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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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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8. 17:55 횃불/1986년

랍비여, 어디계시오니까?

12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 윌리암 윌리암즈

저의 모든 시간을 주님의 일에 드려야 한다는 확신이 저의 영혼 속에 분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께 드린 것을 증대시키시는 주님의 축복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신 일을 볼 때나 그분을 섬기는 일에 기쁨을 누릴 때 너희의 모든 것을 제단에 내놓지 않으련?” 이라는 생각이 종종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꽤 많은 숫자의 주님의 종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들 중 몇 명은 저에게 온타리오 북부와 프레리즈의 큰 필요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격려했습니다. 그 제안은 저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또 베네주엘라의 큰 필요에 대해서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나라에는 무려 3백만의 로마 카톨릭 교인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현재는 5백만 이상이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하나씩 하나씩 그 나라를 떠나고 있었습니다. 저의 마음은 당연히 캐나다에서 주님을 섬기는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베네주엘라에 관한 생각을 없애버리고 싶었습니다.

베네주엘라는 어렵고 건강치 못한 나라라는 좋지 않은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페어뱅크스의 지배인은 저에게 인디언들이 우리를 잡아 먹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혁명이 연이어 일어났으며, 1908년에는 고메즈 장군이 키프리아노 카스트로를 쫓아냈습니다. 카스트로는 유럽 열강들에게 도전했으며 그래서 그는 푸에르토 카벨로에다 큰 대포를 설치해 놓았었습니다. 그 공화국은 코딜료스(지도자)의 희생물이었습니다. 오늘날과는 달리 그 당시의 베네주엘라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나라는 세계에서 첫째가는 산유국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베네주엘라로 가 있을 때 베네주엘라 S.A.(South America의 약자)”라고 적혀 우리에게 부쳐진 편지들 중의 일부가 남 아프리카(South Africa)로 간 적도 있습니다. 우리가 표를 사기 위해 토론토의 해상 운송업자에게로 갔을 때 그는 베네주엘라의 위치 조차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그 나라로 가는 기선을 찾는 일에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섬김의 메아리란 잡지를 제외하고는 우리 사이에서 유통되는 잡지들 중에서 베네주엘라로부터 온 소식을 찾는 것은 헛된 일이 되였을 것입니다. 그나마 베네주엘라의 첫 글자가 “V”로 시작되기 때문에 그 나라는 그 잡지의 끝에 있는 푸른 페이지 위의 몇 단락 안에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보고할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베네주엘라의 선교사들로부터 받는 편지들은 광신과 핍박 가운데에 있는 오르막길의 어려운 사역에 관한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 사진들에는 반나체의 인디언들이 찍혀 있었으며 어느 모로 보나 베네주엘라 사람들은 원시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우리가 살 집을 짓고 우리가 쓸 가구들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고생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아마도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의 목숨으로 값을 치루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캐나다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과 비교해 볼 때 이와 같은 그림은 험악하기만 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최선의 조언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우리의 속 마음을 조금씩 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으로 가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것에 대해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토론토에 있는 모임들로부터 천거를 받아 외국 선교지로 나간 선교사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브로크 애브뉴모임의 장로 형제님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분들은 기뻐하셨으며 우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는 또 맥클린톡 형제님에게도 말씀 드렸습니다. 그분도 역시 기뻐하셨으며 여러 번 우리한테로 오셔서 힘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알지 못하는 나라로 가는 것과 스페인어를 배우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형제님이 만약 결혼을 안했다면 실수가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안될 것입니다. 하지만 형제님은 아내를 함께 데리고 가 원주민들 사이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윌리암즈 형제님 저는 주님께서 그 모든 일에 함께 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직 형제님을 격려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랑스럽고 귀한 형제님은 끝까지 우리를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살아 생전에 주님께서 그 일을 축복하시고 번창케 하시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와 같은 분이 주임나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리는 몹시 슬펐습니다.

우리는 혹시 실수를 저지르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우리의 속 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로 형제님들한테로가 우리는 아직은 어떤 분명한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과 단지 그 문제로 그분들과 교제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분명히 해 주는 어떤 성경 말씀이나 인상을 얻는 것 같으며 그래서 그 문제는 가부간에 해결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성경 말씀도 없었고 그와 같은 환상도 없었으며 우리의 진로에 관한 어떤 계시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헤아려 보기 위해우리는 기도하며 말씀을 깊이 파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가려 했으며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털어 놓는 것을 듣는 모든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우리를 격려했습니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떠나느냐가 문제였습니다. 저는 스페인어를 시내에서 일 주일에 이틀 밤씩 스페인 출신의 진짜 로마 카톨릭 신자였던 멘도자 씨로부터 배웠습니다. 이것은 곧 많은 가외(加外)의 일이 생겨남을 의미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에게 학생임과 동시에 제 아내에게 선생 노릇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문법과 언어는 전혀 제 성미에 맞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신 해인 1900년도와 그분의 인도를 회고해 보았습니다. 바로 그 해에 저는 고오든 대학 야간 반에서 영문법과 영작문을 공부했었고 프랑스어를 다시 배웠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스페인어를 배울 수 있는 길을 미리 닦아 놓은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멘도자 씨도 저의 진전에 매우 기뻐했습니다.

