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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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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8. 10:54 횃불/1995년

J. N. 다비의 성경 개요

마 태 복 음

13(2)

누룩의 비유를 마치시고 예수님은 더 이상 무리와 함께 바닷가-12장 끝의 증거 후에 그분께서 백성들을 향하여 위치에 적합한 장소이며, 그분께서 집을 떠나자마자 수리하신 곳-에 머물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이제 제자들과 함께 다시 집에 들어가시며, 거기서, 그들과 별도로 가까이 하시면서 천국의 진정한 성격(목적), 천국 안에서 행해진 것의 결과와, 그리고 그분이 계시지 않는 동안 그 나라의 외적인 역사가 마감될 때 땅의 모든 것을 소제하는데 취해져야 할 수단을 계시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여기서 영적인 사람에게 그 나라를 특징지우는 것과, 그가 그 나라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참 뜻으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그분을 거스리는 모든 것을 그 나라로부터 쫓아내게 될 심판, 곧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되게 외적으로 나타나게 될 권능의 행사를 발견합니다.

우리는 그 나라의 외적인 역사가 이것, 즉 곳간에 숨겨진 곡식과 불태워지기 위해 단에 류인 채 땅에 남겨진 가라지로 마감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비유에 대한 설명은 그 기간의 그 나라의 역사를 요약해 줍니다. 그것은 혼합된 상태의 상이한 부분들을 이해하고 구별지으며 각 부분을 그 진정 한 주인에 게로 귀속시킵니다

