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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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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2. 09:13 횃불/1995년

결혼과 가정 (8)

독신생활

A.J. 히긴즈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일반적으로 결혼을 크게 강조하고 있으며, 이상적(理想的)인 생활은 소위 한 가정, 두 자녀, 자동차, , 기타 다른 사치품들로 여전히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생활 보장과 성공, 성취감과 인정받는 일 등이 결혼을 꿈꾸는 것과 뒤얽혀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보다는 오히려 교회가 결혼을 더욱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 증거로, 대부분의 교회가 역설하는 것은 부부이며, 여자의 진가는 자기 남편 및 남편의 역할과 연결되어있을 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교회의 활동들은 가정 생활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독신 생활은 극복해야 할 난관들이 여러가지 있습니다. 독신생활을 영위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볼 때에 환영 받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며, 자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생의 가치와 목적을 상실했다는 느낌이 독신자를 계속 따라다닐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결혼식을 올린 후 손에 손을 잡고 미래를 향하여 행진해 나가는 결혼 철이라도 되면 독신자들은 감정적으로 심한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그들은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수양회에도 여러 번 참석해보지만 이런 기대가 무너질 때마다 좌절감과 거부감만 되씹게 될 뿐입니다.

성경을 펴보면 주 예수님께서 독신생활을 하도록 정해진 세 부류의 사람들에 관하여 말씀하셨는데, 그 중 한 부류는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이고, 또 한 부류는 사람이 만든 고자이며, 또 한 부류는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입니다( 19:12). 그런데 문제는 천국을 위해 결혼하지 않기로 작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소수인 반면, 대부분의 독신 그리스도인들은 위 세 부류 중 어느 하나에도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며, 그 주요 원인은 적절한 상대가 모자란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원인이 어떤 젊은 형제들에게 있어서는 합당한 배우자를 찾을 수 없다는 데에 있기도 하겠지만 대다수의 자매들에게 있어서는 자매들의 숫자에 비해 형제들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독신 형제나 독신 자매가 처해 있는 상황은 각기 다릅니다. 만약 이 글이 독신자매들의 이목을 더욱 크게 집중시킨다면 그 까닭은 독신 자매들이 더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겪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이 어렵고 고통스러운 영역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해답과 지침을 가지고 있다고 필자는 확신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먼저 해결해 없애야 할 사항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선의적이긴 하지만 실상은 해로운 개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혼하지 아니한 사람들을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그런 사람들에 관해서는 임자 없는 보석이라든지 형제들의 우둔함을 깨우쳐 주는 기념비”, 또는 미완성의 생애등등의 표현들이 종종 사용되는데 그 목적은 미혼자들이 비록 결혼은 안 했을지라도 실로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이 아무리 좋은 의도로 사용된다 해도 실상은 그릇되고 해로울 뿐만 아니라 비성경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표현들은 어떤 것들을 괜스레 주목하게 만들며, 미혼 상태가 마치 비정상적인 것처럼 암시하므로 그들을 괴롭힐 따름입니다.

그런 표현들이 지니고 있는 교묘한 해악들을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미혼자들이 정말 임자없는 보물일까요? 그들은 미혼 상태에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기여할 수 있는 훌륭한 보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될까요? 그들을 지으시고 그들의 삶을 지배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허락하신 것도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미혼 자매가 형제들의 우둔함을 깨우쳐 주는 기념비라고 말하는 것은 곧 중대한 실수가 저질러졌다는 것, 어디에 있는 한 형제의 실수로 말미암아 한 자매가 미혼상태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이것은 곧, 하나님의 뜻이 잘못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일반이요, 만사가 뒤틀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보고 하나님이 그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의 중대한 상황에 관하여 그런 자세로 대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에 게 있어서는 독신 생활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독신 생활의 독특한 문제들을 경감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독신자에게 큰 위로를 주는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우리는 독신생활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독신 자매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환경을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할까요?

독신생활이 선택사항이긴 하지만 이것은 때때로 희생을 치러야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독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나 혹은 하나님의 마음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의 호감과 초대를 의도적으로 거절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모든 순종의 본질이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희생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희생은 결코 참다운 의미의 손실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위에서 말한 독신자의 희생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혼 상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정해주신 상황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부여하신 가장 중대한 상황 중의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미혼 상태의 유리한 점들을 고린도전서 7장에서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상적(理想的)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결혼을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은 하나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독신생활의 문제는 더욱 확대되어 고독감과 좌절감, 자기 의미의 상실, 성적 욕구에 대한 갈등, 독립생활의 압박 등등 많은 어려움들을 가중시킵니다.

혹 어떤 이들에게는 이것이 극히 단순하게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문제에 부딪히면 그 해답을 주님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곧, 심리학자들이 일컫는 승화(강렬한 육체적 욕구를 영적인 영역으로 유도하는 것)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어떤 것을 잊기 위해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해답이지 미봉책이 아니며, 해결책이지 마취제가 아닙니다.

