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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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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18. 17:54 횃불/1986년

부서진 사역자

이춘원

얼마 전에 소천(召天)하신 성도님 한 분이 살아 계실 때 필자에게 뜻 깊은 교훈이 담긴 장문의 편지 한 통을 남기셨습니다.

 

이 형제에게 :

····소제(少弟)는 이제 나이 늙어 거의 매일같이 자리에만 누워 있습니다. 주님의 크신 은혜로 인하여 이렇게 한 평생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을 기쁘게 뵈올 날이 며칠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사이 소제가 하는 일은 기도를 드리는 것과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오늘은 새벽 3부터 눈이 뜨여 잠시 기도를 드린 후 이렇게 이 형제에게 서신 교제를 하게 되었답니다. 내 현재의 건강상 형편으로 보아 아마 이것이 마지막 편지가 될 것 같은 예감이 자꾸 드는군요. 이 서신이 유언이라면 좀 지나친 것 같고 형제에게 주는 교훈이라면 너무 내 자신이 교만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마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진리의 말씀 안에서 솔직히 쓰고 싶을 뿐 입니다. 혹시 이것의 표현이 너무 지나칠 경우에는 저의 교만심의 발동이라고 여기고 깊이 관용해 주십시오. 한 마리의 벌레 같은 인생이 마지막 순간에 꿈틀거리는 것으로 간주하시고 제발 밟지만 않으신다면 제 마지막 소리를 다 하고픈 것이 이 늙은이의 소원이랍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이 미충이를 받아 주십시오.

이미 서두에서 교만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주님을 섬기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만심이 없는 인격(人格)이랍니다. 우리 주님은 교만심 특히 자기 과신과 자기 자랑과 자기 계획에 빠진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없이 일방적으로 자기 지식과 자기 재물을 가지고 무슨 큰 업적을 남기려는 사람은 그 결과가 허무하게 끝납니다. 이미 주님의 부르심이 있었지만 그 소리를 못 들은 채 하거나, 아니 소명(召命)을 받았을지라도 항상 낮아져 겸손히 주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큰 교만입니다. 항상 형제 자매들 위에서 교회를 내려다보지 말고 그 아래서 성도님들을 우러러 보십시오. 설교보다는 말씀이 좋고, 말씀보다는 산 간증이 나으며. 간증보다는 모범이 더 훌륭한 것이고, 모범보다는 회개와 뜨거운 눈물과 두 무릎을 꿇는 것이 더 아름답습니다.

성경에 나온 참 일군상은 지도자가 아니라 인도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7,17,24). 목사보다는 목자가 더 부드럽고 사랑과 겸손이 넘칩니다. 선생보다는 제자의 도()가 더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모임에 갔더니 장로 일을 하시는 형제들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더군요. 장로 형제들이 없는 것이 아니라 형제 자매들 속에 있고, 뒤에 있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랍니다. 교회를 돌보는 형제 인도자들이 다 날개를 가지고 있고 그 날개로 자기 몸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1:1).

우리 주님께서는 너무나 겸손하셔서 하늘의 보좌와 영광을 버리시고 땅 위 냄새 나는 말구유 위에 태어나셨습니다. 주님은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셨고( 21:5) 극히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11:29). 참 겸손이란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것이고, 남의 종의 종이 되는 것이며, 끝내는 남을 위해 죽기까지 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얻고 이웃의 생명을 윤택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고 그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22:29, 3:34).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히 낮아진 자들을 들어 쓰시고 그에게 존귀와 영예를 주십니다(벧전 5:6, 29:23).

형제여, 형제의 생명은 겸손에 있습니다. 겸손, 겸손. 항상 겸손 하십시오. 주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부서지지 않은 자세에서 사역을 한다는 것은 주님의 계속적인 쓰임을 받을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마음과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집회소와 같은 공적인 장소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골방에서 엎드려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태도입니다. 나 자신의 생각과 이론이 옳은 것처럼 주장하고, 주님보다 항상 먼저 다 꾸며놓고 난 후 일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 드리는 것은 무례한 일이고 방자히 행하는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신뢰하십시오. 전부를 주께 의탁하십시오. 인간의 근심 걱정과 조급한 행동은 아직도 주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타신 배가 제아무리 큰 풍랑이 일어난다고 해서 뒤집힐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주님을 붙잡지 못한, 아니 주님께 붙잡히지 못한 제자들은 물에 빠져 죽을까 봐 아우성을 쳤던 것입니다( 8:23~27).

