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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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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 09:08 횃불/1995년

이사야서에 나타난 그리스도

F. B. 메이어

7장 하나님의 목적의 변경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이사야 43:21)

이 말씀은 우선적으로 이스라엘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특별한 민족으로 택하사 지상의 모든 백성들 위에 높이셨다는 것이 명기의 요지이다. 이 일을 위해서 그분은 애굽, 즉 속박의 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셨으며 가나안 고지대 중에서 그들을 구별하셨다. 그들은 그분의 기업이 되어야 했다. “백성과 기업이란 두 단어는 성경에서 항상 함께 연결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4:20). 마치 그분은 그분의 백성을, 정성스런 관리 후에 그분에게 기쁨의 열매를 풍성히 내어줄, 적은 면적의 땅으로 간주하신 듯 했다( 7:6).

그의 아름다운 노래에서 그 위대한 율법수여자는,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라고 고백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32:8). 정원사가 소수의 선정된 식물을 구별하여 극진한 관심을 쏟는 것은 그 식물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속한 모든 땅에 심고 뿌릴 접지(接地)와 씨앗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32:9).

여호와의 계획이 이 글 서두의 의미심장한 구절에 분명히 선언되어 있다.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분의 의도는 오랜 신중한 훈련과정을 통해 그 생각이 그분의 속성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으로 돌이켜진 백성을 형성하여 그들로부터 영원한 경배와 찬양을 이끌어내는데 있었다. 그들은 온 세상에 나아가, 일찍이 황량한 광야에서 나면서부터 노예 된 민족을 발견하여 그들을 제사장과 아름다운 시인의 나라요, 또 유일하신 하나님의 뛰어난 아름다움을 선포하는 선각자의 나라로 삼으신 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거듭된 실패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를 거스리는 자들로 입증되었다. 세가지 경우에서 그들은 여호와를 거절했다. 그들은 찬양쪽보다는 저주쪽으로 기울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전해주었다. 아울러 그들은 다음 세가지 경우에 하나님의 목적이 일시적으로 보류 내지 연기된 것을 깨달아야 했다( 14:34).

첫째로,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함으로 그곳으로 되돌아가 40년간 방황해야 했다. 둘째로, 19왕들이 다윗의 위를 이어 통치한 후에 그들은 70년간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끝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거절한 까닭에 그들은 온 세상으로 내쫓김을 당해 후세를 위한 경계와 교훈이 되었다. 1900년간 하나님의 목적이 묶여있었다. 그것은 결국 틀림없이 성취될 것이다. 택한 백성이 장차 그분의 이름과 찬양과 영광을 위한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 이방인들이 일시적으로, 그러나 축복된 결과를 누리며 선민의 위치를 대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잘려나간 가지가 다시 그들의 감람나무에 접붙임 되어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그리할 것이다( 13:11, 11:23).

하나님 편에서의 이러한 목적의 변화가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이 되었다. 본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들이 이제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다. 서신서에서 적어도 두번, 그리고 두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입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하고 깨끗케 하여 그분의 소유로 삼으시고자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말씀을 듣는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분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함이다. 우리가 이러한 존귀를 입은 것은 하나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분의 뜻을 이루는데 실패한다면 우리 역시 그분의 목적이 지연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것은 손쉽게 또한 축복 가운데 실현되는 대신 이스라엘의 경우에 거듭 되풀이 되었듯이 눈물과 피를 통해 이뤄질 것이다( 2:14, 벧전 2:9).

 

