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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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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11. 16:18 횃불/1995년

결혼과 가정 (6)

상처난 가정

A. J. 히긴즈

나발과 아비가일의 결혼에 있어서는 의사소통이 문제의 원인이었고,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있어서는 자녀가 갈등의 원인이었다면 야곱과 그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간에는 경쟁과 양립의 문제가 늘 따라다녔습니다.

창세기 30:1을 보면 우리는 그 좋은 예를 확인할 수 있는데, 야곱은 레아를 통해서 자녀를 얻었지만 라헬을 통해서는 얻지 못하였으므로 라헬은 질투심에 복받쳐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질투심에 기인했다고 지적하고 있으므로 그녀의 욕심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소유한 것을 자기도 소유하고자 하는 질투심으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많은 결혼생활이 경쟁심이라는 암초에 부딪혀 파선되었습니다. 젊은 부부들은 결혼을 한 후 물질을 먼저 소유할 목적으로 빚을 지고 자신들과 자신들의 장래까지 저당 잡히는데 이 것은 다른 사람이 소유한 것을 자기도 소유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실은, 다른 사람이 그 물질을 획득하는데 수년이 걸렀을지도 모르는 것을 그들은 하룻밤 새에 갖고 싶어한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발생하는 이혼 중 과반수 이상이 바로 금전문제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고 근간에 밝혀졌습니다. 부채를 지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그러면 자연히 서로를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표와 우선 순위는 설정되지 않고, 예산도 세우지 않으면서 만족만 급히 채우려 들며, 참고 기다리는 것을 어리석은 일로 여깁니다.

결혼을 생각하는 예비 부부들은 경제적인 문제를 서로 의논하면서 자신들의 자금과 그 한계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매와 부채를 신용(외상)으로 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젊은 신자들은 결혼생활의 초기부터 특히 이것을 피해야 합니다. 라헬의 욕심만 올바르지 못한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강요도 잘못된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야곱은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라고 바르게 대답했는데 이로 미루어 그녀는 주님께로부터 부여된 상황을 받아들이기보다 자기 남편을 비난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주님께 간구하여 열매를 얻은 이삭과 리브가의 경우와 얼마나 다릅니까( 25:21)!

배우자들도 라헬처럼 때때로 그릇된 시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는 못 가진 까닭에 남편이 아내를 비난하고 아내도 남편을 비난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보고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나가지 못한다고 책망하면 아내는 남편보고직장에서 승진을 하지 못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리고 얼마 없으면, 경제적인 사정이 호전될 때까지 가정은 뒤로 미루고 맞벌이를 하는게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렇다고 필자가 지금 직업을 가진 여성들을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물질을 가졌다고 과시하고 싶어서 그렇게 할 때는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심지어는 사회학자들이나 세상 사람들까지도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끼치는 엄청난 악영향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과 사회, 결혼생활을 혼란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라헬의 경우를 재고해 보면 문제를 해결하고자 꾸며낸 그녀의 계책 역시 잘못되었음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자기 남편을 비난하면서 그녀는 편법을 사용했는데 그러나 이것은 그녀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소유한 것을 나도 소유하려고 싸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것이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통 가운데 배우고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불행한 사실은,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고 소리쳤던 여자가 자기 말대로 둘째 자식인 베냐민을 출산할 때에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라헬과 야곱은 또 다른 문제를 추가시킵니다. 야곱의 일부다처에 기인된 어떤 특별한 차이점들이 존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라헬과 야곱 사이에도 어떤 양립(compatibility)의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30:14~18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결혼생활 가운데에는 육체적인 문제도 역시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그릇된 기대감에 기인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연애기간 동안에 계속 억제되던 모든 정()들이 비현실적인 기대감과 더불어 결혼생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 억제력은 철수되고 부부는 즉각적이고도 항구적인 황홀감을 맛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 기대감이 충족되지 못하면 한 쪽은 실망감과 더불어 이것을 사랑의 결여 매지는 실제적인 것의 결여로 간주합니다. 또 감정적인 경험과 아가페 사랑을 동일한 것으로 혼동한 어떤 배우자는 자기들이 정말 사랑하고 있는지 회의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과 아내는 결혼생활 가운데 이 가장 밀접한 접촉의 영역에 있어서도 인내심과 이해심을 나타내야 합니다. 다른 예를 든다면, 남편은 아내가 음식을 즘 태웠다고 해서 이것을 사랑의 결핍으로 간주하지는 않을 것이고, 아내는 남편이 처음 해보는 도배를 잘못한다고 해서 자기 남편의 사랑의 심도를 의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결혼생활 가운데서 가장 감정적이고, 가장 밀접한 접촉이면서도 (사회의 통념과는 달리) 자동적으로는 가장 잘되지 않는 이 면에 인내심을 왜 덜 가져야 하겠습니까? 신체적인 반응은 무척 개인적인 것이며, 남편과 아내는 자기 배우자를 만족시키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십보라

