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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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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16. 12:50 횃불/1991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6)

그리스도의 신성

-노르만 크로포드 -

 

. 바울 서신서에서

사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처럼 유일신 하나님 중심의 뿌리깊은 종교적, 역사적 배경을 지닌 사람이 한 인간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열정적인 바리새인으로서 랍비 교육에 정통했으며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6:4)라는 고백에 흠뻑 젖어있었습니다. 그가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만유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 9:5)으로 전심으로 접한 일은 적어도 이러한 종교적 배경과는 배치되는 상황입니다.

 

1. 그의 초기 전도

다메섹 도상에서 거꾸러진 사울에게 나는 예수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이 계시는 주여 뉘시오니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그의 눈을 멀게 한 그 빛이 그의 마음을 밝게 했습니다. 오랜 후 그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었다고 써야 했습니다( 3:12). 그는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그것은 대변혁이요 기적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에게 자신이 핍박한 예수님의 신성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면서 그는 내가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 썼습니다(고전 9:1),

그는 즉시로 다메섹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9:20). 우리는 이 선포와 22절에 언급된 유대인의 놀람사이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그의 선포 속에 구약 예언들이 성취되었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들의 율법에 대해 철저히 교육을 받은( 22:3) 덕택에 구약성경에 정통해 있었으며 이제 그러한 거대한 지식의 보고(寶庫)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사도행전에 유일하게 발견되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이 나온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그의 서신을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바울은 주 예수님의 칭호들을,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하는 가운데 아주 조심스럽고 정확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회당의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말했으며( 17:3), 같은 장에서 아덴의 이방 철학자들에게는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17:18).

 

2. 그의 초기 서신

일반적으로 데살로니가서가 바울 서신서 가운데 가장 일찍 씌어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게 서신을 띄웠습니다(살전 1:1). 여기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한 전치사 안에 있는”(in)으로 묶고 있는데 전치사의 반복여부는 중대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1:12, 요일 2:8 참조). 바울은 여기서 지역 교회는 아버지께 대한 똑같은 관계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보다 조금이라도 못한 분이라면 이러한 표현은 신성모독이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끝부분을 보면 아마도 이 사실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표현돼 있습니다. 이것은 두 종류의 은혜가 아닌, 삼위 하나님안에 동격인 두 위()로부터 흘러나오는 한 은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의 모든 서신에 걸쳐 바울은 이러한 아버지와 동등한 위치를 주 예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란 칭호를 사용한 중요한 동기를 간과하고 있는듯 합니다. 고린도인들에게 그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썼습니다(고전 12:3). 이어서 두번째 서신에서 같은 대상에게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을 전파한다고 썼습니다(고후 4:5). 그가 바로 이 서신들에서 세상에는 많은 주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고전 8:5). 그렇다면 이러한 칭호를 그리스도께 사용한데는 얼마나 중대한 의미가 부여되었겠습니까?

신약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성경구절 가운데 하나는 로마서 10 9절입니다. 새로 태어난 신자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데(9), 그분은 동시에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시며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12)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한 증거로 바울은 요엘 2 32절의 누구든지 추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는 말씀에 호소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바울이 밝히고 있는 바, 즉 신약성경에서 그 이름이 예수인 주는 구약성경에서 그 이름이 여호와인 바로 그 주이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언약을 지키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바울이 밝히고 있는 여러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고전 1:31, 고후 3:16, 10:17, 살후 1:9).

이 초기 서신들에는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진술들이 풍부합니다. 구약성경은 삼위 하나님의 연합을 말합니다. 그것은 복수 형태와 관련되어 나타납니다( 1:1,26 ). 신약성경은 그러한 연합 속에서의 삼위 일체를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삼위적인 존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것은 곧 그 삼위 속의 각 위()들의 신성이 증명된 셈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절대 신성을 부인하는 모든 이방 종교가 아울러 삼위일체도 부인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고린도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축도로 끝을 맺는데(고후 13:13) 이를 로마서 8 11, 고린도전서 6 11, 12 3절 등과 비교해 보십시오.

 

3. 후기 옥중 서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바울의 가장 심오한 진술들은 의미심장하게도 이들 후기 서신들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진리가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처음 만난 그날의 그 영광의 광채 속에서 그에게 계시된 진리에 대한 그의 보다 깊은 깨달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구원과 부활의주이며(로마서), 지역 교회의 주라고(고린도전서)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이제 그는 몸(the Body, 몸된 교회를 가리킴 -역주)에 대한 그분의 주되심(에베소서), 끝으로 우주에 대한 그분의 주되심(골로새서)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구세주는 끝이 부러진 다리입니다”(H.C.G. 모울). 옥중 서신 및 목회 서신에서 바울은 성령의 지배를 받아 자신이 이미 가르쳐온, 그리스도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는 진리를 펼쳐 보입니다.

빌립보서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것을 권하는 서신입니다. 이타적인 섬김에 관한 이 매우 실제적인 가르침 속에는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교리 중 하나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는데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영원하고 본질적인 존재(being)를 지니셨기 때문이었습니다( 2:6).

에베소서의 위대한 주제는 모든 하늘 위로 높이 올리우사 우주를 그분의 임재(presence)로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사람과 모든 천사와 모든 세상과 모든 하늘 위에 뛰어나신 그분은 본질상 신성의 충만 그 자체이십니다( 1:23). 바울에 의해서 종종 사용된 이 단어는 완전함 혹은 총합(總合)을 의미합니다. 문자적으로 바울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총합(‘플레로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한 골로새서 말씀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2:9),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계시되지 않은 삼위 하나님의 영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표한다는 것은 정도 차이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가령 주한(駐韓) 미국 대사는 한국에서 미국의 관심사를 대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그를 만나보거나 그에게서 미국의 모든 것을 알아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의 완전한 나타남을 보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 바울의 표현의 부분적인 의미입니다( 1:19).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1:19). 이러한 언급들을 비롯한 바울 서신의 보다 많은 언급들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모든 것이 본래 그분 안에 있을진대 어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보다 못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라는 칭호가 제국 종교속에서 종종 표현되곤 했습니다. 가이사를 하나님으로 선언한 자들은 끊임없이 그를 가리켜 주와 구주라고 일컬었습니다. 혹자는 바울은 가이사와 그리스도 사이에 세계의 주권을 둘러싼 싸움이 전개된 것을 보고 담대히 가이사 종교에게 도전을 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한 디도서 2 13절과 같은 표현들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여기에 골로새서 1 16~19절에 대한 J. B. 라이트푸트의 주목할 만한 해설을 인용합니다.

그분의 뛰어남은 절대적이고 우주적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분께 복종합니다. 이 복종은 가장 뛰어난 영물(靈物)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처음이요 마지막이십니다. 중보의 말씀되신 그분을 통해서 세상은 창조되었으며, 그 최종적인 목표인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분 안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만물 이전에 선재(先在)해 계시며 스스로 존재해 계십니다. 그리고 결속해 주고 지지해 주는 능력되신 그분 안에서 우주는 형태를 유지하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진리는 바울에게 있어 차가운 논리나 교리를 훨씬 뛰어 넘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자원하여 속박된 노예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나의 주라고 부른 그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에 대해 어떠한 고백을 하고 있는지요?

-다음 호에 계속-

 

(1991 12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