이 때쯤 고() 죤 크레인 씨가 토론토로 왔습니다. 그는 베네주엘라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집에서 그에게 차를 대접한 후 그와 함께 브로크 애브뉴 집회소에서 열리는 선교사 모임으로 갔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것저것 귀찮을 정도로 질문했지만 그는 말 수가 적었습니다. 선교사 모임으로 가는 길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오늘 밤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지 않게 되기를 바래요. 왜냐하면 보고회에서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 무척 많은 말을 해야만 되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에게 베네주엘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분명히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죤 미첼 형제님이 그 모임에서 말씀을 전할 것이라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저는 만약 미첼 형제님이 그 모임이 끝난 후 저에게 와서 악수를 청하면 그분에게 우리의 관심을 말씀드리겠다고 주님과 일종의 계약을 했습니다. 저는 평소와 같이 집회소 뒷편에서 주님의 백성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 있었습니다. 미첼 형제님은 이 사람 저 사람과 악수를 나누고는 우리가 베네주엘라에 관한 정보를 더 알기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그분은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강단에 서 계실 때 그분은 몸을 꾸부정하게 굽혔기 때문입니다.

저의 가장 큰 두려움 중의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과연 베네주엘라에 있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까?’였습니다. 저는 이론적으로는 주님의 종들이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한 일부 주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1908 9 10, 사랑하는 도날드먼로 형제님이 주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저는 센트럴 집회소에서 열리는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죤 스미스형제님과 커널 비어즈 형제님, R. 텔퍼 형제님이 그 장례식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스미스형제님은 로마서 14:7~9을 읽고 먼로형제님에 대한 애정어린 말투로 그분의 삶의 본질과 경건한 본, 그분이 끼치신 큰 영향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분은 이어 말하기를 이 장례식에서 눈물을 좀 흘리고 이 엄숙한 장면을 금새 잊어 버리기는 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분은 참으로 능력 있게 말씀하셨으며 그분의 말씀은 저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묘소에서는 W. P. 더글라스 형제님이 기도를 했고 T. D. W. 뭐어 형제님이 요한계시록 2장을 읽고 나서 모두 함께 영원히 주님과 함께를 합창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거룩한 삶과 성서적인 가르침으로 주님의 백성들 간에 일어나는 문제와 분열을 방지했던 사랑하는 형제님이자 친구 하나를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캐나다의 가을 오후에 저는 하나님도 여전하시며 하나님의 말씀도 여전하다는 것을 느꼈으며, 나도 분량에 따라 그분이 걸어갔던 길을 좇아 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가 베네주엘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점차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주님의 백성 중에 단 한 명도 우리를 낙담시킨 적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가십시오.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조언의 요지였습니다. 얼마 후 저는 해밀튼 수양회에 참석하여 말씀을 대단히 즐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베스트 형제님 가정에서 있었던 성경 공부를 특히 즐겼는데 거기에서 W. B 죤스튼 형제님이 창세기 50:20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스미스 형제님도 그 수양회에 참석하셨는데 집회가 끝난 후 그분은 저의 팔을 붙잡으시며 잠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 지 예상하고 제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것을 틀림없이 찾아낼 수 있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형제님이 베네주엘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고 들었어요저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분은 자세한 말을 듣고 나서 뭐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믿는 자는 급절(急切)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미스 형제님은 제가 온타리오에 남아서 수고하기를 바라는 사람들 중의 한분이었습니다. 그 노병(老兵)들 중에는 선교사와 선교사의 수고를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그분들 나름대로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토론토를 방문했던 일부 선교사들 중에는 혼합된 원칙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이 신뢰했던 한 사람은 가짜로 드러났습니다. 다른 선교사 한 명은 보고를 하고 그분들의 교제를 받아들인 후 그분들이 교제를 갖지 않는 곳으로 가 버렸습니다. 또 한 사람은 와서 성서적인 선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선교지에서는 그가 프록 코우트(frock coat)와 실크 햇(silk hat)1)을 쓰고 교파들의 연례 집회에 관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미스 형제님도 다른 형제님들처럼 제가 외국 선교지에서 몇 년만 생활하면 지각과 확신이 무디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들은 순수한 성품을 가진 분들이었으며 표리부동을 혐오했습니다. 그분들은 일시적인 바람을 붙잡으려고 돛을 올리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사도 바울이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대로 행동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든 선교사들이 혼합된 원칙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들은 선교사의 지위를 떨어뜨리며 선교지에서나 본국에서 문제를 야기시키기 때문입니다.

1) 프록코우트와 실크 햇-옛날에 남자들이 착용하던 값비싼 의복

 

(1986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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