좋은 씨는 그 나라의 자녀들로서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진정 그 나라에 속했으며 그 상속자입니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그렇지 못했으며 더 이상 그 나라는 자연적인 출생으로 얻는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의 자녀는 말씀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망치게 하기 위해 원수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그들 가운데 섞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진리로 말미암아 태어난 자들 가운데 심어놓은 악한 교훈들이 맺은 열매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훈이 심겨진 곳에서 일어나는 사단의 역사입니다. 추수 때는 이 시대의 끝입니다. 추수하는 이들은 천사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일어난 사건을 역사적으로 설명하시지 않고 추수 때가 올 때 추수에 사용되는 수단만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이 비유에서 역사적인 것의 성취는 이미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분은 그 중요한 결과를 제시하기 위해 그분이 계시지 않는 동안 그 나라인 것을 뛰어넘어 나아가십니다. 곡식(, 교회)은 곳간 안에 있고 가라지는 단으로 묶인 채 땅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그 단을 이루는 모든 것, ()과 같이 그 나라에서 하나님을 거스리는 모든 것을 취하여 불못에 던지시며, 거기서 울며 이를 긺이 있습니다. 이러한 심판이 끝난 후에 의인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그분 자신, 곧 그 장차올 영광의 날의 참 태양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자녀 된 자들의 아버지로부터 그 나라를 받을 것이며 그들은 그분과 함께 그곳에서, 그 속성에 따라 빛을 발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무리에 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신 결과와 원수의 간계, 그 후에 들에서 자라난 그들의 자연적인 질서와 별도로 악한 자들이 그들 가운데 동맹을 맺은 것과, 그리고 교회가 취해감을 입는 일 등을 발견합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주님은 그들로 이 비유의 표현을 충분히 이해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설명해 주십니다. 거기서 우리는 인자에 의해 악한 자들에게 집행되는 심판을 발견하는데, 그들은 불못에 던지워집니다. 그리고 의인들은 영광 중에 나타납니다(이 마지막 사건들은 주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이 땅에 있는 외적인 형태의 천국을 마감시키고, 악인들이 여러 무리로 모아지고 성도들은 하늘로 취해감을 입은 연후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을 충분히 가르치기 위해 공적인 역사와 심판과 영광중의 그 결과를 설명하신 다음에, 주님께서는 그 나라의 외면적이고 지상적인 사건들이 전개되는 동안 땅에서 진행되는 것 영적인 사람은 마땅히 분별해야 할 것-에 관한 하나님의 생각을 그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았습니다. 한 사람이 그 보화를 발견하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밭을 삽니다. 밭이 아니라 밭에 있는 보화가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셨습니다. 그분은 합법적으로 세상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목적은 세상에 감추어진 보화, 곧 세상과 관련된 구속의 모든 영광인 그분의 친 백성들입니다. 교회는 그 도덕적인 아름다움이나 어떤 의미에서 신적인 아름다움에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의 바램과 희생의 특별한 대상으로서 주님의 시선을 끄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지혜와 뜻을 따라 이세상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그 새 것의 놀라운 흡인력으로 인해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려고 그 장소 전체를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혀 새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은 아무 흡인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보화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으로 그것을 얻기 위해 모든 소유를 팔도록 만듭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셨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보화를, 곧 그분이 사랑하는 백성을 포함하는 세상을 소유하기 위해서 인간으로서, 이 땅의 메시아로서 그분께 속한 모든 것 -약속들과 왕권과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다음으로, 극히 간진 진주의 비유에서 우리는 위와 동일한 개념을 다시금 보게 되는데 그 개념은 사람들에 의해 변개됩니다. 한 사람이 좋은 진주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구하는 것에 대해 구미와 식별력과 지식을 소유했습니다. 그의 탐구를 자극한 것은 그 사물의 잘 알려진 미()였습니다. 그의 생각에 부합하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그것이 모든 소유를 찾아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사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그 자체에서 그것을 얻기 위해 그분으로 모든 것을 버리게 된 아름다움과(그 아름다움으로 인한) 가치를 발견하셨습니다. 그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상태, 곧 유대인의 상태를 고려할 때, 하나님의 영광은 이 새 것을 소유하려면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그분께서 취하실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 새것을 소유하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마음이 찾는 것, 다른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그 나라에서 하나님이 그분에게 주신 것 안에서 발견하십니다. 그분은 다른 어떤 진주도 사지 않으셨습니다. 이 진주를 발견할 때까지 그분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고픈 자극을 느끼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본 순간 그 마음은 작정되었고 그분은 그것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십니다. 그것의 가치가 그분의 마음을 결정케 하는데, 이는 그분은 판별법을 알고 계시며 분별력을 갖고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나라의 자녀들이 똑같은 원리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나라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달았을 때 그것을 누리기 위해, 그 극히 값진 진주에 속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보화가 아닌 것은 얻으려고 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극히 값진 것을 발견할 때까지는 좋은 진주를 구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 완전한 효력에 있어서 이 비유들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적용됩니다. 이 비유들에 담긴 의도는 과거에 일어난 모든 일, 곧 주님과 유대인과의 관계와 대조적으로 당시에 일어나고 있던 일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직 일곱가지 비유 중 하나가 남았는데 그것은 바다에 던지워진 그물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등장인물에, 다시 말해서 비유 그 자체에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그물을 던진 그 사람들이 그물을 물가로 끌어내어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림으로써 분리 작업을 합니다. 좋은 고기를 얻는 것은 그물을 해변으로 끌어내는 이들의 일입니다. 이 일은 해변에 이르렀을 때만 가능합니다. 분류작업 또한 분명히 그들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고기에 대해서만 분류를 합니다. 그들은 그런 고기들을 압니다. 이것이 그들의 업()이요 고기를 잡는 목적입니다. 다른 고기들도 좋은 고기들과 함께 그물에서 발견되나 그것들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판단은 끝났습니다. 어부들은 좋은 고기를 알며, 그것들은 좋은 고기가 아닙니다. 이제 어부들은 그 고기들을 내어 버립니다. 이것이 천국의 역사의 한 부분을 이룹니다. 악인에 대한 심판은 여기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못된 고기는 어부들이 좋은 고기를 그릇에 담을 때 자동적으로 해변에 버려집니다. 좋은 것이든 못된 것이든 그 최종적인 운명은 여기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좋은 것에 대해서는 그 운명이 해변에서 종결되지 않으며 못된 것에 대해서도 해변에 버려둠으로써 그 운명이 종결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최종운명은 이 비유에 나타난 조치 뒤에 옵니다. 그리고 못된 고기에 관한한 그 운명이 좋은 고기와 함께 섞인데서 분리됨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멸망 당하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이 비유에 있어서나 가라지와 곡식의 비유에 있어서나 심판의 집행이 비유 자체의 일부를 이루지는 않습니다.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가라지가 묶인채 밭에 버려지고 이 그물의 비유에서는 못된 고기가 해변에 버려 집니다.

