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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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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0. 21. 16:54 횃불/1994년

요한계시록 강해(21)

14

어거스트 반린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14:1,2).

14장은 다음 내용들을 망라하는 실로 포괄적인 장입니다: 환란기 동안 발생할 모든 일들에 대한 전망, 이스라엘, 기독교계, 바벨론 등에 대한 하나님의 치리, 마태복음 25(특히 끝 부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듯이, 이 땅에 강림하셔서 원수들에게 보복하시고 세계 열방을 차별적으로 심판하실 우리의 복스런 주님의 심판.

우리 앞에 펼쳐있는 이 놀라운 장은 다음 7가지 주제로 세분할 수 있습니다:

1. 환란을 무사히 통과하여 소망 중에 기다리고 있는 14 4

2. 그 비극의 날 동안 전파되는 영원한 복음

3. 바벨론-거짓 교회-의 멸망

4. 짐승을 경배하는 자들-배도한 기독교인들-의 운명

5. 환란 중에 순교한 유대인들의 축복

6. 추수-양과 염소의 심판( 25)

7. 진노의 포도 수확-계시록 19장에 상세히 묘사된바 그리스도의 강림시에 있을 세상 심판

13장에서는 사단의 현저한 활동이 나타난데 비해 여기 14장에서는 하나님의 활동이 나타나 있습니다. 1~5절에서 우리는 대환란 동안 구속받은 이스라엘의 14 4천이 육체적인 죽음을 면하여 그들의 구원주인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에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시온산에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이 계시록에 나오는 시온에 대한 유일한 언급입니다. 이 성도들은 7장에서 본 바로 그 성도들입니다. 7장에서는 그들이 환란 전의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데 비해 여기서는 그 시련의 때를 통과한 후의 모습으로 나타나있습니다. 2절에 나오는 하늘에서 거문고 타는 자들은 환란 동안 죽임을 당한후 하늘에 올라가 지상에 있는 유대인형제들의 노래에 동참하고 있는 유대인순교자들을 가리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14:2,3).

여기에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 4천이 천상의 거문고 타는 자들이 부르는 노래를 배울 수 있다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그 노래를 배울 수 있는 이유는, 그 두 부류의 무리가 비슷한 경험, 즉 대환란의 두려움을 몸소 겪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거문고 타는 자들은 그 기간 동안 순교자로 죽임을 당한 자들이며, 지상에 있는 자들은 땅에서 육체적인 죽음을 면한,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동안 지상에 거할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의 핵()을 이룰 14 4천입니다. 이 장려한 합창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이겠는지요!(15:3,4은 그 노래의 가사를 보여줍니다) 천상의 거문고소리에 맞춰 일부는 땅에서 노래하고 나머지는 하늘에서 노래하는 그 장려한 합창소리를, 모두 소리높여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그 장엄한 찬양의 대향연을 듣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어지는 구절들은 이 14 4천이 진실로 대환란 동안 회개하고 보존을 받은 이스라엘의 잔존자임을 분명히 보여줄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서 그 비할데없는 공포의 때를 이미 통과하여 소망 중에 기다리는 자들로 나타나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이사야 35 10에서 아름답게 노래하듯이 그들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여호와의 구속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 그 소망스런 예언의성취가 여기 14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립니다!

장로들이 듣고 있는데, 우리는 이 장로들이 휴거시에 영광에로 끌어올려진 모든 천상 성도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 이스라엘의 희년(禧年)에 불려지는 장엄한 할렐루야 찬양을 듣는 청중일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14:4,5).

이 구원받은 유대인들은 그 두려운 배도의 날로부터 보호를 받은 것인데, 이는 그들이,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않았다는 분명한 설명과 함께, 여기에 정절이 있는 자”(혹은 처녀”)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이 정절이 있는 자는 악한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혀지지 않고 순결을 유지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물론 여기서의 의미는 도덕적, 혹은 육체적 부패로부터가 아니라 영적인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릇된 교리들은 거의 언제나 여자들에 의해 파급되어왔는데, 이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여자가 빵에 누룩을 섞는 그림을 통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계시록에서 큰 음녀 로 알려진 조직을 상징하는 이세벨이란 여자에 의해서도 그 무서운 실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단들이 여자에 의해 시작되거나 발전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가령 크리스챤 사이언스, 견신론(見神論, Theosophy), 여호와의 증인 등이 그러합니다.

