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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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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8. 10:51 횃불/1995년

인물 중심 성경공부(5)

W. W. 페러데이

자비로운 창조주

요나서의 마지막 구절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는 그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복스런 통찰을 주기 때문입니다. 멸망하는 죄인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복음 멧세지를 통해 우리에게 미쳤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깊은 소원과,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그분의 마음을 드러내 줍니다(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것을 드러내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나서 4:11은 요한복음 3:16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세상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게 되지만 전자에서는 말씀하시는 이가 창조주이신데다 그분의 무정한 종을 나무라는 어조를 띠고 있습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중에 니느웨의 미력한 12만의 아이들과 육축도헤아리셨습니다. 그리고 왕과 그 백성의 회개는 그분의 마음을 흡족케 하여 적어도 당분간 심판의 칼을 거두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그분의 행하심에 마음으로 동참하지 못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그분의 마음은 두 경우에 특별히 연민의 정을 드러내셨습니다.

마태복음 9:36에서 그분은 백성들의 영적인 필요에 대해 동정을 느끼셨습니다. 그 땅은 종교지도자들로 가득찼으나 백성들의 영혼은 채움을 입지 못했습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그리고 마태복음 14:14에서 분은 그들의 일시적인 필요에 대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분은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수천의 굶주린 남녀 어른 및 아이들이 아무 얻을 것 없는 광야에서 그분을 둘러싼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의 그러한 마음에 동참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결과야 어떻게 되든 일단 무리를 보내라고 그분께 재촉했습니다. 백성들의 압박이 그들을 짜증나게 하고 그들의 편안을 훼방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 당하는 세상 한 가운데서 살며 섬기고 있으며, 그 고통은 인간의 점증하는 강포로 인해 날로 커갑니다. 우리의 마음은 이러한 우주적인 심각한 필요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요? 하나님의 마음은 무리를 깊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거기에 동참하는지요? 불행히도 우리의 봉사가 의례적이고 형식화되어 우리를 보내신 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채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무한한 동정을 지닌 하나님의 마음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요나의 잘못 중 하나는 그의 강한 민족주의였습니다. 그는 깊은 죄에 빠진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는 즐거워할 수 있었으나 다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는 즐거워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3:29의 사도의 질문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그 답을 보십시오.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 6:9)

바울은 그의 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의 축복을 소원했습니다( 10:1). 그 열망이 뜨거웠을 때는 그의 동족을 위해 그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조차 원할 정도였습니다( 9:3). 출애굽기 32:32의 모세의 자기희생적인 기도와 로마서 9:3의 바울의 열망은 분명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든 전도자들의 자기희생에 의해서는 죄인들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만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은 할례받지 않은 자들을 향해 세상 끝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곳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를 기뻐했습니다( 15:20). 로마서 10:12,13에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엄청남을 그 어떤 곳에서보다도 분명하게 선언했습니다. “유대 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느니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나 유대 백성으로 인해 사도의 마음은 몹시 분개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 계단에서 강론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조용히 듣던 유대인 무리가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말을 듣더니 분을 격발하며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고함쳤습니다( 22:21,22).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에서 유대인들의 죄목을 열거하다가 끝에 가서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 게 임하였느니라”(16). 민족적인 감정은 전진을 거부합니다. 심지어 원하지 않는 복음조차도 널리 전파되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세상은 온갖 죄악으로 들끓고 있습니다. 사단이 온 세상을 불법과 강포로 가득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돌보기를 중단하신 것일까요? 그분은 여전히 열방의 왕이 아닐까요?( 10:7) 그분은 예전처럼 지금도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자기 뜻대로 행하시지않을까요?( 4:35) 그분의 말씀을 경히 여긴 까닭에,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을 항상 멸시한 까닭에 하나님의 손이 모든 대륙의 범죄한 나라들을 향해 뻗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을 향해 연민을 가집니다. 그분의 관심은 어느 한 민족에나 민족들의 한 그룹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제외한 어느 민족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은적이 없으며, 이스라엘에 대해서도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라”)가 오래 전에 선언되어 여전히 철회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창조주께서는 아무리 완고하다 하더라도 그분의 백성의 고난을 돌아보기를 결코 멈출 수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성도들도 그분의 연민의 마음을 공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는 그의 백성의 가증한 대적인 모압에 대해 심판을 선포해야 했을 때 큰 슬픔을 느꼈습니다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15:5).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같이 소리를 발하며 나의 창자가 길헤레스를 위하여 그러하도다”( 16:11). 또한 환상 중에 바벨론의 운명이 눈 앞에 보였을 때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이러므로 나의 요통 같은 고통이 심하여 임산한 여인의 고통같은 고통이 내게 임하였으므로 고통으로 인하여 듣지 못하며 놀라서 보지 못하도다”( 21:3). 예레미야도 모압에 대해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피리같이 소리하며라고 부르짖었습니다( 48:31~36).

민족적인 감정으로 인해 도처에 민족분쟁이 일어나는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는지요. 만일 우리 자신이 그 영향을 받도록 허락한다면 각종 매스컴들이 우리 마음을 민족적인 감정으로 가득 채우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이 러 한 경향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 3:6)은 만민을 위한 기도처가 되어야 했으며 ( 11:17, 56:7), 우리는 디모데전서 2장에서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그리고 선악을 불문하고 모든 권세 잡은 자를 위해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는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재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 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앉으시고 성령께서 땅에 계시는 동안) 그분의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기 위해 열방을 찾아오십니다( 15:14). 그 결과 세계각지에 우리의 믿음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실을 인식하고 한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면 전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을는지요!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을 향한 연민이 가득합니다. 우리 마음이 그와 다르다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일까요.

