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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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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1. 16:21 횃불/1995년

J. N. 다아비의 성경 개요

마 태 복 음

12

마침내 하나님 편에서 완전히 다른 조직, 즉 특별한 형태의 나라를 가져오기 위해서 그분이 그들과의 모든 관계를 중단한 일뿐 아니라 주님을 경멸한 결과로 백성들이 거절당한 일이 명백히 나타납니다. 본장은 전체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입니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에 대한 거룩한 증인이며 세례 요한은 다른 이가 그렇게 원하듯이 그분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분은 더 이상 증거된 메시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서 계셨으며 요한에게 완전한 증거를 하십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경고와 또한 은혜로 증거된 하나님을 이미 거절한 상태였습니다. 오직 잔존자만 남았습니다. 지혜는 그 자녀들에게서 옳다 인정함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자신이 거절당하는 것을 아버지의 뜻으로 여겨 순복하십니다. 그러나 그 일은 그분을 그분의 개인적인 영광, 즉 그러한 거절의 참된 근거에 대한 인식으로 이끌어줍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아버지로부터 그분에게 주어졌습니다. “아무도그분을 알 수 없었고, 그분이 계시해 주지 않으면 아무도 아버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분의 온전하심에 의해 시험을 받은 온 세상은 악한 데 처한 것으로 발견되었으나(비록 소수의 잔존자가 있었으나) 그러나 인간은 우주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떠났습니다. 그분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늘에서 내려다 보셨지만 사람들은 치우쳤으며 의인은 없되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으실 때는 판단 받은(그분의 거절하심을 통해) 세상에 홀로 서셨지만 이제는 아버지를 계시하고 또 그 자신 안에 있는 그러한 은혜에 대한 계시를 상기시키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주권적인 은혜 안에 계십니다. 이것이 이제 막 취한 새로운 위치입니다. 그분은 앞서 인간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분의 어떠하심 그 자체가 그들이 그분을 영접하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이제 곤한 자는 그렇게 홀로 서신 분께로 나와야 했으며 그분은 그들에게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완전히 굴복한 그분에게서 배워야 했으며, 그로써 그들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안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부복한 곳에서 우리는 천상적인 높은 근거에서,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증거된 우리의 특권의 의식적인 소유로 들어갑니다.

그분의 위(), 이 세대를 종결 지을 그분의 권리에 대한 문제를 야기시킨 첫째 상황은 제자들이 허기를 채우려고 밀이삭을 잘라 손으로 까불린 일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그 날이 안식일이므로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악의에 의해 거절을 당한 왕이 제사장에게만 주어진 것을 먹은 일을 그들 앞에 진술합니다. 이 다윗의 자손께서는 유사한 경우에 유사한 특권을 누릴만 하셨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은혜 안에서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또한 제사장도 성전에서 일하면서 안식일을 범했습니다. 그리고 성전보다 더 큰 분이 여기에 계셨습니다. 게다가, 만일 그들이 진정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면, 만일 그들이 그분의 말씀이 그분께 합당하다고 선언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the Spirit)의 지배를 받았다면, 그들은 무죄한자를 정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분은 더 이상 메시아 칭호를 취하지 않고 인자-상황의 새로운 질서와 한결 확장된 권세를 말해주는 이름-의 칭호를 취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이 하신 말씀은 중요한 의미가 있었는데 이는 안식일은 여호와와 백성들 간의 언약의 증표였기 때문이며( 20:12~20) 또한 인자께서 안식일에 대한 자신의 권세를 선언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범해진다는 것은 곧 언약이 파기되는 것을 의미 했습니다.

