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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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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8. 10:51 횃불/1995년

결혼과 가정(7)

누가의 가정 생활 시리즈

A. J.  히긴즈

 

결혼과 가정에 관하여 과다하리만큼 많은 저술들이 범람하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1세기의 의사를 통해 결혼과 가정에 관한 훌륭한 말씀을 시리즈로 주셨습니다 그 각각의 사례들과 소품문(小品文)들이 독립적으로 구분되어 있지는 않지만 저 완전하신 사람에 관한 묘사 속에 섞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19세기 이후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귀중한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으므로 참신한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2천년 전에 누가(Luke)를 통하여 주신 것을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결혼생활에 관한 하나님의 모범이 무엇인지를 지금까지 몇 장()에 걸쳐 상고해 왔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가정생활이라는, 중대하고도 방대한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필자는 본 장()이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주제의 다리역할을 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은 헬라(그리이스)의 의과대학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공부하고 있는 누가라는 젊은 학도를 생각해보십시오. 당시의 의학공부 원칙상, 그는 주의깊은 관찰과 자세한 병력(病歷)의 중요성에 대하여 처음부터 강조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물에 대한 그의 관찰력과 대조분석력은 당시의 위대한 스승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면도날처럼 더욱 예리해졌을 것입니다. 그때는 치료방법이 매우 빈약했던 터라 관찰과 경청에 의한 진단 실력이 더더욱 요청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이 이와 같은 재능을 지닌 그 젊은 의사를 택하셔서 가장 감동적이고도 섬세한 복음서를 기록하게 하신 것이 합당함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자신도 언급하기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3). 그는 마리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주님의 어린 시절과 소년기, 청년기 등에 관하여 문의했음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화포(晝布) 위에 주님의 생애에 관한 그림을 그려내는 누가의 섬세한 필치에 대하여 큰 은혜를 입고 있다 하겠습니다. “자세히 미루어 살폈다는 누가의 고백은 남의 이야기나 소문 등을 이것저것 되는대로 주워 모았다는 뜻이 아니라 철저한 조사를 통해서 결과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누가는 분명한 인간적 관심을 가지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의 복음서에는 과부들과 여인들, 부자들과 악한들, 눈물과 감동, 기도와 찬양, 식사 교제와 가정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 중에서 현재 우리의 관심사는 가정생활에 관한 것입니다. 본장()에 이르기 전까지는 결함 있는 결혼생활의 사례들을 살펴보았는데 지금부터는 누가의 필치로 그려내는 기혼부부의 미덕들을 신선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의 첫 장()부터 우리는 결혼생활의 최고의 이상(理想) 중에서 많은 사항을 소유한 부부를 소개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헤롯 시대의 사람들인데 이 시대는,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이 각각 이야기하는 바대로, 신학자들이 개인의 욕심을 합법화하기 위해 이혼에 관하여 논란을 벌이던 때였습니다. 안정된 일부일처주의는 연속적인 일부일처주의(그럴듯한 명분으로 이혼을 합법화하는 방식으로 재혼을 거듭하여 형식상의 일부일처제만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킴-역주)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헤롯 왕실은 부도덕의 오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보좌를 이을 사람이 뻔뻔스럽게도 자기 친형제의 아내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도 의롭고 흠이 없는 한 부부가 있었는데 이 부부는 자식을 갖지 못했습니다. 레위인이었던 그들의 결혼은 자기족속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사되었습니다( 1:5). 우리는 누가복음에 제시된 세 종류의 결혼을 각각 요약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위의 부부에게서 볼 수 있는 결혼의 특징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조화, 머리됨, 무거운 짐이 연로하면서도 존경할만한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함께 살면서 생활의 축복과 짐을 함께 나눴습니다. 그들의 마음, 특히 엘리사벳의 마음은 수태하지도 못한다는 비난의 중압감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여정은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며, 누가복음의 말미를 장식하는 두 보행자처럼( 24:21) 그들의 마음도 희망을 잃어버렸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의 의로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결혼의 열매가 없었던 것으로 자기 민족 앞에서 불명예를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신실한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사자(使者)가 보내심을 받아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표현은 아들을 달라고 간구했던 그들의 기도를 가리키거나 또는 제사장의 신분을 지녔던 사가랴의 구국(救國)을 위한 기도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견해가 옳든 간에 여하간 분명한 것은 그가 지혜롭고 사려 깊은 남편으로서 자기 아내의 고통스런 짐을 오랜 세월 동안 함께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부드럽고, 이해심 많으며, 떠받쳐 주는 법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묘사하시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60~63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자기 아들의 이름에 대하여 서로동의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벙어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자기 아내와 의사를 소통하였으며, 그녀는 자기 남편의 말을 최종적 인 권위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첫 장의 약이 내리면서 우리는 베드로가 나중에 말한 대로 생명의 은혜 를 함께 누리는 한 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처음 두 장에는 또 마리아와 요셉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누가는자기 습관대로 일차적으로는 마리아를 강조하고 있으며, 마태는, 주님의 이스라엘의 정당한 왕권 계승자이심을 중시하는 까닭에 요셉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요셉이 어떠한 불명예나 댓가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내를 돌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그들 속에서 높은 수준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는 어떠한 댓가를 치러서라도 자기 아내의 안녕을 보살펴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의 보호자이자 안내자였습니다. 그는 여행에도 그녀와 함께 있었으며(4,5), 출산시에도 그녀와 함께 있었으며(16), 율법에 대한 의무 이행과 예루살렘 여행에도 그녀와 함께 있었으며(22), 나사렛 귀환여행에도 그녀와 함께 있었습니다(39).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더 중요한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아내를 저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가정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 주님께 우선권을 드리고자 하는 확고부동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것 역시 그 가정의 특징이었습니다. 그 부모는 매년 유월절에는 어김없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는데, 요셉과 마리아가 돈 많은 지주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은 비용상 힘들었을 것이나 그들의 삶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첫째였습니다. 영적인 영역에서의 순종과 조화는 결혼생활의 필수조건입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눈여겨볼만한 사항을 우리는 마리아의 표현 가운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잃어버린 자녀를 마침내 성전에서 찾았을 때 그녀는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꾸중했는데, 여기에서도 그녀는 자기 남편 요셉을 앞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소한 것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자기 배우자보다 자신의 걱정이나 슬픔을 먼저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관하여 처음으로 듣고 배우는 것은 누가의 글을 통해서입니다. 물론 바울이 그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확대시켜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오래 남는 첫인상을 형성시켜 주는 사람은 누가입니다 이 부부에 관해서는 전장(前章)에서 이미 논했지만 사도행전18장을 재고해 보면 그들은 바울에게 접대를 베푼 다음, 아볼로에게도 접대를 베푸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미덕이 점점 발전하여 지역교회까지 확대되고(고전 16:19) 마침내는 이방인의 모든 교회에까지 미치게 된 것은( 16:3,4)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점은 결혼한 부부들에게 중요한 원칙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시는 사항들을 잘 수행하고 있으면 주님께서 여러분의 쓰임받는 영역을 확대시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고린도로 이동했던 이유는 당시의 권세들에게 굴복한 때문이었지만 거기에서도 하나님을 위한 사역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 과업을 청취하고 나자 그들은 믿음 안에서 아름다운 지위와 큰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기회의 문이 활짝 열렸고, 그들의 섬김은 모든 교회에 게 귀중한 가치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누가복음에 나오는 가정생활 중의 몇 가지를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필자는 두 가정을 주목해보고 싶은데 그 첫째는 저 온전하신 아드님이 계셨던 가정이고, 그 둘째는 온전한 아비가 있었던 가정 입니다.