이와같이 복음의 물이 열방의 바다에 던지워져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포획했습니다. 그물을 가득 채운 이러한 일반적인 포획이 있은 후에 좋은 고기와 관계가 있는 주님의 대리자들이 고기들을 한테 모아 좋은 고기를 못된 고기에서 분리시킵니다. 여기서 이것이 왕국에 대한 비유라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복음이 좋은 것과 못된 것을 한테 모았을 때 왕국이 지니는 성격입니다 마침내 그물이 올려지고 모든 부류가 그 안에 포회되었을 때 좋은 것은 소중하므로 따로 분리되고 나머지는 버려 집니다. 그 좋은 것은 여러 그릇에 모아집니다. 성도들은 천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수고하는 자들의 역사에 의해서 모아집니다. 그리고 분류는 심판에 의해서가 아니라 좋은 것과 관계가 있는 종들에 의해서 이뤄집니다.

심판의 집행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일꾼들은 이 일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세상 마지막 때에 천사들이 나아와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어부들처럼 나머지 중에서 의인을 갈라내는 것이 아니라)그들을 불못에 던질 것이며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천사들이 의인과 관련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습니다. 좋은 것을 그릇에 모으는 것은 천사들의 일이 아니라 어부들의 일입니다. 천사들은 두 비유에서 악인과 관계가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천국 기간 동안이든 그 후이든 이미 공적인 결과는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여기서 반복되지 않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그물이 가득 찰 때 의인에 대해서 행해질 일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악인의 운명이 되풀이된 것은 그들에 대해서 행해진 일과 좋은 것을 여러 그릇에 모으는 어부들을 통해서 행해진 일을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다른 측면에서 제시됩니다. 그리고 의인은 그들이 있던 곳에 남겨집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악인의 심판은 여기처럼 선언됩니다. 그들은 버림을 받아 울며 이를 가는데 처하게 되나 거기서 왕국의 일반적인 상태가 드러나고 우리는 의인이 해처럼 빛나는 것-왕국의 높은 부분임-을 대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것은 지혜로운 자들만이 이해하는 것이요, 영적인 마음만이 보는 것인바 이는 의인은 그릇에 담겨지기 때문입니다. 심판에 앞서 영적 인 능력에 의한 분리가 있는데, 그것은 왕국의 일반적인 공적 상태에 있지 않았고 다만 하나님의 섭리가 밭에서 공적으로 행한 것과 위에서 받아들인 알곡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 분리는 좋은 것에 대한조치를 통해 이뤄집니다. 이것이 영적인 지각을 위한 주요 요점이었습니다. 공적인 전시(展示)는 요점이 아닙니다. 심판은 사실 악인에 대해서만 집행될 것이며 그 때 의인은 거기에 남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 이미 한데 모아지고 섭리적으로 곡식에서 분리된, 밭에 남은 것을 멸하고 불사르는 것은 가라지에 대한 절대적인 심판입니다. 천사들이 끝날에 보냄을 받는데 이는 가라지를 알곡에서 분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이 일은 이미 행해졌음) 가라지를 불에 던지고 그로써 왕국을 정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물의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는(49) 분류 작업 자체가 일어납니다. 땅에는 의인이 있을 것이며 악인은 의인 중에서 분리될 것입니다. 이 비유가 실제로 가르치는 바는 의인을 악인에게서 분리시키는 것과, 의인을 여러 무리로 한테 모으는 것입니다. 이 일은 한번 이상 일어나며,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한무리로 모아지기도 합니다. 주님의 종들은 비유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일에 사용되는 도구들입니다.