14 4천의 성도들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그릇된 숭배와, 교회가 영광에로 취함을 입은 후에 기독교계에 휘몰아칠 미혹의 역사(살후 2:11,12)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 정절을 지킨 자들은 그 오만하고 잔인한 짐승을 따르는 대신 한 마리 어린 양으로 묵묵히 도살자에게 끌려가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따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중 구원받은, 즉 영육간에 구원함을 받고 대환란의 소용돌이를 통과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사람들 가운데 구속을 얻은 자들입니다. 교회가 하늘로 올리워진 후에도 구원의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로마서 11장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지상 백성 이스라엘을 다시 취하셔서 그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이방 백성들에게 손길을 뻗치실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듣고 죄에서 구속함을 받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기에 이를 것이며, 그리하여 하나님의 지상 백성 이스라엘의 핵심을 이를 것입니다. 많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이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회복뿐 아니라 영적인 회복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새 마음과 새 영을 넣으실 것이며, 그들은 적은 자로부터 큰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호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장래 축복은 현 시대사람들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도록 합시다. 오늘날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 은혜 시대가 마감될 때 영원히 잃어질 것입니다. 현 시대의 모든 이들을 위한 멧세지를 들어보십시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하나님께서 환란 때에 이스라엘인들에게 축복의 기회를 허락하시는 것은 오직 전에 그들의 조상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오늘날 복음을 듣는 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성도들을 하늘 본향으로 부르실 때 저들에게는 영원한 형벌만 있을 뿐입니다.

믿는 유대인 잔존자들은 본문에서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로 불리웁니다. 교회는 야고보서 1:18이 암시하듯이 하늘의 첫 열매인 반면, 이스라엘은 땅의 구속받은 자들의 첫 열매 입니다. 교회가 하늘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하듯 이스라엘은 땅에서 그러할 것입니다.

그들의 입에는 아무 거짓말도 없습니다. 그날의 거짓말은 유대인들에게 적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제시하는 괄목할 속임수가 될 것입니다. 이 특별한 거짓말이 요한복음 8:44에 언급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사단이 거짓의 아비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후서 2:11에는 모든 사람들로 거짓 것을 믿게 할 미혹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일서 2:22에는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라고 말합니다. 그 때에 사단은 오늘날처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고 그 대신 그 자신의 그리스도-적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교묘하게 제시할 것입니다. 그러한 거짓말이 14 4천의 입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아무 흠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자는 그 본향이 하늘에 있든( 24)땅에 있든(계시록14) 영원히 흠이 없을 것입니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14:6,7)

성경 전체에서 여기에서만 우리는 영원한복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왕국 복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둥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원한 복음이란 용어는 복음에 대해서 사용된 여러가지 표현들 속에 구체화돼 있는 근본적인 진리를 제시해 주는 듯 합니다. 그 동일한 진리가 복음의 그 모든 다양한 국면들 속에 영원히 흐르고 있는바, 그 모든 복음들은 사람들-어떤 시대에 살든, 어떤 형태의 멧세지를 대하든 상관없이-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두려워하라고 촉구합니다. 이것이 어떤 모양으로 제시되든 간에 모든 복음에 담겨 흐르는 기본 멧세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갈보리에서 나타난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비할데 없는 사랑의 이야기 전체를 말해주는, 충만한 형태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듣는 독특한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지상에 해실 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향해 전하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멧세지는 확실히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복음과 같이 완전하고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멧세지는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으므로 하나님 앞에 경배하라는 것인데, 이 또한 오늘날 우리가 전하는 멧세지와 매우 다릅니다. 그러나 주된 요지는 항상 같은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전파한 것( 1:8)과 다른 복음은 아니지만 그 때의 상황에 맞게 다른 표현으로 제시됩니다. 중심주제는 항상 같은바, 그것은 모든 무릎이 그분 앞에 꿇고 모든 입술이 그분을 주로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축복은 상황과 시대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에 의존하며 또 거기에서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주님이 친히 지상에 계실 때에도, 그리고 환란 때에도 직접적으로는 언급된바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시대를 막론하고 그 완성된 구속에 달려 있습니다. 고낼료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시지 않고 베드로를 보내셨습니다. 한편 여기서는 이 복음을 실제로 전하는 이는 분명 사람들인데 천사가 그 멧세지를 가지고 오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의 말은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전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대한 엄숙한 경고를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경구절들은 구원받은 유대인들이 환란 동안 전세계적으로 이 멧세지를 전할 것을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5장 끝부분에서 우리는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자들을 구원하려는 목적을 띤, 이 심판의 멧세지의 우주적인 전파의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회개하는 사람들은 심판의 위협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으로 바뀌는 것을 발견할 텐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복으로 불리우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실례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를 보여주는 요나서에서 발견됩니다. 사실 그 사건은 바로 본 장에 나오는 날과 사건에 대한 생생한 본입니다. 요나는, 다가올 심판의 멧세지를 가지고 이방인들에게 나아가서 요나의 때처럼 많은 이방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큰 성공을 거둘 유대인 메신저(전파자)들을 상징합니다.