1. 하나님의 목적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송으로 옮겨진 단어는 할렐루야할렐과 같은 어근에서 나왔는데, 그것은 먼저 분명하고 밝게 빛나는 빛을 뜻하고 다음으로 달콤한 플롯트음 같은 소리를 뜻한다고 한다. 그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영광을 반영하되 그들의 삶을 통해 그것을 비추어 다른 이들을 그것으로 이끌 때까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리고 그들은 듣는 이들의 귀를 사로잡는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소리로 그분의 찬송을 불러야 한다. “그분의 사역으로 그 영혼들의 마음을 지극한 기쁨으로 가득 채우신 그분은 얼마나 아름다우시겠는지! 우리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베푸시도록 와서 그분을 함께 좇도록 하자!”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도 적극적인 봉사를 통해서 만큼 하나님의 찬송을 증진시킬 수 있다. 아무 불평 없이 날마다 침묵을 지키는 것-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 당하기로 마음을 굳게 정하고 있는 것-이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에게 찬송과 영광을 돌리도록 이후의 세대들에게 독려하는 시를 쓰는 것보다 더욱 더 찬송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모든 삶에는 세가지 영역이 있다. 하나는 의무가 분명히 정해진 빛의 영역이고, 하나는 악()이 마찬가지로 분명히 밝혀진 어두움의 영역이고,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무 확실한 것도 없는, 구분선이 분명치 않고 각 사람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미광(微光)의 광활한 경계지대이다. 그러나 이 경계지대에서 영혼의 질()이 시험을 받는다. 거기서 우리를 약하게 혹은 강하게 만드는 결정들이 내려진다. 거기서 우리는 어두운 데로 떨어질 수도 있고, 결코 빛이 희미해지지 않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줄 위로 향해 난 길을 출발할 수도 있다. 그러한 미혹하는 길들을 헤쳐나갈 때,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쪽으로 인도할 것인지 묻는 것보다 더 유용하고 확실한 지침은 없다. 그것을 방해할 만한 모든 것은 회피해야 하고, 그것을 증진 내지 향상시킬 모든 것은 어떤 댓가를 치러서라도 추구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빛을 발해야한다. 이 빛을 발한다는 표현 속에는 단순히 옳은 것을 행하는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 하늘의 정사와 권세들이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배우는 것은 교회를 통해서이다( 3:10).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만 너무 골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사실 사도바울이 그분의 충만이라고 부른 그분의 존재의 전체 원천이 우리의 결정여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중요한 사실의 다른 측면을 잊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그분의 성도인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알기 위해 나아가도록 하자. 우리의 내적인 삶의 모든 영역과 우리의 모든 시간을 그분께 양도함으로써 그 위대한 농부께서 찬양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시도록 하자. 평지의 옥수수 밭과 과수원의 석류와 고지대의 포도원이 각각 그들의 분량대로 경배의 몫을 드릴 때까지 모든 것을 경작의 손길 아래로 가져가도록 하자

 

2. 그분의 목적이 훼방받을 가능성

너희가 내 약속이 무효화되는 것을 알게 되리라”( 14:34, 개정역 난하주참조; 우리말 성경에는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고 되어 있음-역주). 한 영혼의 역사 가운데 그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이상(理想)을 좌절시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우리에게서 이끌어내시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없다. 열매를 얻으려고 다가가는 인자의 발길 앞에 서 있는 무화과 나무여, 그대의 처지가 그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이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하락의 징조를 배우도록 하라. 또한 하나님의 목적이 지연되는 일이 없도록 그 일들을 통해 경계를 받도록 하라.

 

(1) 기도하지 않음 -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워하였으며”(22). 우리의 기도만큼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알아 볼 수 있는 확실한 가늠자는 없다. 지나친 긴장으로 인해 뇌가 쇠약해질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에 저항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처사이다. 몸의 쇠약으로 마음과 생각이 몹시 허약해져 눈이 절로 감기고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는 벵겔(Bengel)의 고백처럼 오 주님, 우리는 어제와 동일한 조건하에 있습니다라고 아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것은 헛된 일에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거나 죄로 인해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데서 비롯되는 피상적이고 조급한 헌신과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한 무기력이 여러분을 잠식하고 없다면 바짝 정신을 차리라!

 

(2) 적은 일을 무시함 - “네 번제의 적은 양(우리말 성경에는 그냥 으로 되어있음-역주)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23). 여기에는 적다는 말에 강조점이 있다. 백성들은 아마 유대의식의 큰 문제들은 주의했으나 작은 문제들은 소홀히 여겼던 것 같다. 우리 중 아무도 처음부터 중대한 율법의 의무를 범하지는 않는다. 타락은 작은 균열이나 조그마한 흠집, 혹은 겨우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한 구멍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 혹은 영혼과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작지 않다. 가벼운 부정확함, 거룩한 성품의 엄격한 정직성에서 빗나가는 것, 양심의 세미한 권고를 가볍게 지나치는 것 등의 현상을 주의하도록 하자. 아이들이 적은 일에 무감각하고 부주의할 때 그 결국을 내다볼 줄 아는 현명한 부모라면 즉시 그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줄 것이다.