모세와 십보라의 남편과 아내 관계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결혼생활을 망가뜨리는 중대한 요소 한 가지를 간파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타협입니다. 필자가 지금 언급하고 있는 것은 각자의 권리를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그 점이 아니라 원칙을 타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면, 모세는 미디안 땅에서 아내를 얻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두 아들도 얻었습니다( 4:20). 그 후 그는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제 자기 아내와 아들들을 함께 데리고 떠나 길을 가다가 음미 해볼만한 기이한 사건을 숙소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뒤에 어떤 광경이 벌어지는지 주목해 보면, 십보라가 날카로운 차돌을 취하여 자기 아들의 양피(자기 아들들의 양피가 아님)를 베어 좌절 가운데 그것을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다음과 같이 모멸적인 말을 내뱉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이겠습니까? 할례가 하나님께서 그처럼 중요했다면 왜 오직 한 아들에게만 할례를 시행했을까요? 필자가 보기에는, 두 아들의 출생과 더불어 가족적인 위기가 모세와 십보라에게 닥쳤던 것 같습니다. 히브리 인이었던 모세는 당연히 할례를 제안했을 것이고, 십보라는 이것을 매우 혐오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을까요? 상호타협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위해서는 한 아들이 할례를 받게 되었고, 십보라를 위해서는 한 아들이 할례를 받지 않음으로써 둘 다 적당한 만족을 얻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무도 진정한 만족을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모세에 대한 그녀의 비난은, 그녀가 위의 타협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할 수밖에 없게 된 것에 대하여 화를 내고 있었음을 입증합니다.

물론 결혼생활에는 타협의 여지가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도덕과 관계없는 문제, 성경과 관계없는 문제에 국한됩니다. 예를 들면, 벽지 색깔에 대한 타협이지 하나님의 원칙에 대한 타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자의 문제에는 일치하면서도 후자의 문제에는 그렇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명백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원칙에 있어서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십보라는 처음에는 거부했었지만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 순종했는데 이렇게 한 것은 사실상 모세를 비난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배우자 어느 쪽도 상대를 이기지 못하고 둘 다 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경적인 문제에 견해 차이가 발생하면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그 문제를 함께 해결해야 합니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서로 결혼했던 사이는 아님)의 문제를 다를 때 한 쪽 편을 들거나 또는 서로 적당히 타협하라고 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했습니다( 4:2). 우리는 모든 견해 차이를 그리스도의 주재권이라는 원칙 아래 복종시키고 비록 손해를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4:5)

 

한나의 남편과 욥의 아내

필자는 위의 성경인물들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기가 망설여지며, 있다손 치더라도 극히 미미한 사항일 것입니다

하지만 위의 인물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결점을 굳이 지적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나가 이스라엘의 상태에 대해서 애통해하며 하나님께 드릴 아들이 자기에게 없음을 한탄하고 있을 때 엘가나는 자기 아내의 슬픔이 얼마나 크지 헤아리지 못하고 그녀의 태도에 대하여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상황을 순전히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한나가 남편보다는 아들을 더 바라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욥이 혹독한 시련을 당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는 많은 시련을 함께 겪다가 드디어 그에게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권하고 말았습니다.

엘가나는 자기 아내의 필요에 대하여 민감하지 못했고, 욥의 아내도 역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기 남편의 필요를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을 잘 보여 줍니다. 남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민감성이 부족한 까닭에 자기아내의 저조한 감정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자기 남편의 연약한 자아를 도와주고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적인 차원에서 반응을 나타내기 쉽습니다.