6절에 의하면 이 영원한 복음의 멧세지는 두 커다란 부류, 즉 땅에 거하는 자들과 모든 족속과 방언에 속한 자들에게 미칩니다. 첫째 부류는 계시록에 10회 언급된 무리로서 적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자들로 구성되는데 그들은 하나님 앞에 경배하기를 거절하고 그들을 위해 예비된 두려운 종말을 거둘 자들입니다(10). 반면에 둘째 부류는 그날에 왕국복음이 전파될 대상인 이방 민족들로 구성되는데(이 은혜 시대에 전혀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임),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이스라엘과 함께 새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염소는 전자를 가리키고 양은 후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다는 경고가 발해질 수 있는 때는 그 때입니다. 오늘날은 지금이 하나님의 은혜의 때라고 말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 주의하고 지금 예수께로 나올 수 있기를!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14.8).

이것이 본서에 나오는 바벨론에 대한 첫 언급입니다. 여기에는 그 멸망이 선언되어 있는데 비해 17,18장에는 예레미야 51장처럼 근 멸망의 실제 상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레미야의 설명(51:7)에 없는 의미심장한 말이 추가되어 있는데 고것은 음행이란 말입니다. 또 예레미야서에는 바벨론의 정치적인 파멸이 묘사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종교적인 바벨론의 파멸이 묘사되어있습니다. 바벨론은 계시록의 종교적인 음녀”, 즉 거짓 교회입니다. 항상 교회로 위장하지만 속 깊숙이까지 완전히 부패된 그 사악한 조직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사람들의 손에 의해 집행된 심판-을 받아 파멸될 것입니다. 계시록 17장은 어떻게 열왕이 그 음녀를 미워하여 그녀를 파멸시키고 불사를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다니엘 당시에 바벨론의 운명과 이스라엘의 구원은 관련된 사건이었는데, 본문이 말하는 시대에도 또 그러할 것입니다. 계시록 17,18장에는 바벨론의 멸망이 묘사되어 있으며, 19장에는 이 거짓되고 부패한 교회가 파멸되고 그리스도의 참 신부가 그분과 연합하여 영광 중에 나타나는 까닭에 하늘에 큰 축하연이 벌어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인지요! 우리 모두 이 광경에 감복되어 만복의 근원되신 분께 찬양드릴 수 있기를!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14:9,10).

8절의 여자가 이제 짐승이란 칭호로 묘사된 불법의 사람에게 길을 내어줍니다. 거짓 교회는 완전히 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으로는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등장과 더불어 그리스도께 대한 복종이 모든 거룩한 권위에 대한 전적인 반항으로 대치됩니다. “짐승어린양과 모든 면에서 대조를 이룹니다. 8절의 여자에서 우리는 그 절정에 이른 로마카톨릭을 보는 반면, 8절의 짐승에서는 사회주의와 무신론의 완전한 배도를 봅니다. 짐승을 경배하는 모든 이들은 영원히 고통을 당합니다(이 무리 속에는 신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섭도록 악한 로마 조직 안에는 참신자들이 있으며, 18:4에서 주님께서 은혜 가운데 그들을 거기서 나오도록 부르십니다. 민족들은 이미 음녀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고 취했는데(8) 그 환란 날에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10). 로마의 음행의 잔이 하나님의 진노의 잔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악인들이 어린 양 앞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운 선언이 뒤따릅니다. 변론쟁이들은 피조물을 고문하는 그런 하나님은 믿을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고문이라 하지 않고 고난(torment)이라고 했습니다. 고문은 외부로부터 오는 고통인 반면 고난은 내부로부터 오는 고통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우리 구주에 의해 다른 곳에서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고 표현된, 범죄한 양심의 두려운 회한을 의미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고통스런 사실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게 하시고자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신 그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 앞에서 그 고난이 지속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14:11).

본장 10,11절처럼 영원한 형벌을 강하게 표현한 대목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님을 그들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죄인들의 운명뿐만 아니라 분을 고의적으로 멸시하고 증오한 자들의 운명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악한 배도자들, 즉 사단을 경배하는 자들의 운명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마지막 날에 어린 양께서 악인들이 따르고 경배하던 짐승보다 월등히 뛰어난 분으로 입증될 것입니다.