이 비유들은 옛 것과 새 것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왕국의 교훈은 잘 알려진 교훈이었습니다. 왕국이 주님께서 묘사하신 형태를 취한다는 것, 왕국이 차별없이 온 세상을 포용한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아브라함에게서가 아니라 말씀에서 그 존재의 근거를 지닌다는 것, 이 모든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습니다. 서기관들은 왕국에 대한 지식은 있었으나 왕국이 지닐 성격, 곧 이 땅의 모든 것이 의존하는,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에 심겨진 천국으로서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바 없었습니다.

주님은 다시 유대인들 가운데서 사역을 행하십니다. 그들에게 있어 그분은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육신을 좇은 그분의 가족을 알고 있었습니다. 천국은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에 대한 계시는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며 거기서 거룩한 것에 대한 지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분의 고향 사람들은 자연적인 마음이 감지할 수 있는 것을 뛰어넘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축복은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저지되었고 그분은 왕으로서만이 아니라 선지자로서도 이스라엘 의해 거절을 당하셨습니다.

 

14

이제 이 복음서는 이러한 계시들의 역사적인 과정을 다시 추적하되 백성들의 언행심사를 지배한 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렇게 합니다. 헤롯(하나님의 증거에 순복하기보다 자신의 지상 권세와 영광을 더 사랑하고, 비록 여러 면에서 진리의 권능을 인정한 것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양심보다는 그릇된 인간적인 생각에 더 얽매였던)이 일전에 옥에 가둬 둔 메시아의 선구자 세례요한의 목을 베었는데, 그 일은 그의 아내를 지배하던 죄를 충성스레 지적해준 자를 그녀의 눈 앞에서 제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전해진 그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파하셨습니다. 겸손한 섬김 가운데 (요한보다 훨씬 높으셨지만)요한과 함께 무리에게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시면서 그분은 마음과 사역에 있어 자신이 요한과 연합되어 있음을 느끼셨습니다. ()의 한 가운데서 그 두 사람은 한결같이 충성스러웠으며, 예수님은 그러한 충성이 요구되는 위치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40:9,10). 그러므로 요한이 죽은 소식을 듣자 곧 그분은 빈들로 물러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증거를 공공연히 거절하기 시작한 무리를 떠나있는 동안에도 그분은 그들의 모든 필요의 공급자가 되시고 그로써 그들의 모든 필요를 돌볼 수 있는 분이 그들 가운데 체심을 증거하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무리는 그러한 필요를 느낀 까닭에, 그리 고혹 믿음은 없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능력을 갈망한 까닭에 그분을 좇아 빈들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사 모든 질병을 고쳐주십니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이 무리를 보내어 먹을 것을 사먹게 하시라고 그분께 권합니다. 그분은 그 요청을 거절하시고, 그분의 백성 중 가련한 자들을 양식으로 만족케 하실 수 있는 분이 그 자신의 위()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심을 나타낼 수 있는 놀라운 증거를 하십니다( 132). 다윗의 위를 세우신 여호와께서 그 위를 상속하실 분의 위()로 거기에 계셨습니다. 저는 열 두 광주리의 떡조각이 성경에서 항상 인간의 관리능력의 완전함을 가리키는 수를 말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또한 여기서, 주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이 그분의 축복과 권능의 행위의 도구들이 되고 또 그분 자신의 능력을 좇아 왕국의 축복을 나눠줄 수 있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나라의 축복과, 그 축복의 전달자인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게 적용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 안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모든 역사에 대한 믿음의 결과와 관련 있는 극히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그러한 개입 가운데 역사하는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그와 관련된 경륜과 지혜의 질서를 따라 그러한 능력에 합당한 역사를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데서 이 원리가 보다 충분히 발전된 것을 다시금 보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사용할 줄 모른채 무리를 보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가운데 계신 분의 영광을 좇아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그 능력을 직접 사용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만일 이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렇게 축복하실 수 있는 분이 그들 가운데 계심을 온전한 인내로 행동을 통해 보여주셨다면, 그분은 그들의 불신앙의 결과로 그분께서 그 백성들로부터 분리되심도 마찬가지로 증거하십니다. 