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Recent Post

theWord Bible Software

Category

2013. 8. 15. 10:18 횃불/1994년

새 삶을 사는 지혜

이 춘 원

옛 친구의 종말

누구나 다 사람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삶의 긍정적인 면과 선한 면에서만 아니라 부정적인 면과 악한 면에서도 자기 나름대로 새 것을 계속 추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년 가을에 필자는 서울 김포공항에서 나오다가 옛 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거의 30년만에 갑자기 상봉하게 되니 서로 무척 반가웠습니다. 잠시 서로를 확인한 후 또 서로에 관하여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몹시 궁금하여 회포도 풀 겸 친구의 강권대로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옛 친구의 집은 강남 서초동 지역에 있었습니다. 첫눈에 어림잡아 보니 약 이백평의 대지 위에 연건평 백오십평이나 돼 보이는 2층 현대 양옥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넓고 시원하고 멋지고 웅장한 저택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옛 친구와 나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서로가 한 대학 동기동창이고 나이도 어느덧 반백이 넘은 동감내기인 데다가 키까지 엇비슷했지만 현재의 삶의 모습과 정신적인 이상과 나아가는 길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 친구와 나는 각각 서울과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 그의 부친은 지금 어느 절의 주지 스님이시고 내 아버지는 비록 돌아가셨으나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는 불교인이고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그 친구는 넓고 편한 새 집에 살지만 나는 지은 지 26년이 넘는 허름한 옛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50평이나 되는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지만 나는 전혀 정원이 없고 담 밑 그늘진 곳에 화초 두세 그루가 빛을 갈망하면서 자라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비단 잉어를 기르는 아담한 연못과 분수대와 사계절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과목들이 찬란한 아침햇살에 눈을 부시게 하지만, 내 집 대문 위와 옥상 위에 벽돌로 작은 화단을 만들고 그곳에 대추나무와 포도나무를 심었다가 다 죽고 지금은 어디서나 잘 사는 무화과나무와 등나무가 겨우 열매를 맺게 될 정도로 자랐습니다.

친구가 현재 살고 있는 도시는 모든 면에 한국 제일을 자랑하는 곳이고 도시 계획이 잘 돼 있으나 내가 사는 이곳은 도시 계획이 실행되지 않아 아직도 소방도로가 안나 있고 비가 많이 오면 하수구 없는 골목의 물이 우리 마당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와 나는 문화 시설과 혜택에 있어서 서로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새로 산지 한 두달도 안된 차를 팔고 비싼 외제 승용차를 굴리고 있고 친구가 안방 침대에 누워서 리모콘을 누르면 차의 엔진이 걸리고 차고 문까지 자동으로 척척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출고한지 7년이나 되는 이곳 저곳이 찌그러지고 녹이 난 12인승 베스타를 굴리고 있고 늦게 귀가할 땐 세울 곳이 없어 대로 변에 불법 주차했다가 이른 아침에 다시 달려나가 골목길 빈 자리로 끌고 들어오고 나가는 번거로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옛 친구는 첫 부인과 이혼한 후 자기보다 열 몇 살 아래인 올드미스를 만나 재혼했다면서 중년에 처녀 장가든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날 이때까지 사랑하는 조강지처와 큰 탈 없이 약 30년 간이나 조용하게 오손 도손 살아오고 있습니다.

친구의 집 대문은 삼중 철제 비밀 잠금 장치와 감시용 카메라까지 있어서 아무나 들어갈 수 없지만 우리 집 대문은 누구나 쉽게 열리게 돼 있습니다.

옛 주인이 파 놓은 지하수가 우리 집에 있기에 수돗물이 안나올 때는 이웃들이 와서 물을 길어가고 또 옥상에 설치한 작은 화단과 헌 사과 궤짝에서 핀 꽃들과 채소와 가지와 들깨 잎과 오이와 토마토가 온 가족과 이웃들에게 기쁨이 되고 정겨운 나눔이 되고 있습니다. 비록 작은 한 두 개의 열매를 나누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세상 친구는 거듭나지 않은 종교인이고 나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육신의 방법과 조건과 형편에 따라 그렇게도 살고 이렇게도 살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누구를 위하여 가치있게 쓰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끝내 복음을 거절하고 쉬지 않는 이 세상 육신의 욕심을 더욱 더 채우다가 이번 개혁 바람에 걸려 제주도와 경기 이천과 용인 지역에다가 투기한 수십만 평의 토지와 별장들이 묶이고 엄청난 세금과 벌금에다가 불경기로 인한 매매 부진으로 인하여 얼굴이 사색이 되어 방황하다가 결국에는 득병하여 입원 중에 졸지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육십도 안 된 나이에 그렇게 갑자기 죽다니····구원도 안 받고····

옛 친구를 생각만 해도 가습이 몹시 아파옵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한다”( 11:28)는 주님의 말씀이 내게 큰 교훈이 됩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22:1).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23:5).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5:13).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 6:7~12).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이웃에게 있습니다.