나사렛에서의 가정생활은 몹시 힘들었을 것입니다. 좋은 것이라곤 생산되지 않는 마을은 자녀 양육에 부적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요셉과 마리아를 지도하셨으며,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은 나사렛 땅은 전무후무하신 분의 성장을 목격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나사렛은 어떤 면으로 아주 평범한 곳이었지만 또 어떤 면으로는 매우 비범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와 요셉에 관하여 몇 가지 구체적인 사항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했으며”(2:19),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2:51). 필자가 이 말씀들과 다른 성경말씀들로부터 배우는 바는 자기 자녀들에 관하여 공부하는 학생이 되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그 아이의 유일무이한 속성과 그녀의 묵상이 지니는 비상한 성격을 충분히 인식하지만 그 원칙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도우려면 시간을 내어 자기 자녀의 강점과 약점을 관찰하고 파악해야만 합니다. 이 점은 나중에 더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요셉은 복음서에 그리 많이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지나쳐서는 안될 두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이미 말씀 드린대로 요셉은 매년마다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주님도 역시 안식일에는 자기 규례대로회당에 가셨습니다(4:16). 그렇다면 이 경건한 습관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물론 주님은 자기 스스로 이런 습관들을 실천하셨을 테지만 여기에서의 요점은 요셉이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두는 습관을 가지도록 자기 가족을 가르쳤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인 의무들을 인식하고 실행하는 것은 요셉의 습관이었으며, 그의 자녀들은 그의 모범을 따랐던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확립하는 일에 자녀들이 부모보다 앞설 가능성은 거의 희박합니다. 만일 부모가 확고부동한 자세로 교회의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 자녀 역시 모든 집회를 경시할 것이라는 사실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필자를 용납해 주신다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한가지 사항을 고려해 보고 싶습니다. 마태복음 13:55에는 요셉이 목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마가복음 6:3에는 주 예수님도 목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요셉은 그분에게 목수라는 직업을 가르쳐 줌으로써 그분의 장래를 준비시켰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목표를 지혜롭게 설정하고 어린 그분을 훈련했습니다. 물론 필자는 그 아드님이 유일무이한 성격을 지니고 계셨으며, 영원한 목적들을 품고 계셨음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자기가족의 장래를 잘 고려해 준 것에 대하여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필자로 하여금 주님의 나사렛 어린 시절에 관하여 최종적인 요점을 지적하게 만듭니다.