그분은 제자들만 따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친히 무리를 돌려보내신 다음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십니다. 그 동안 제자들을 태운 배는 역풍을 만나 풍랑으로 요동했는데 이것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생생한 그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거친 세상의 바다를 건너도록 따로 보내사 거스려 싸우기 힘든 반대에 직면하게 하셨습니다. 그 사이에 예수께서 하늘에서 홀로 기도하십니다. 그분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분을 에워쌌던 유대 백성들을 멀리 보내셨습니다. 제자들의 떠남은 그 일반적인 성격 외에, 특히 유대 잔존자를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베드로는 개인적으로 배에서 내려와, 상징적으로 그 잔존자의 위치를 뛰어넘습니다. 그는, 지상적인 배의 시설을 버리고 그 배에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나아와 바다 위를 걷는-물론 예수님의 오라는 말씀에 근거한 담대한 행동이었음-그러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걸음은 다름 아닌 만일 주(예수님)시어든이란 고백에 기초한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만일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다던 그 걸음은 아무 근거도 없고 전연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께 의존합니다. 배에는 한가지 알려진 수단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물 위를 걷는 동안 계속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단순한 인간으로서 인간은 물 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대로 물 속에 빠지고 맙니다. 예수님에 게서 그 안에 있는 능력을 끌어내는, 그리고 그런 점에서 그분을 본받는 그 믿음 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지탱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본받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가까이 하면 할 수록 더욱 그분을 닮게 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성격의 잔존자와 대조되는 교회의 참 위치입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굳은 땅처럼 걸으십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그분께서는 만물의 특질을 임의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시기 위해 폭풍이 일게 하십니다 그분은 고요한 물 위로뿐 아니라 거친 물 위로도 걸어가십니다. 게다가 폭풍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에 빠지는 사람은 폭풍 중이든 고요한 중이든 물 속에 빠지기 마련이지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사람은 고요한 중이든 폭풍 중이든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환경을 보지 않고 그로써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그리고 주님을 잊지 않는 한 물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 모든 것 위에 계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걸음으로 마땅히 환경을 극복하도록 해야 할 상황에서 종종 환경은 우리로 그분을 잊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찬양드리게도, 그 자신의 능력으로 물 위를 걸으시는 분께서 미약한 제자의 믿음과 휘청이는 발걸음을 붙들어 주기 위해 거기 계십니다. 그리고 어쨌든 그 믿음이 베드로를 예수님께 가까이 인도하여 그분의 뻗친 손이 그를 붙들 수 있게 했습니다. 베드로의 실수는 불변하시며, 그리고 그의 믿음이 마땅히 관찰했어야 하는바 바로 그 파도 위를 걷고 계시던 예수님을 바라보는 대신 파도와 폭풍(결국 물결과 아무 관계가 없던)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좌절의 부르짖음이 예수님의 능력을 행동으로 나타나게 했습니다(그의 믿음이 마땅히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이제 그는 교제의 즐거움을 누리며 주님처럼 걷는 대신 부끄러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잠잠해집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있는 그분의 백성의 잔존자에게 다시 오실 때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 때에도 그분께서 이스라엘 잔존자들과 배 안에 있는 모든 이들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를 받게 되실 것입니다. 게네사렛에 이르러 예수께서 후에 사단이 가져온 모든 악을 땅에서 쫓아낼 그 능력을 다시금 행사하십니다.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는 세상이 그분을 알아볼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거절당하심의 결과를 보여주는 적절한 그림 인바, 본 마태복음은 그 일이 유대 민족 한가운데서 일어난다는 것을 이미 우리에게 알려준바 있습니다.

 

(1995 7,8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