 

호텔에 모셔진 돼지

개는 집 밖에서 사는 동물입니다만 언제부터인가 개라는 동물이 가축이 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애완용이 되어 가족들과 함께 집 안에서 살게 되었고 어떤 가정에서는 한 이불 속에서 애지중지 하다못해 외출 시에는 가슴 속에 품고 다니는 경우까지 생겼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고급 요리(먹이)가 개에게 주워지고 고급 의류와 신발과 머리 리본과 온갖 장신구로 단장이 되고 죽은 후에는 호화 묘지에 안장이 되고 해마다 달마다 추도 기념일이 지켜지고 화환이 증정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영혼 없는 개 동물이 사람의 한없는 총애와 사모의 대상이 되었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신()처럼 섬겨지고 있는 현상입니다.

또 개만 아니라 돼지도 어느 나라 어느 가정에 가면 한 식구처럼 사랑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필자는 동물 애호를 반대하고 무조건 학대하고 잡아먹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을 믿고 사랑하고 섬기지 않는 인간이 짐승만을 위한다는 그 무지스런 죄악을 지적하며 슬퍼할 뿐입니다.

어느 날 먼 나라로 여행을 가게 된 주인이 사랑하는 검둥 돼지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얼마를 가다가 하루 해가 넘어가자 주인은 돼지와 함께 어느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주인의 큰 여행 가방 속에 숨겨져 침실까지 들어가게 된 귀여운 돼지 새끼는 머리와 목에 걸었던 장신구를 벗기움 받고 주인과 함께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습니다. 더러운 때와 여행의 피로가 말끔히 씻어졌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음껏 포식한 후 주인은 돼지 새끼에게 예쁜 잠옷을 입히고 향수를 뿌리고 입에 뽀뽀를 한 후 조용하게 잘 것을 타이르고 깊은 꿈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돼지 새끼는 주인의 사랑과 뜻을 저버리고 밤중에 일어나 그 더러운 본성대로 침대와 방안 이곳 저곳에 똥오줌을 싸놓고 꿀꿀거리다 못해 꽤액꽥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온 호텔 안이 시끄러워졌고 결국 관리인에게 발각이 되어 주인과 검정 돼지 새끼는 밤중에 그 호텔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돼지는 항상 어디서나 돼지입니다. 개는 개일 뿐입니다. 짐승은 짐승입니다.

그와 같이 죄인은 항상 어디서나 죄인입니다. 지식으로 머리를 들게 하고 학문과 교양으로 의상을 해 입히고 선행과 도덕으로 치장을 한다 할지라도 인간은 그 본성이 타락해 있고 정욕적이고 교만하기가 이를데 없습니다. 도덕과 율법과 종교와 온갖 노력을 다해도 인간은 죄인일 뿐입니다. 죄가 겉으로 나타난 교도소 속에 갇힌 죄수나, 죄가 속에 감추어져 있으므로 길거리를 활보하는 죄인이나 다 동일한 인간이고 최후 심판과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는 동질적인 죄인입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64:6).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3:4,10).

개나 돼지가 그 본성 자체가 변화를 받지 않는 이상, 아니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 새로 창조함을 받은 영적인 어떤 존재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그 더러운 배설물을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 역시 그 짐승과 같은, 아니 동물보다 더 지능적인 죄악과 자의로 만들어내는 수없는 정욕적인 타락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고 있습니다.