누가복음 2장의 끝에 나오는 다음의 난해구절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필자는 이 구절에 관하여 어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의문들을 다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더 유능한 사람이 훌륭한 필체로 해결해야 할 사항입니다. 다만, 필자는 한 어버이로서 책임져야 할 개발의 4영역을 고려해 보고 싶습니다. “그 지혜가···· 자라갔다는 말씀은 감정과 지성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키가 자라갔다는 말씀은 신체적인 면을, “하나님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라는 표현은 영적인 면을,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라는 표현은 사회적인 개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다 동의하지는 않을 것 같은 말을 필자가 잠시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만 필자는 위의 모든 영역에 대하여 책임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영역에 대하여 똑같은 책임을 지니고 없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의 신체 성장을 취하여 양식을 마땅히 공급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자녀의 영적 성장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까닭에 우리가 그 면을 강조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성경 암송은 잘 하면서도 불충분한영양 공급으로 병 약하다면 여러분은 자신을 합당한 부모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의 영적인 복지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복지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인정하실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녀의 감정 및 사회적인 적응력에 대해서도 똑같은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여러분이 만일 의문을 제기하신다면 왜곡된 사회성이나 감정이 영적인 면을 얼마나 장구히 손상시킬 수 있는지를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영적인 복지와 용도를 내다보고 이사회성과 감정을 잘 조절하고 연결해 주어야지 그 면들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격리나 지나친 규제로 말미암아 자녀의 사회성을 해친다면 이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자녀의 재능을 항구적으로 저해하거나 혹은 심지어 자기 형제들과도 원만하게 지내지 못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온전한 아버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자기가족을 잘 부양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한 아들이 자기 가정을 떠나려고 했으며, 아버지는 아픔을 감당할 각오를 하고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들이 몸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멀리 떨어져있을 때에도 자기 가정에 대한 인상은 결코 때나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은 잘 정돈된 자기 아버지의 가정을 기억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의 마음까지도 말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적어도 자비와 영접은 기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자녀가 가정을 떠났을 때 우리를 생각한다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하나님이 그들을 18년이나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을 우리에게 맡겨 놓으신 동안 그들은 가정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을까요?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까? 이런 종류의 앎은 쉽사리 형성되거나 빨리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감정(感情)이라는 댓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내 말을 잘 듣도록 하기 위해 내가 먼저 잘 들어주는 것, 부모로서 너무 성급하거나 그릇된 판단을 내렸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 등등 이 모두는 우리 자녀로 하여금 우리를 인식하고 우리를 신뢰하게 만듭니다

누가복음 15장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을 위해 문을 열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아버지 편에서 스스로 한 일이었지, 아들의 요청에 의해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아버지가 무거운 슬픔과 염려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인내하면서 자기 아들을 기다렸다는 점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그 가정에는 동정심과 사랑, 용서, 은혜가 모두 풍성했습니다. “그렇게 될 거라고 내가 미리 말했잖아!”라는 책망이나 혹은 불필요한 구박 내지 장래에 관한 경고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때를 정확하게 맞추었으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했습니다. 밭에서 돌아온 장남을 다루는 일에 있어서도 그 아버지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특성들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자기 아들에게 간청했습니다. 아버지는 축하연에 그냥 서 있질 않고 친히 밖으로 나가 아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한 아들은 방탕했고, 또 다른 아들은 교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는 결코 자제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제력을 잃었던 경우는 단 한 번, 돌아오는 탕자를 맞이하러 나갈 때였습니다. 그는 기쁨의 눈물과 용서의 입맞춤으로 자제력을 잃었던 것입니다!

자녀를 다룰 때 자제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징계이건 친절이건 분노나 나약의 표현이 되어서는 안되며, 오직 자녀의 복지만을 최고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말씀 드린 것 외에도 여러분은 더 많은 사항을 첨가시키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무거운 짐이나 축복을 모두 함께 나누는 생활을 해야 하며, 요셉과 마리아처럼 경험을 함께 나누면서 시련을 받을 때 서로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의 온전한 아버지를 통해서 자신의 결함을 상기하고 실망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목표로 삼아 정진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자기 아들을 통찰력 있게 연구한 마리아와 자기 가족의 영적인 면과 사회적인 면을 개발해 준 요셉을 통해서도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1995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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