이들의 고난은 섞인 것이 없는데이는 그들의 죄 또한 섞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면 면에서 일반 죄인들의 경우에 그러하듯 그들 속에는 선한 특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반항과 증오로 특징지워졌으며(오늘날 하나님을 증오하는 자들도 그러하듯), 그들의 운명도 그 극렬함을 경감시킬 자비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채 철저합니다.

이 두 구절(10,11)을 천천히, 그리고 엄숙히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분노, 인간의 고난, 불과 유황, “밤낮 쉼을 얻지 못함, 이 모든 표현들이 그 궁극적이고 영원한 형벌의 두려움을 묘사해 줍니다. 그 정반대로 예수님의 발 아래 경배드리는 모든 이들은 축복된 기업을 받을 것입니다. 그분의 진노 대신 그분의 무한한 사랑이, 그분의 분노 대신 잘 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그분의 칭찬이, 고난 대신 완전한 기쁨과 평화가, 불과 유황 대신 분의 임재의 찬란한 영광이, 심판의 연기 대신 그분을 찬양하는 향기로운 향기가, 그리고 밤낮 쉬지 못함 대신 사랑과 빛이 가득한 집에서의 영원한 안식이 있게 될 것입니다. 과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립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믿지 않습니다. 않은 사람들이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것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이 세세토록이란 말은 이 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15:7), 어린 양의 영원한 영광(5:13), 신자들의 통치(22:5)등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어 있습니다. 만일 천국이 영원하다면 지옥 또한 영원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4:12,13).

12절의 성도들은 의문의 여지없이 지상의 성도들, 즉 환란 동안 구원을 받을 유대인 잔존자들입니다. 그들은 각별한 인내와 끈기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과, 그들이 새로이 깨달은 메시아인 예수님께 대한 충성을 지키는데 있어서 뿐 아니라, 육체적인 면에 있어서도 인내를 발휘할 텐데, 이는 그들이 대환란의 큰 위험과 핍박을 극복하고 생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13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것은 이 사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구원받은자들은 천국에 올라가지는 않지만 땅을 기업으로 받기 위해 환란을 견디고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믿기에 12절의 성도들은 환란 동안 육체적인 죽음을 면할 유대인 신자들을 가리키는 반면에, 13절의 성도들은 환란 동안 순교의 죽음을 당할 유대인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계시록 6:11은 바로 이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계시록 11:7도 그들을 언급하는데, 11:11,12에서 우리는 그들이 하늘로 끌어 올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20:4에서 우리는 그들이 하늘 보좌에 앉혀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부연하자면, 그들은 순교를 당함으로써 천상 성도들의 첫째 부활에 참예할 것이며(20:4~6),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와 더불어 다스리기 위해 영원히 천국에서 살 것이며,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지상에서 누릴 것보다 훨씬 더 놀랍고 고귀한 지위를 누릴 것입니다. “자금 이후로라는 표현은 이들의 죽음이 특히 환란과 관계가 있다는 것과, 따라서 그것이 필경 순교자의 죽음을 가리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여기서 사람들의 진노 아래 죽는데, 이것은 10절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진노 아래 고난을 당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좋은 일인지요!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14:14~ 16)

이 놀라운 장 끝 부분에서 우리는 추수와 포도수확의 비유를 통해 묘사된 두 큰 사건을 대합니다. 그 사건들은 예수님의 권능과 영광 가운데서의 강림하심과 관련 있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입니다. 계시록 19장은 그분께서 심판전쟁을 위해 강림하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사실을 간명하게 진술합니다. “심판추수에 해당하고 전쟁포도 수확에 해당합니다. 추수에서는 어떤 것(알곡)은 취하고 어떤 것(가라지)은 불태워버리는 선별이 있는 반면, 포도수확에서는 본장 19절이 말하듯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틀에 던지워지는 완전한 심판만이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이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심판을 통해 묘사되어 있습니다(거기에는 가라지는 알곡으로부터 분리되고 양은 염소로부터 분리되는 두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그 둘은 같은 사건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계시록 16:16 19:11~21에서는 심판의 포도수확에 해당하는 장면을 대합니다. 일단 전쟁터에 나오면 어떤 선별도 불가능하며 모든 대적이 동일한 취급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그분을 대적하여 함께 모인 자들은 계시록 19:11~21에 묘사된 대로 현장에서 멸절될 것이나, 출전하지 않은 민족들은 마태복음 25:31~46에 나타난 대로 선별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돌아와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자들은 영생(여기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통치를 받는 것을 가리킴)에 들어갈 것이며 그분을 거절한 자들은 파멸을 당하고 불못에 던지워질 것입니다.

