랑은 하나님의 은사들을 측정해 볼 수 있는 유일한 저울입니다.

1절은, 열심을 가지고 행한 가장 좋은 은사들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묘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인간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랑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방언을 사용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방언을 말한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방언은 무익했습니다.

 

 (1980 12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