온갖 과학 문명과 인류 문화, 예술, 교육은 사람의 겉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더 지능적인 죄를 양산하고 온 천지와 자연 환경을 아주 병들게 했을 뿐 사람의 속마음과 인격을 온전하게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절대로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의 은혜를 받아들여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이 주님의 피와 말씀과 성령으로 새로 거듭날 때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 그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전 세계와 전 자연 만물이 새롭게 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세상에는 죄악이 관영하여 새 사람도 없고 새 해, 새 날, 새 아침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거듭나는 그 순간부터 새 사람이 되고 영적인 새 생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구원을 받는 순간부터 새 날이 시작되고 원수와 증오가 사라지게 되고 심판과 지옥 형벌이 완전히 면제됩니다( 3:5, 16-18, 5:24).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거듭난 자만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고 영원한 나라에서 영생을 누립니다. 주님과 함께, 모든 거듭난 성도들과 더불어····

 

세 개의 관문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그 인생이 세 번의 높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첫 관문은 그 영혼이 육신을 가지고 부모 곧 부정 모혈을 이어받아 이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출생의 방법과 과정과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어려운 관문인지 산모나 아기가 죽는 일도 많고 비록 생명을 건졌다고 해도 그것은 죽음의 체험을 거쳐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적인 것이고 동물적인 것이고 철통적인 것일 뿐입니다. 마치 짐승이 짐승 새끼를 낳듯이 사람이 사람을 당은 것뿐입니다. 직언하면 죄인인 부모가 자식 죄인을 낳은 것입니다.

- 이 세상사람들 가운데는 이 비참하고 죄 많은 정욕덩이인 육적인 몸 하나만을 가지고 제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육적인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동물처럼 약육강식하고 겁탈하고 차기치고 죽이는 죄악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 결국은 파멸이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둘째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새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자신이 심판과 그 정죄로 인하여 지옥에 갈 죄인인 것을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에 있어서의 제2의 관문 곧 반드시 통과해야만 할 구원의 문입니다. 이 구원의 문을 부정하고 다만 자신의 육적인 정욕만을 채우기 위하여 사는 사람은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새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못들어 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옥에서 영벌을 받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끔찍하고 비통하다 못해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9:43~49).

영원한 속죄( 9:12) 곧 완전한 구원을 이 세상에서부터 얻어 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최대 문제의 해결입니다. 이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만사를 제쳐 놓고 우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안에서 빨리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것은 도덕과 종교와 선행과 노력과 학문과 도를 닦는 것으로 되지 않고 그냥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죄를 다 사해 주셨다는 은혜의 사실을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세째로 중요한 관문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심판과 지옥형벌을 면한 것으로 족하지 말고(육신적인 삶에서 떠나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룩한 성도로서의 삶을 풍성하게 사는 것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세계에 있어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증상은 새 생명을 얻고서도 새 생명의 넘치는 역사에 자신을 내어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을 받고서도 주님보다 자신과 세상과 물질과 이기적인 생각에 때때로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정말로 구원받아 거듭난 사람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또 세상보다 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중생한 성도는 계속 죄 가운데 거하지 않고 또 계속적으로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며 혹시 그런 잘못을 범했을지라도 그것을 깨달아 고백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계속적으로 속이거나 구원의 도리를 부인하거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혀 없거나 계속 세상 정욕이 좋아서 항상 그 가운데서 사는 사람은 그가 구원을 한 번 시인하고 침례와 만찬에 참예하고 내세의 능력과 은사와 복음 전도에 참예한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진실로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성령님에 의하여 믿어진 확실한 영적인 변화가 없이 입으로만, 겉으로만 믿는 것같은 교인들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거절한 죄인들도 비참하지만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다고 입으로만 주문을 외우고 있으면서도 그 실은 영적인 중생과 그 거듭난 생활이 전혀 없었던 교인들은 더욱 더 비참하고 절망적입니다. 그들은 최후 심판의 관문을 결코 통과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

사랑하는 형제여,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지 말고 구원을 이루십시오. 의인이 되었다고만 믿지 말고 의롭고 선한 일을 계속하십시오.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을 자부하지만 말고 그분의 합당한 아들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 거룩한 자로 인정이 되었다면 거룩한 행실로 살아 가십시오. 주님 안에서 기쁨만을 누리지 말고 때로 두렵고 떨리는 심령으로 통회하십시오. 영생을 얻었다면 끝까지 영생을 취하십시오. 성령님을 모셨다면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으십시오. 이 몸이 주님의 것이 되었다면 이제 이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주님께 드리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제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2).

이것이 곧 새 해를 맞아 새로운 삶을 사는 최고의 지혜입니다.

 

(1994 2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