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2. 11. 6. 12:27 횃불/1985년

보는 눈 말하는 입

 

우리는 모두 불순하고 부도덕적인 문학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를 사나, 눈에 띄고 손에 닿는 것이 음침하고 음란한 책입니다. 소위 사실주의예술이라는 것이 예술적인 예술(arty art)이라는 미명하에 판을 치고 있습니다. 큰 서점이나 작은 서점이나 잡지 진열대에는 대화체로 섹스를 소재로 다룬 탐정소설, 연애소설, 색정소설로 가득차 있습니다.

소설 잡지 등 간행물은 부도덕적이고 색정적(色情的)인 글과 사진에 많은 지면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일요신문과 일간신문이 선정적이고 소름 끼치도록 무시무시한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그림과 글을 싣고 있습니다.

현대의 베스트 셀러라는 픽션과 넌픽션(non-fiction)은 몇 십년 전만해도 허용되지 않았을 만큼, 지나치게 선정적인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광고까지도 사람들의 눈을 끌자는 목적에서 섹시한 사진을 싣는 것이 상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건강에 말할 수 없이 해로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세상의 문학가라는 사람들이 내뱉는 배설물에 정신을 팔고 살면서 순결하고 온전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불순물(impurity)을 간교하게 용인하는 요소가 자기 마음 속( 5:1)에 도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의 새 성품(His New Nature)을 주셨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죄된 성품을 멸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주님의 힘을 힘입어 세상의 어떠한 유혹이라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우리의 사고 세계(thought world)에서 보다 이 옛 성품(old Nature)이 더 쉽게 작용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도움( 4:6)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현대문학의 타락상은 우리의 친구들의 생각과 행동과 언어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친구들간에는 믿어지지 않는 괴담을 입으로 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음란한 나체 사진을 돌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 청년 남녀들은 이런 일에 참예하는 것을 지옥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이 생각하고 절대로 참예하는 일이 없습니다.

세상에 우리의 상상의 세계를 이보다 더 못된 곳으로 끌고 갈 것이 무엇이며 이러한 음화(淫畵)에 탐닉하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탄을 당신이 멀리하고 피하는 것처럼 혹시라도 이런 것에 접() 하거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멀리 도망하십시오.

 

이런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적극적인 삶이 있을 뿐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취하십시오. 모든 사람으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를 알려 주십시오. 음화나 나체화 같은 것에 접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런 것에 어울려 함께 즐기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문학(서적)을 많이 읽으십시오. 유익한 서적을 탐식하십시오. 당신의 마음의 스크린을 주 예수그리스도의 사진(picture)에 비추어 촛점을 맞추도록 하십시오. 당신의 눈은 더 이상 당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며 우리를 자기의 귀한 피(고전 6:19,20)로 사신 주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지 마십시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 20:12).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119:18).

 

거듭난 사람의 귀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편만한 모독적인 언사(言辭)에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20:7)는 말에 전면적으로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 불경건하고 모독적인 언사가 마치 교육을 받아보지 못하고 지옥에라도 갔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품게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속지 미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신 그의 계명을 철회했다고 생각지는 마십시오.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심판하실 날( 20:11~15)이 있습니다. 선악에 따라 심판하는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습니다. 불경(不敬)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언사(言辭)는 강한 것의 표시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약함(weakness)과 어리석음(stupidity)의 징조입니다. 담대하게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은 그들의 정신적인 빈곤과 자제(self-control)의 결집을 시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불순하고 불경한 것으로 가득차 있는 그들의 마음을 다른 사람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마음의 커텐을 올리는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입술에 세겹 파숫군이라도( 141:3) 세워서 이 문제로 죄를 범치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외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언사를 쓰는데서 양심에 가책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은 점잖을 빼며 마음 속으로 욕을 했을 경우입니다.

우리들은 툭하면, “제기랄”, “벼락을 맞아라”, “천벌을 받을 놈의 자식”, “개새끼”, “지랄하네”, “나가 뒤져라등 욕지거리를 입에 올리는 사람을 봅니다. 또 우리의 마음 속에도 이런 욕을 입에 담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이런 말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라고 말하는 것이나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허튼 농담(wisecrack)과 속 빈 대답과 속 빈 재치(repartee)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저속하고 세상적인 용어가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어휘가운데 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언어는 항상 건전한 것(sound)이어야 할 것이고( 2:7~8) 은혜로워야 할 것이며, 소금을 친 것과 같이( 4:5) 양념이 맞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은 될대로 되라” “먹고 마시고 취하고 놀자가 아닙니다. 인생은 하나의 심각하고 진지한 사업입니다.

이와 관련시켜서 한 번 우리 주님의 쓰신 언어(speech)( 4:22)를 생각해 봅시다.

주님은 말 한마디 한마디를 헛되이 쓰지 않았습니다. (He made every world count)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두 개의 귀와 한 개의 입을 주셨습니다. 두 개의 입과 한 개의 귀를 만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입술의 키를( 12:1,2) 주님께 넘겨 드린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혀를 헛되이 놀리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당신의 도 주님께 맡기도록 하십시오.

끝으로 야고보서 3 1절부터 12절까지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제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1:26).

 

(1985 9월호)

 

'횃불 > 1985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그리스도인인가?  (0) 2012.11.06
최상의 필요조건  (0) 2012.11.06
사하라의 시내들  (0) 2012.11.06
말합시다  (0) 2012.11.06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0) 2012.11.06
가족훈련  (0) 2012.11.06
그리스도인의 모임(9)  (0) 2012.11.06
해로운 게 뭐가 있어요?  (0) 2012.11.06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