 

아브람과 사래

아브람의 결혼생활이 고통과 슬픔으로 손상된 이유는 남편의 머리됨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타협보다 더욱 멀리 하나님의 이상(理想)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 역할을 포기하고 자기 아내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용납하였던 것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는 오랫동안 아기를 못 가지던 시련으로 결국은 지쳐버린 사래가 하갈을 통하여 자식을 낳으라고 아브람에게 한 방책을 제안하자 아브람은 자기 아내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출생과 더불어시기, 미움, 고통, 분쟁도 함께 출생하게 되었습니다. 사래가 아브람 보고 자기의 충고를 애초부터 듣지 말았어야 했다고 불평하자 아브람은 또다시 자기 아내에게 결정권을 이양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대로 그에게 행하라.”

이 근시안적인 말로 인해 즉각적이고 장기적인 비극이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은 익히 아실 것입니다. 물론 사래도 잘못을 했지만 아브람도 머리됨을 포기한 것에 대하여 궁극적인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주요한 권위를 인정하면서 살고 있으며, 만일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므로 불안해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도시나 지방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의식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특히 어떤 권위의 통제를 받아야 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족 안에서도 합당한 질서와 조화가 유지되려면 머리의 역할이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여된다면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옳고 그름의 기준이 없는 상태와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남편은 어떠한 값을 치러서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입각하여 머리의 역할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다윗과 미갈

이 비극적인 결혼은 무엇이 많은 결혼생활에 치명타를 가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돌아올 때에 베 에봇을 입은 채로 여호와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이 때, 다윗의 아내로써가 아니라 사울의 딸로 합당히 칭함을 받는 미갈이 그를 보고 심중에 업신여겼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말로써 그를 공격하고 질책했습니다.

분명히 미갈은 사무엘상 17장과 18장에 나오는, 남자다운 전사(戰士)를 좋아했기 때문에 사무엘하 6장에 나오는 경건하고 겸손한 남자는 그녀의 자존심과 위신을 세워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로 보아 그녀가 사울의 딸로 칭함을 받고 있는 것은 합당한 셈입니다. 그녀는 외모와 지위, 성공, 명예 따위를 사랑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다윗에게 계 집종 앞에서 그의 몸을 드러내었다고 비난함으로써 다윗을 지나치게 정죄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가 베 에봇을 입고 있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녀는 말로써 그를 조롱하고 경멸함으로써 자기 남편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녀는 그의 가장 민감한 부분이었던 그의 자존심을 공격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결국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만약 다윗이 영적 인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무사했을 것입니다.

차이점을 다룸에 있어서 미갈의 행동은 특히 중대한 위험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나 차이점이 표면화 되었을 때 배우자 자신을 공격하지 말고 문제 자체를 공격하도록 늘 명심하십시오. 정직한 자세로 문제에 직면하여 그것이 왜 여러분을 괴롭히는지 파악하십시오. 그저 문제에만 얽매이지 말고 해결책을 구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결혼생활의 흥망성쇠는 상호 존경과 신뢰에 달려 있으므로 이 귀중한 요소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하십시오.

 

호세아와 고멜

호세아와 그의 음란한 아내 고멜의 비통한 이야기는 결혼의 궁극적인 파국을 잘 보여 줍니다. 자기 배우자에게 불성실한 것은 결혼생활에 있어서 가장 참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가합니다. 성 경에 나온 이 사례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문제의 근원이 오로지 한쪽 배우자에게만 있었다는 것입니다. 잘못은 전적으로 고멜에게만 있었지, 호세아에게는 조금도 없었습니다.

고멜과 호세아에 관한 글을 끝내면서 필자는 배우자의 불성실에 기인한 상처의 해결책을 찾아보라고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생활에서 발생하는 온갖 상처와 오해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보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이 결혼관계 속에는 문제들을 야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대단히 많습니다. 어떤 사항에 좋아질 가능이 많으면 많을수록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상대적으로 나빠질 가능성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생활을 두르는 울타리와 이 생활을 떠받치는 토대와 이 생활을 지배하는 분위기 속에는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사랑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1995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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