제자들은 그때까지도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와 그 체험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깊은 고민 중에 드렸던 기도의 의미( 22:44). 곧 육체에 계실 때에 죽음을 앞에 놓고 하나님과 사람과 자신 앞에서 버림을 받게 되었을 때의 심한 통곡과 눈물의 영적인 깊이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5:7). 그러나 일찍이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큰 근심과 간구 중에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길 수 있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32:22~30).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 육신의 온갖 정욕 문제 때문에 몸부림치며 울부짖던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완전 속죄의 믿음 곧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신을 완전히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7:18~8:2).

형제여, 아담의 범죄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대죄와, 아니 한국민과 한국 교회의 죄악까지도 형제의 몸에 짊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형제는 사역의 사명을 다 완수할 수 없습니다. 형제의 눈물과 기도와 상심은 좋은 믿음의 자세이지만 형제의 무관심과 후퇴와 원망과 불평과 나약은 결코 좋은 것이 못됩니다. 형제여, 형제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아니 자기자신 앞에서까지 낮아져 부서진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부서져 내려 가십시오.

한 알의 밀이 당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부서지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12:24). 고운 가루가 되지 않으면 소제의 예물로 여호와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 고운 가루가 되기 위해서는 밀이 깨지고 터지고 부서져 내려 모일 때 아주 세미한 가루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도 한 여자가 힘을 다하여 매우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부서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음으로 주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할 수 있었고 또 썩지 않는 존귀와 온전한 경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부서졌으며) 모든 뼈가 어그러졌으며(부서졌으며) 마음은 촛밀 같이 속에서 녹았으며(부서졌으며)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이 부서졌으며 끝내는 사망의 진토에 부서져 내려갔습니다( 22:14,15).

이렇게 주님의 몸과 마음과 영이 모두 만신창이처럼 터지고 부서져 내려 죽으셔서 땅에 장사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부활하실 수 있었고 결국에는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형제여, 이 늙은 종은 노병(老病)으로 인하여 계속 작게 꼬부라지고 모든게 약해지고 이젠 부서져 내리는 죽음을 체험해야 될 순간에 다달았습니다. 물론 내 영은 죽음 너머에 펼쳐질 하늘 나라와 영생의 소망을 인하여, 주님을 친히 뵐 것을 생각하니 한없이 기쁩니다. 그러나 한편 몸과 혼은 심히 아프고 괴롭습니다. 깨지고 터지며 부서져 내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마지막으로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항상 낮은 곳으로 내려 가십시오. 주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상심한 자세로, 허심탄회한 자세로, 겸손한 자세로 매일 매시간 주님 앞에 엎드리싶시오. 그럼 형제는 곧 부서지는 경험, 무너져 내리는 경험, 깨끗이 씻어지는 경험, 아주 평안히 새로워지는 경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듯이 자신이 매일 부서져 죽는 믿음이 없으면 매일 살아 움직이는 영적인 역사도 없습니다. 형제여, 이제 나의 죽음은 형제 속에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죽음이 지옥 가는 죽음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것이 부활의 역사로 나타날 때 형제의 믿음과 생각과 인격은 풍성해 질 것입니다. - 형제여, 완전히 죽어 부서져 내리십시오. 그곳에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믿음의 산 역사가 있습니다. 육신이 살아 있는 한,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형제여, 영이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육과 육신은 완전히 죽고 부서져 내려야만 합니다. 부서진 사람, 부서진 형제자매, 부서진 사역자가 아니면 결코 영적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형제여, 이제 나는 마음과 영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이렇게 깨져 부서져 내려가고 있습니다. - 이제 나는 떠납니다. 먼저 갑니다. 다시 만납시다. 기쁨으로···· 주님 나라에서····♠

 

(1986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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