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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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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0. 3. 13:15 횃불/1982년

애굽에서 가나안까지(8)

기념 절기

-. 리치-

이스라엘이 구원받던 밤에 제정된 절기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지키도록 되었다. 그들은 죽음을 당한 어린 양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을 기념하도록 되었던 것이다. 광야를 지난 후 그 여행자의 무리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정착하고 나서도 이 기념절기는 지켜졌다. 의심할 바 없이 (모든 모형들이 그러하듯이) 그것은 갈보리를 가리키며, 과거의 구속 또는 구원의 기념이기도 하였다.

유월절이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면 주의 만찬은 여러면에서 현재의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된다. 물론 거기에는 마치 은혜와 율법과의 관계처럼 또한 기독교와 유대교의 관계처럼 대조되는 점들이 많이 있다.

유월절은 지상 백성의 구원에 관한 기념이고 주의 만찬은 하늘 백성의 부르심과 구속을 기념한다. 유월절은 육신의 할례를 받은 민족을 위한 절기 이고 주의 만찬은 육신에 대하여 죽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들을 위하여 있다. 성경 안에서 보여진 바로서 유월절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의해야 할 세 가지 점이 있다.

첫째, 여호와에 의하여 세워졌고 이를 준행함으로써 그분의 백성은 그분께 대한 순종을 표한다.

둘째, 마귀가 하나님의 유월절을 모방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그 덫에 치이게 되었다.

셋째, 그분의 백성들의 깨달음과 충성의 척도에 따라 각 단계에서 여호와의 절기가 회복되어야 한다.

 

1. 여호와의 유월절

그것은 주의 유월절이었다( 12:11).

그것은 여호와의 절기였다( 23:3).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으로 인도받아야 했다. 그분의 명령만을 복종해야 했다. 그것은 영원토록 이스라엘의 자손들에 의하여 변개함 없이 지켜져야 했다.

신약의 절기는 주의 만찬이다. 그것은 신자 자신의 만찬도 아니요 교회의 만찬도 아니다. 또한 그들의 목소리를 청종해야 하거나 그들의 지시를 따라야 되는 것도 아니다. 이제 주와 그리스도이신 그분의 만찬이기 때문에 충성된 마음은 그분의 뜻에 부복해야 하며, 그러므로 다른 어떤 권위도 인정할 수 없다. 누가 사람에게 주님의 것을 참견할 권리를 주셨는가? 그분이 인간의 뜻으로 된 쓸데 없는 간섭을 떠나 자신의 상을 베푸시며 자신의 집을 다스리실 수 없으시겠는가? 우리는 그분이 하실 수 있다고 확실히 믿는다.

 

주님의 지상 생활 기간에 유월절은 단순한 종교적 형태로 전락되어 있었다. 인간의 유전들은 주의 명령을 제쳐놓았고, 전적으로 그 특성을 상실했다. 이에 관해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유윌절이라 부르셨고 또한 유대인의 절기라고도 하셨다( 2:13, 5:1). 그것은 더 이상 여호와의 절기가 되지 못했고 주의 유월절도 될 수 없었다. 여호와께서는 가짜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동일시 하지 않으실 것이며, 또한 인치지 않으실 것이다

 

성도들은 여기에서 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성도들이 한 상에 둘러 앉아 떡을 떼며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 그들은 예식을 지키고 주의 이름으로 그것을 부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의 유전, 상에서의 인간적인 규율과 통제 때문에 이것이 주의만찬이 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분의 말씀만이 유일한 권위로 인정되는 곳에서만 주의 만찬은 바르게 이행될 수 있다.

 

그것은 주의 백성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12:47).

단지 어쩌다가 몇 명만이 민수기 9 6절처럼 더럽혀졌다. 만일 한 이스라엘인이 절기 지키는 일에 등한히 할 때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도록되어 있었다( 9:13). 절기 지키는 일을 등한히 하는 것은 부정하게, 혹은 누룩넣어 지키는 것과 같이 되어 여호와께 기쁨을 드리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도 요구되는 사실이다. 주의 만찬에 대한 태만이 누구에게든지 묵인되므로, 시시한 핑계로 수 주간 또는 수 개월간 주의 상에 불참한 신자가 언제라도 그가 원하기만 하면 책망을 받지도 않고 상에 참석하도록 허용되고 있다.