 

이스라엘의 모형

요나서가 비록 이사야, 에스겔 등에서 발견되는 예언적인 언급은 없지만 성격상 예언적이라는 점은 이미 밝힌바 있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3일간 머문 일에는 오실 그리스도가 분명히 예표되었습니다.

당시에 세계 최대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하도록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요나에게 큰 영예였습니다. 요나는 마땅히 여호와의 마음과 생각을 깊이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어두운 이방에 하나님을 충실히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점에서 선지자는 실패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43:10). 구약성경을 대충 훑기만 해도 우리는 이스라엘이 중심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홍수 후 약 4세기가 지나고 새로이 형성된 모든 민족들이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부르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주적인 축복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12:3). 이삭을 제물로 드린 일이 있은 후에 이 말씀이 확인되고 확장되었습니다.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 22:17,18)

이 큰 은총을 입은 민족만이 축복을 독점한다는 뜻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성소는 만민을 위한 기도하는 집이어야 했습니다( 56:7). 그것은 이스라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해 아는바를 열심히 전파하는 선교하는백성이 되기보다는 하나의 표본백성이 된다는 뜻을 내포했습니다. 하늘로부터 직접 받은 온전한 율법을 소유한 까닭에 그들의 모든 삶은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해드려야 했으며 주변의 민족들에게는 경종이 돼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은 하나님께 성별된 그들의 특권적인 위치(이것만이 그들로 세상에 복이 되게 할 수 있었습니다)에 충실치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웃 백성의 악한 행실을 본받았으며 그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욕을 받는도다는 엄한 책망을 자초했습니다( 2:24).

요나의 불충성이 이방 선원들에게 폭풍을 가져다 준 것처럼 이스라엘의 불충성은 그들의 범죄한 지도자들에게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택한 백성의 죄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여호와께서는 느부갓네살을 사용하여 이스라엘과 그 주변의 모든 민족들을 징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 중심으로 삼으신 모든 열방 조직이 붕괴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씨가 세상에 축복이 아닌 저주가 되었습니다.

요나와 그의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인내는 놀랍습니다. 그 고집센 선지자와 얼마나 인자하게 변론하셨는지! 그리고 에스라 시대부터 주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유대인 잔존자의 위선을 얼마나 인자하게 참으셨는지! 그 때에도 그분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에게 1년의 유예기간을 더 줄 것을 제안하셨습니다( 13:6~9).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께서 하신 증거들은 아무 효험도 없었으며, 다시 한번 백성들은 고토에서 쫓겨나고 열방 가운데로 피신했습니다. 요나의 축출은 그 일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흐름은 인간의 죄로 인해 막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완고한 상태에 있는 동안 성령께서 이방인 중에 역사하며 하늘에 속한축복을 주시고자 그들 가운데서 수많은 백성들을 모으십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신부로 영원히 그분과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습니다( 11:12). 니느웨의 수많은 백성이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 즐거워하는 동안 요나는 불쾌하고 분노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안디옥의 많은 이방인 신자들이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 동안 유대인들은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했습니다”( 13:44~52).

크고 놀라운 변화가 다가옵니다. 이스라엘의 소경됨은 전체적이 아닙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모아질 때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1:25~26). 이들은 믿는 잔존자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9:6). 완고한 반역자들은 제함을 당할 것입니다( 20:38). 회복을 받은 백성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처럼 세상 앞에 설 것입니다. 에스겔서의 마른 뼈의 계곡에 대한 환상이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37). 다니엘서 12 2(종종 잘못 이해되는 구절임)도 같은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민족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여러 세기동안 진토에 파묻혀 있다가 그들은 다시 한번 정치적인 무대에 나타날 것입니다(1948년 이스라엘은 독립을 이루었습니다-역주). 믿는 잔존자들은 영생 (지상적인 상태의)을 누릴 것이고 거역하는 자들은 부끄러움과 영원한 모멸에 처할 것입니다. 요나가 물속에 3일을 있다가 다시 나온 것은 이 사실을 상징해 줍니다. 이에 대한 관련구절로 로마서 1115, 호세아 6 2절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백성들은 요나와 달리 하나님의 자비를 기뻐하면서 다른이들에게 기꺼이 축복을 나눠줄 것입니다 시편 67편은 그 위대한 날에 그들이 즐거이 부를 노래를 보여줍니다. “모든 민족으로”, “땅의 모든 끝이등의 표현들을 주목하십시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96:1).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즐겁지가 않았습니다!

주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에 온 세상은 넘치는 축복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은 요나의 영이 완전히 제거되어 그 축복을 즐거워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만 아니라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여호와로 알려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38:23). 이러한 축복된 결과가 요나의 선원들의 경우에까지 미쳤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섬기던 헛된 신에서 돌이켜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1:16).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그분의 축복된 섭리를 오랫동안 거스리다가 그분의 행사가 얼마나 놀라웠는가를 깨랄게 될 것이며, 그 때 그들은 사도와 함께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11:33). 요셉의 형제들의 행위를 좇아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도들에게 행한 모든 것에서 악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한 지혜가운데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50:20). 그분은 대적의 모든 역사에 대해 마침내 승리를 거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의 모든 목적이 영광스런 성취에 이를 것입니다.

성안에는 기쁨과 평안이 있는 중에 성밖에서는 선지자가 원망하는 모습으로 요나서는 끝을 맺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그의 백성의 모형이 아니었습니다. 다가올 우주적인 축복의 날에 이스라엘은 그 모든 축복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오랫동안 거절당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존귀를 얻으신 중에 백성들은 스스로 즐거워할 것이며,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는 주변의 모든 백성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또 즐거워할 것입니다.

모쪼록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진실로 넓은 마음을 허락해 주시기를 법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의 섭리를 이해하고 인정하게 될 것이며 거기서 우리 영혼을 위한 기쁨과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1995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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