동일한 질문이 회당에서 제기됩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은혜 안에서 활동하며 선을 행하시면서 그들도 그들의 한 마리 양을 위해 같은 일을 한다고 지적해 보이십니다. 이것은, 그분의 은혜의 권능의 증거가 풍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증오심만을 자극합니다. 그들은 살인자의 자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물러나시고 큰 무리가 그분을 따릅니다. 그분은 그들을 고쳐주시고 그분을 알리지 말라고 경계시키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있어 그분의 행사는 이 당시의 주님의 위치를 분명히 추적해내는 예언의 성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승리의 심판을 내릴 시간이 임할 것입니다. 그 사인에 그분은 완전한 겸비의 위치를 취하셨으며 그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그것을 인정하고 필요로 하는 자들의 마음을 끌 수 있었습니다. 그리나 이러한 은혜를 행사하고 진리에 대해 증거하시는 중에 그분은 그러한 특성을 왜곡시키거나 사람들의 관심을 돌려 그분의 진정한 사역을 방해하거나 그분이 그 자신의 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을 사람들로 의심하게 할만한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신()이 자신의 사랑하는 자인 그분에게 임했으며 그 안에서 그분의 영혼은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방에 심판을 선언하실 것이고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의뢰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이 이 순간에 예수님께 적용된다는 것은 명명백백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분이 유대인들을 경계하여 자신에 대한 들의 육신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를 금하셨으며 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한 뒷전에 머물러있는데 만족하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심판의 집행을 통해서든 아니면 그들이 의지할 분으로 그들에게 그 자신을 제시함으로써든 곧 이방인에게 선포되실 것입니다.

이 이사야 본문이 성령에 의해 여기에 인용된 것은 그분의 거절이 우리를 위해 예비해 주는 새로운 장면들을 펼쳐 보이기 전에 그분의 위치를 정확히 제시해 보이기 위함이 분명합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눈 멀고 벙어리 된 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아주시는데, 그 귀신들린 자의 비참한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의 모습을 묘사해 줍니다. 무리는 크게 놀라며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종교주의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는 주님을 시기하고 하나님의 증거를 거스리며 예수님이 바엘세불의 능력으로 그러한 기적을 행했다고 말함으로써 그들 스스로의 상태를 인치고 스스로 하나님의 분명한 심판 아래 처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한말의 불합리함을 지적하십니다. 사단은 그 자신의 나라를 멸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 그들 자신의 자녀들은 그들의 불법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사단의 능력이 아니라면(그리고 바리새인들이 귀신이 진정 쫓겨난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물건을 약탈하려고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간 사람은 먼저 그를 결박해야 합니다.

사실인즉, 예수님의 임재가 모든 것을 시험대에 올려놓았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모든 것이 그분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임마누엘 자신이 거기에 계셨습니다. “그분과 함께 하지 않은 자는 그분을 대적했습니다. “그분과 함께 모으지 않은 자는 헤쳤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그분만을 의존했습니다. 그분은 그 자신의 위()에 대한 모든 불신앙을 감내하실 것입니다. 은혜는 그러한 것을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죄를 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말로 거스리고 모독하는 것(, 하나님의 것인 능력의 행사를 인정하고그것을 사단에게 돌리는 것)은 사함 받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귀신이 쫓겨난 것을 인정했으며, 그들이 그것을 사단에게 돌린 것은 오로지 악의와 하나님께 대한 공개적이고 고의적인 증오감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용서가 있을 수 있을까요? 율법 시대에도, 메시아 시대에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행한 자들의 운명은 결정지어졌습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그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했습니다. 열매가 나무의 성격을 증명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악했습니다. 그들은 독사의 자석이었습니다. 요한도 똑같이 지적한바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그들을 정죄했습니다. 이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구했습니다. 이것은 다름아닌 사악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이미 충분한 표적을 목도했습니다. 그것은 다만 다른 사람들의 불신앙을 자극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요청은 이 세대의 심판을 선언할 기회를 주님께 부여합니다.

이 악한 세대를 위해서는 요나의 표적밖에 없었습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듯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미 거절당하셨습니다.