그림자와 같은 시대에 세상의 성소에서도 그의 절기를 지킴에 있어서 경외와 복종이, 분명히 주의 구속받은 자에게 요구되었거든 하물며 오늘날 성도들이 성령의 임재의 및 가운데 모인, 주 되신 예수께서 함께 계신 그곳에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외부의 사악과 접촉하여 더럽혀졌거나 혹은 내적으로 육신을 더러운데 내어줌으로 더럽혀진 신자는 그런 상태로 주의 상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고린도 교회의 몇몇은 분명히 그랬기 때문에 주께서 그들을 약하게 함으로, 질병으로, 죽음으로 그들을 심판하셨다(고전 11:29,30).

그러나 더러워진 자들을 위하여 한 은혜로운 배려가 이루어졌다. 시신을 접촉하여 더럽혀진 백성을 위하여 정결케 하는 물이 있었으며 (민수기 9장과 19장을 보라) 또한 현세의 성도들을 위하여는 자기 판단과 자백이 있다(요일 1:8,9).

 

그것은 이방인이나 고용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12:45).

주의 만찬은 구원받지 않은, 그의 상태가 외인과 손님일 때에는 참여할 수가 없다( 2:19). 주님께서 이 예식을 세우셨을 때 구원받지 않은 자가 없었다. 가롯유다는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나갔고(마태복음 26장과 요한복음 13장을 비교하라),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아도 제자들이 떡 떼기를 계속했다고 했으나 그 나머지(구원받지 않은 자)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되어 있다( 2:42, 5:13).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구원받지 못한 교인들이 마치 시장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듯이 성찬에서 자기 자리를 청하며 기독교계 대부분의 교회나 교회당에서까지도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구원 얻을 것을 기대하며, 또는 이 은혜의 예식에 의해서 어떻게든 천국 갈 준비를 하느라고 성찬에 모여들고 있다. 세칭 교회의 많은 목사들이나 임원들도 성찬에 처음 참여하는 자들에게 거듭난 일이 있는지를 묻기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도 정말 고용된 일꾼들이며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다고 약속하신 구원을 벌어서 얻으려고 열심히 일하는 불쌍한 영혼들로서 오히려 이런 성찬에로의 참여는 그들을 결국 슬픈 기만에 빠지도록 만들고 있다. 어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가짜와 혼합되머 그것을 후원하고 지지함으로 오히려 영혼들의 멸망을 돕고 있다.

 

절기는 주님이 지정하신 장소에서 지키도록 되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도착했을 때에 주께서 자기 이름을 두실 한 장소를 택하셨다 그곳으로 예배자들은 그들의 예물을 가져오도록 되었고( 12:14), 또한 거기서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도록 되었다( 16:5,6). 선택된 도시는 예루살렘이었다. 거기서 절기를 지켰으니, 거기에 주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셨기 때문이다(대하 6:5,6). 그곳으로 지파들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전례 대로 예배를 드렸다( 122:4).

매년 첫 달의 십사일에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그들의 집으로부터 나와서 기념제를 지키려고 큰 왕의 도성에 함께 모이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이는 여호와께 대한 참 마음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요구하시며 떠나셨던 주님의 분부에 순종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서 거기에서 주의 만찬을 먹었던 초대 제자들의 이야기는 구약의 그 사실을 능가하고 있다.

오직 한 가지 중요한 요점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며, 또한 한 가지 절기는 주의 만찬이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있었다( 2:44). 거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종파나 경쟁적인 교회들이 없었다. 성도들은 한 마음과 한 영혼이었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전체를 감화시켰다.

 

2. 절기를 지킬 시기

일년에 한번, 첫 달의 십사일에 절기를 지키도록 하나님께서 정하셨다. 한 해에 두번 지키는 것이나 두 해에 한번 지키는 것은 불순종과 같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는 것이 순종이며 그 외의 것은 순종이 아니다.

만찬과 연결된 말씀은 너희가 이를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너희가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자주)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이다. 교회는 처음 사랑으로 매 주의 첫날에 예식을 지켰고( 20:7), 이것이 우리의 본이 된다.

일년에 한번 또는 3개월에 한번으로 그분의 죽으심을 자주 나타내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께 대한 마음이 차가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는 오히려 가끔 생각날 때마다란 말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하고 있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보다 온전한 길을 볼 수 있도록 하시길 빌 뿐이다.

예식의 순서로 볼 때는 참석자들, 장소, 시간 등이 모두 주님에 의해 예비되었음을 본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주님의 뜻이 아직도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기뻐하며 또한 기쁨으로 이를 행할 준비를 갖춘다.

 

(1982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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