비록 실제로 거두는 일은 천사들에 의해 행해지지만 마태복음 24:30이 선언하는 대로 추수하는 자는 인자입니다( 24:21. 13:40~42 등 참조). 마태복음 13장의 곡식과 가라지의 모음, 마태복음 24장의 이스라엘 중 택한 자의 모음,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심판 및 왕위에 오르신 인자에 의한 본문의 추수 등 모든 것들은 하나의 같은 사건을 가리키며, 구약에, 예를 들어 요엘 3:12,13에 예언되었습니다: “열국은 동하여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지어다 내가 거기 앉아서 사면의 열국을 다 심판하리로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지어다 포도주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계시록 14장 마지막 부분은 추수와 포도수확을 모두 보여줍니다. 앞서 말했듯이 추수에서는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의 선별이 이뤄지며 포도수확에서는 모든 것이 차별없이  멸절당합니다. 추수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심판장으로 심판대에 앉아계실 것이며, 포도수확 때에는 그분을 대적하여 함께 모인 원수들에게 보복을 행하는 강한 정복자로서 오십니다. 추수 때에는 심판을 행하시며 포도수확에서는 보복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계시록 19:11은 그분께서 강림시에 심판과 전쟁을 하실 것을 말해 줍니다. 심판은 그분을 대적하여 모인 군대들에게 만이 아니라 여자와 아이와 노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 행해지는 반면, 전쟁은 계시록 16:14(아마겟돈) 19:19에 나타나 있듯이 그분을 대적하여 모인 강한 군대들에 대해 행해집니다.

추수와 관련있는 본장에서는 특히 악인의 심판이 다뤄져 있는 듯 한데, 이는15절에 거둘 때가 이르러(혹은 무르익어”)”라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요엘 3:13이 말하듯이 인간의 죄악이 절정에 다다른 것입니다.

인자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나라를 취하십니다( 7:13,14), 그분은 그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악인을 심판하시며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심판을 촉구한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장면입니다. 계시록 앞 부분에서 11:8까지는 심판이 보좌로부터 진행되었으며, 그 후로 16장까지는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절정인 일곱째 대접에서는 보좌와 성전이 결합됩니다(16:17). 보좌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하며 성전은 그리스도의 ”()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전으로부터 나오는 심판이 한결 가혹하며, 또 그분 자신에 대한 보다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반항을 다룹니다.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14:17,18).

앞서 말한대로 이 포도수확에는 신자가 전혀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 속에 던지워집니다. 그리스도의 강림시에 거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큰 무리가 그분을 대적하여 싸우기 위해 모이는데 그들은 현장에서 멸절을 당합니다. 이것이 소위 아마겟돈 전쟁인데 사실 전쟁이라기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적들 편에서 일방적으로 파멸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로 불리우며, 오래 전에 이사야 63:1~4에 엄위한 어조로 예언된바 있습니다: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주 틀을 밟는 자 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주 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갈보리에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그분께 경배하기를 거절한 악인들에게 임할 그 두려운 파멸의 날이 가까워옵니다! 그분께서 저를 인도하사 그분 발 아래 겸손히 엎드리게 하신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예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14:19,20).

이스라엘은 포도로 불리우는데 따라서 이 심판은, 그 때에 예루살렘을 대적하여 모인 모든 열국에게도 임할는지는 모르나, 특히 배도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요엘 3:12은 이방 열국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며 계시록 19:15도 그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요엘 3:12은 이 두려운 살륙이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며, 본문 20절은 그것이 성밖에서일어날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그곳은 전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겸손한 어린양의 피를 쏟게 한 곳이요,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그 두려운 죄에 가담했던 곳입니다. 그들은 그 일이 소위 거룩한 성안에서 행해지기에 합당치 않은 듯 그분을 성 밖에서 죽였는데 바로 거기서 그들의 피가 흘러 강을 이를 것입니다. 전에는 그들이 그 몸을 그분의 피로 물들였으나 이제는 그분이 그 옷을 그들의 피로 물들이실 것입니다. ,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비록 인간은 눈이 어두워 그것을 보거나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않지만, 신원의 날이 다가옵니다. 그날의 살육은 심히 극렬하여 피가 2백 마일에 걸쳐 말 굴레 높이까지 흐를 것입니다. 이 길이는 이스라엘 땅의 길이와 맞먹는데 이는 그 땅 전체가 당시 살륙당한 수많은 시체로 가득할 것을 암시합니다. 당신의 전망은 어떠한지요?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것과 지옥에서 사단과 함께 두려운 파멸을 당하는 것, 이 둘 중 어느 것인지요?

 

(1994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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