니느웨 백성이 그들의 행동으로 심판 날에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인데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방 여왕도 이 완악한 세대의 악함을 쳐서 증거했습니다.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식에 매료되어 땅 끝에서 그를 찾아왔는데 여기에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있었습니다. 가련하고 무지한 이방인들이 선지자를 통해서든 왕을 통해서든 그분의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를 그분의 사랑하는 백성보다 더 잘 이해했습니다. 위대한 참 왕이자 선지자께서 그 백성 중에 계신 상황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판단은 이러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나간 더러운 귀신(우상숭배의 영)이 이스라엘(이스라엘이 그 진정한 집인데 이는 그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전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밖에서 쉴 곳을 찾지 못하고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귀신들이 와 보니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결국 나중 형편이 처음 형편보다 더 심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가운데 행하신 자들이 더러운 귀신, 더러운 귀신들의 거처가 된다니 이 얼마나 백성들에 대한 엄위한 심판인지요! 완전수를 말하는 일곱 귀신 (하나님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 일으켜 모두를 자기파멸로 이끌려 하는)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다른 더러운 귀신,즉 그들이 피한 파산한 우상숭배에 다시 그들을 끌고 들어가려 하는 귀신도 동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그 자신과 백성 사이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던 결속을 공적으로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형성되고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 그 특성을 드러낸 자들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분을 오직 그들만을 자신의 친척(relations), 즉 산상수훈의 본을 좇아 형성된 자들로 인정하고자 하셨습니다.

 

13

이후의 그분의 행동과 말씀은 그분이 지상에서 진정 행하고 계신 새로운 일을 증거해 줍니다. 그분은 집을 떠나 바닷가에 앉으십니다. 그분은 무리에게 자신의 진정한 사역을 선포하기 위해 외부에서 새로운 위치를 취하십니다.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러 나간 것입니다.

주님은 더 이상 자신의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그러한 열매를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따른 필수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잘 알고 계셨던바 그분의 진정한 봉사는 열매를 맺을수 있는 것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지 사람들에게서 뭔가를 발견하는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씨 뿌리는 자로서의 그분의 사역의 가시적이고 외형적인 결과를 말씀하신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이 여기서 자신의 심판의 내적인 원인에 대해 표현하는 유일한 대목은 뿌리가 없으므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것은 사실의 문제입니다. 열매를 맺는데 필요한 신적인 작용에 관계된 교리들은 여기에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은 씨 뿌리는 자와 그 씨뿌림의 결과이지 씨로 땅에서 싹트게 하는 요인이 아닙니다. 첫번째 경우를 제외하고 매 경우마다 확실한 결과가 생겨납니다.

주님은 이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이전 관계와 동떨어진 사역을 시작하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그분은 말씀의 씨앗을 지니시며, 그것을 사람들의 마음에 뿌리십니다. 말씀이 거하고, 말씀이 깨달아지고, 말씀이 막히거나 말라버리지 않는 곳에서 그 말씀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 또 그것을 지닌 자의 행복과 유익을 위해 열매를 맺습니다.

11절에서 주님은 무리에게 비사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이제 잔존자와 백성들 사이에 구분이 명백해졌습니다. 백성들은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 선언된 소경됨의 심판 아래 있었습니다. 임마누엘, 메시아, 즉 그토록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의 소망과 바램의 대상이신 분을 본 제자들의 눈은 복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심판과, 부름받고 보존된 잔존자를 부각시킵니다.

그러면 이제 주님께서 비유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사람들의 특성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말씀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마음에 뿌려질 때, 그것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 지성이나 감정, 혹은 양심의 관계도 맺지 못할 때는 원수가 그것을 가져가 버립니다. 그것은 마음에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이라고 그보다 덜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은 모든 필요에, 인간의 성품과 상태에 적용되었습니다.

다음에,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마음이 말씀을 오래 보존하지 못하는 결과로 흔히 이어집니다. 그런 경우에는 말씀이 양심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의해 찔림을 받은 양심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듭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분의 은혜의 흡인력이 어떠하든 혹은 그분의 선하심에 감화된 소망이 어떠하든 항상 심각한 것입니다. 만일 말씀이 양심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거기에는 뿌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주는 기쁨으로 인해 말씀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말씀으로 인해 환란이 올 때 그 말씀이 포기되는 것입니다. 양심이 이미 각성되었을 때는 복음은 즉시 기쁨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는 복음은 참된 역사가 있는 곳에서 양심을 일깨웁니다. 첫번째 경우에는 복음이 이미 있던 필요에 대한 해답으로서 그 필요를 충족시킵니다. 두번째 경우에는 복음이 그러한 필요를 생성시킵니다.

슬프게도 우리가 날마다 보고 듣는 상황은 세번째 부류입니다. 나쁜 의도는 없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그런 상황입니다.