 

(3) 향기의 부족 -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 하며····”(24). 참 신앙의 향기와 아름다움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는 딱딱한 율법주의 사고방식에서 의로운 일을 행할 수도 있다. 얼마나 종종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에 대한 사랑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의무감에서 혹은 우리의 기분에 따라 일을 행하는지! 그것이 바로 사도가 율법과 결혼했다고 일컬은 그 상태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 그리고 그 사랑이 최고의 동인(動因)이 되어야 할 그분과 연합되는 대신 율법과 연합되는 것! 그분의 섬김은 완전한 자유이며 그분의 멍에는 쉽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 이러한 목적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다윗이 사울을 대신했으며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대신했으며, 교회가 히브리 백성을, 서양이 동양의 기독교를, 모라비안 교도와 롤라드파가 당시 기성 교회들을 대신했다. 최근에 미국의 어느 교회는 유색인종을 교제권 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대다수 교인들이 거절했다가 몇년이 지나지 않아 교세가 완전히 쇠퇴하여 그 교회가 쫓아낸 교인들 주변에 모여든 유색인종에 의해 그 건물이 매매되었다고 한다. 요컨대 하나님은 그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로 스스로 입증된 자들에게서 그분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고 그분의 찬송을 발할 자들에게 그것을 건네주신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11:20,21).

 

3. 우리의 고통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21). 하나님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제쳐질 수 없다. 그것은 편견이나 불신앙이란 장애로 인해 잠시 제지를 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측면에서, 때로는 터널을 뚫고, 때로는 등정을 하고, 때로는 그 주위를 돌면서 그 택한 길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우리 각자의 경우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 댓가는 얼마나 엄청난지!

인류의 경우를 보면, 아담과 그의 족속에게 그분의 창조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고자 한 하나님의 목적은 죄의 가공할 훼방에 직면했다. 그 죄는 겟세마네의 피땀과 갈보리의 상한 마음 외에도 4천 년간의 말할 수 없는 고뇌의 세월을 치르게 했다. 그러나 비록 4천년 동안 보류되었긴 하지만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의 하나님의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의인은 아침이 되면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모든 대적은 우리의 발 아래 있게 될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인간에게, 그리고 탄식하는 피조물에게 어떤 댓가가 치러질 것인지!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은 별처럼 빛날 것이며 천사 찬양대처럼 하나님의 찬송을 부를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 댓가는 심히 컸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이 보지 못한 그러한 슬픔의 용광로 속에서 그 불순물이 제거된 다음 그들의 역사의 첫 날부터 그들에게 미리 정해진 모양을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형틀 속에 부어졌다.

하나님의 가족 안의 모든 자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의 마음의 생각들이 확고히 설 것이다. 그분의 이상이 실현될 것이다. 그분의 목적들이 마침내 그 목표를 이룰 것이다. 그것은 영혼의 자발적인 순종과 묵종을 통해서 이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긴장이나 압박이나 고민이 있을 필요가 없다. 모든 임무를 맡을 만한 능력이 주어지고 모든 짐을 질 만한 등이 예비되고 가파른 정상을 올라야 할 엔진에 필요한 연료가 갖춰지게 된다. 그러나 만일 이스라엘 진영을 그토록 자주 가득 채웠던 완고함과 거역과 불평이 있을 경우에는 고통과 추방이 있게 된다. 광야의 황량함과 단조로움, 오랜 기다림 등 모진 고난을 동반하는 훈련 기간을 거친 연후에야 비로소 영혼은 가나안 문턱에 다시 이르러 자신의 기업으로 들어갈 것이며 자신이 지은바 된 본래 목적인 그 찬송과 영광을 위대한 농부께 드릴 것이다.

이것이 이제까지의 당신의 역사는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돌이켜 회개하라. 하나님께서는 쓰라린 실망과 기회의 남용밖에 없는 과거를 기억지 않으신다고 선언하신다. 그분이 베푸실 자비를 통해 지난 시대의 기적들을 뛰어넘는 일을 행하시겠다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광야에 길을 내고 시내가 흐르고 초목이 우거지게 하겠다고 선언하신다. 당신이 스스로 광야에 처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분께서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내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거기서 당신의 포도원을 주실 것이며 아골 골짜기에 소망의 문을 내주실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젊은 날처럼 즐거이 노래할 것이다. 그분을 위해 지은바 된 까닭에 당신은 여전히 그분의 찬송을 부를 것이다. 그분께서 그분의 마음에 두신 모든 것을 당신에게서 즉시, 그리고 손쉽게 취하시도록 그분께 당신 자신을 드리도록 하라. 그것이 당신을 위한 최선이 될 것이다.

 

(1995 9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