말씀이 깨달아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자들에 대한 유일한 증표로 나와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영혼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이끌어주는데 이는 말씀이 하나님을, 그분의 어떠하심을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말씀을 깨닫는다면 저는 그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리스도)을 참으로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이제 빛의 정도가 어떠하든 간에 예수께서 뿌리시는 말씀에 의해 알려지는 이는 항상, 그렇게 계시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말씀에 의해 태어난 까닭에 이 세상에서 여러 방법을 통해(in diverse measures) 하나님의 생명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여기서의 주제는 예수님에 의해 전해진 진리를 받아들인 결과(이 세상에서의)입니다(천국이나, 씨가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이 비유는, 비록 뿌려진 말씀이 왕국의 말씀이긴 하나, 왕국에 대해 비유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으로 적용되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요한 기본 원리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 원리는 그분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분의 위와 사역 안에서 실현되었습니다. 물론 그분이 가신 후에는 은혜의 보다 충만한 주제들이 주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여섯 가지 비유에서 우리는 왕국에 대한 비유들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왕이 거절당하는 동안 세워진, 그리고 결과적으로 독특한 성격을 지니는 왕국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왕의 부재(不在)에 의해, 그리고 그에 더하여, 첫번째 비유에 대한 설명에 의하면, 그분의 재림의 결과에 의해 특징 지워집니다.

이 여섯 비유 중 앞의 세 비유는 왕국을 이 세상에서의 외적인 형태로 제시합니다. 이 비유들은 무리에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비유는 성령의 평가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보여진 그 속성의 실재-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과 지혜-에 따라 왕국을 제시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나중의 비유들은 제자들에게만 전해집니다. 하나님의 의와 능력 안에서의 왕국의 공적인 설립도 역시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을 통해 제자들에 게 선언됩니다.

그러면 먼저 무리에게 공개적으로 선언된 왕국의 외면-왕국이 취할 외적인 형태-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왕, 즉 주 예수께서 지상에서 거절되었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그분을 거절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죄했다는 것,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분의 일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사용된데서 알 수 있듯이 주님께서 의와 심판에 있어 행사된 그분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증거하심으로써 왕국을 세웠다는 것을 알리셨다는 것, 그리고 이제 왕국이 인간의 책임과 관련된 특성을 지녔고, 빛의 말씀이 땅에 떨어진 결과사람들의 마음에 전해졌고, 하나의 진리의 체계로서 사람들의 신실함과 돌봄에 맡겨졌다는 것(그러나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과 진리 자체의 보존을 위해 그분의 주권적인 권리를 쥐고 계십니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 괄호 속의 내용은 이 비유들에서 다뤄진 주제가 아닙니다. 다만 여기에 삽입한 것은 모든 것이 인간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그 모든 것이 인간에게 전적으로 의존되었다면, 모든 것이 잃어졌을 것입니다. 첫번째는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그것은 왕국과 관련한 그러한 씨뿌림의 결과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혹은 왕국을 잠시 이 땅의 사람들의 손에 맡긴 결과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여기 이 땅에서의 왕국은 더 이상 주님 자신의 사역의 모습을 전체로서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가라지를 뿌리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부주의와 연약으로 인해 원수가 그러한 가라지를 뿌릴 기회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이교도나 유대인에게 적용되지 않고 사단에 의해 악한 교리, 악한 교사 및 그들의 추종자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무리가운데 행해진 악()에 적용됩니다. 주 예수님이 씨를 뿌리셨습니다. 사단도 사람들이 자는 사이에 씨를 뿌렸습니다. 유대주의자들과 철학자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두 부류에 찬동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구약의 진리를 거부한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좋은 씨만을 뿌리셨습니다. 그렇다면 가라지는 뽑아야 하지 않을까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왕국의 상황은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그러한 상황에 대해서도 빛을 던져줍니다. 그러나 전에 악을 제지하기 위해 있었던 힘보다는 약하지만 여전히 처방을 가져다 줄 힘이 있었습니다. 추수 때에 왕이 개입하시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처방되지 않은 채있어야 합니다 지상의”(그것이 사람들 손에 있으므로) 천국은 혼합된 체제로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의 열매만이 아니라 이단과 거짓 형제들이 있어서, 인간에 대한 그러한 하나님의 마지막 섭리에 있어서 인간이 그 최초의 상태에 있어 선하고 순수한 것을 보존할 능력이 없음을 증거해 줄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그러했습니다

추수 때에”(추수와 관련된 사건들이 일어나는 일정한 기간을 암시하는 문구) 주님께서는 그분의 섭리 가운데 먼저 가라지를 다루실 것입니다. “그분의 섭리 가운데라고 표현한 것은 그분께서 천사들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불태워지기 위해 단으로 묶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외적인 상황, 곧 기독교 안에서 자라온 부패를 일으키는 요인들이 여기서 다루는 주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들은 그 일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종들의 연약과 부주의로 말미암은 혼합은 정도가 심해서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마저 뽑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 일을 하는데 있어 분별력뿐만 아니라 가려 뽑는 실질적인 능력도 부족할 것입니다. 일단 가라지가 있는 한 종들은 그것이 이 세상에, 기독교 내에 존재하는 상황에 대해 관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봉사는 선한 것에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계를 정화시키는 일은 그들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은 것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일로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지식과 아무것도 피하지 못하는 능력의 완전함을 좇아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분에게 속한 일입니다.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을 경우 하나는 취해가고 하나는 남겨둘 줄 아는 그런 분에게 속한 일인 것입니다. 이 세상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일의 집행을 친히 맡기신 그분의 권능의 천사들을 통해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가라지를 단으로 묶은 다음에 그분은 곡식은 그분의 곳간 안에 모아 들이십니다. 곡식은 단으로 묶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그 모두를 스스로 취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왕국의 외관(外觀)에 관계된 것의 종국입니다. 이것이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모든 것은 아니지만 이 13장의 이 부분이 말하는 주제를 마감해 줍니다. 예수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그분의 씨뿌림의 결과는 원수의 일로 인해 이 땅에서 전체적으로 방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종국에 가서 그분은 원수의 모든 일을 단으로 묶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심판을 쏟을 준비를 하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교회를 취해 가실 것입니다. 그 일은 분명 그분이 계시지 않는 동안 진행되던 지상의 상황을 종결 짓습니다. 아직 심판이 집행되지는 않았습니다.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기 전에 주님은 그분이 계시지 않는 동안 왕국이 취할 형태에 대한 다른 그림들을 보여주십니다.

겨자씨처럼 뿌려진 것이 큰 나무가 됩니다. 이것은 이 땅의 큰 권세를 상징합니다. 앗수르군, 바로, 느부갓네살 등은 성경에 큰 나무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후에는) 주님의 제자들에 의해 뿌려진 말씀을 통해서 작게 시작된 왕국의 형태가 그러할 것입니다. 이 씨가 맺은 것이 점차 큰 세력의 형태를 갖추고 지상에서 유명해져서 새들이 나뭇가지에 깃들듯이 다른 것들이 그 아래로 숨어들 것입니다. 실로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왕국이 이 땅의 큰 나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퍼뜨릴 하나의 교리체계-그것이 미치는 모든 것을 그 영향의 범위 안에 가둬둘 하나의 고백신앙-로 특징지워진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서말의 가루 전체가 부풀게 될 것입니다. 누룩이란 단어가 성경 기자들에 의해 항상 나쁜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누룩이 개인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여 그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말씀의 중생케 하는 능력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바로, 느부갓네살, 그밖에 다른 성경의 큰 나무들과 같이 단순히 외적인 힘으로 역사하는 세력도 아니라고 일깨워줍니다. 그것은 무리를 특징지우고 그 자체를 전체에 퍼뜨려야 할 하나의 교리체계입니다. 그것은 믿음도 생명도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 곧 기독교입니다. 진리도 하나님도 생각하지 않는 마음으로 교리를 고백한다는 것은 항상 교리 그 자체에 있어서의 타락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누룩의 비유는 무리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을 마감 짓습니다. 모든 것이 비유로 그들에게 전해졌는데 이는 그들이 그분을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거절당함을 상정(想定)한 상황과, 구약의 계시에는 알려지지 않은 왕국의 한 측면을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은 권능의 왕국을 염두에 두거나 아니면 거절당한 선지자-왕의 말씀을 고난 중에 받아들인 소수 잔존자를 염두에 둡니다.

 

(1995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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