미혼자는 자신의 상황을 생각할 때, 그것은 그 특정 시간에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미혼자가 결혼을 원한다면 물론 그 사람은 장래에 결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생각이 오직 결혼에만 집중되어 있다면 고린도전서 7장에 제시된 바울의 말은 그 사람에게 별로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자기 배우자를 기다리는 것은 손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점차로 깨닫는 일과 결혼하게 될 상대 속에서 가치들을 찾는 일에 투자한 시간은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젊은 자매가 했던 다음의 말은 필자의 글보다 훨씬 웅변적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남자들을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아찔해요!”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려고 필을 들었을 당시 그 교회는 부도덕한 사회에서 좋지 않은 간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정욕과 부도덕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었는데도 예방주사를 요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사회는 어찌나 타락했던지 사람들은 고린도화 했다라는 용어를 만들어내어 도덕적인 퇴폐를 표현하는데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갓 구원받은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결혼과 성관계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궁금했으며, 바로 이 주제를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1~16절을 상고함으로써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주로 결혼과 그 문제들 몇 가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17~24절에서는 헌신된 삶의 원칙들을 대하게 됩니다.

 

헌신된 삶의 원칙들

이 부분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원칙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두신 가치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23).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자신에 대하여 합당치 않다”(unworthiness)라고 느끼는 개념을 무가치하다”(worthlessness)라고 느끼는 개념과 혼동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바울이 이 부분에서 강조하는 요점들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동정심이나 자신에 대한 거부감 따위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으로 대체되어야 마땅합니다.

이런 견지에서 생각할 때 우리도 독신자들이 처한 문제를 정 직한 자세로 대해야 합니다. 기혼자들이 미혼자들을 보는 관점과 언급하는 말, 대하는 태도는 미혼자들의 자기 비하감(卑下感)을 강화시켜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2류의 성도란 전혀 없으며, 오직 자기를 2류의 성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모든 자녀는 하나님께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기를 원하는 성도들도 모든 자녀를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들이신 환경이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고 나서, 이제 결혼과 사회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 의문을 갖는데 바울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 이 말씀은 미혼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반드시 결혼해이만 여러분의 생애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표를 온전히 달성할 수 있기 때문에 결혼하기 전까지는 일상사가 하나님의 지배에서 다소 벗어나 있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하실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 점을 그 다음 구절에서 논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이 여러분을 두신 현 위치에서 모든 기회를 활용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21절과 22절을 쉽게 풀어 쓴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결혼을 해야만 그리스도인다운 생활과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시작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옆줄에 앉아 결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연민, 자신감의 결여,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오해 등 이 모두가 다 합동으로 사람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성도들이 현 위치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상황에 두셨는지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의 말을 미혼자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너무 무리일까요? 현재 여러분이 자신의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애쓰고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2류 성도가 아닙니다 꼭 결혼을 해야만 생의 의미를 찾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 있다면 풍성하고 의미있는 삶은 현재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것입니다.

몇 명의 독신자들과 그 활동들을 성경에서 함께 살펴보는 일은 나중에 하겠지만 현재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결혼과 더불어 시작되지 않고 구원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어떤 점에서는 미혼자가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마 놀랄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유리한 위치를 결혼생활의 어려움과 맞바꾸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현재, 현 위치에 두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바로 이 하나님이 비록 일시적일지는 모르지만 그 유리한 위치를 여러분에게 선사하신 것입니다. 결혼생활이 기혼자들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을 요구하는지 미혼자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결혼생활로부터 로맨틱한 요소가 없어진 후에도 현상은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경과할수록, 자녀들이 출생할수록 책임과 요구는 늘어만 가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미혼자들은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주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드릴 수 있습니다. 결혼 전의 시간들은, 설령 이것이 길어진다 할지라도 성장과 주님을 아는 일에 매우 값진 기간입니다. 만일 여자가 가정에서 부모님만을 의지하다가 곧바로 결혼하여 한 남편을 의지하게 되면 주님을 의지할 기회를 거의 가질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모든 성도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상황을 활용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권면합니다(24). 하나님과의 교제를 개발하는 일은 어떤 상황에 있는 성도에게나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한 우선순위

하나님의 영원한 원칙들은 문화와 시간 및 상황을 초월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29절에서 다음과 같이 다소 완곡한 말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 진고로····사실, 바울은 주님이 마태복음 6:33에서 다음과 같이 하신 말씀을 고린도전서 7:29에서 현대적으로 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문맥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당시의 염려하는 심령, 탐욕스러운 마음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나머지의 삶을 하나님이 조정하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내가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생의 반려자를 꼭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바는, 생필품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생활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에게 동반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그분의 때에 주실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두십시오. 동반자를 찾는 일에 너무 골몰하므로 하나님께 대한 봉사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는 마태복음 7:7의 말씀을 신조처럼 인용하면서 동반자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구사항을 제출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만사는 다 그분의 뜻에 굴복해야 합니다.

심지어 결혼까지도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 우선순위에 복종시켜야 한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이유는 결혼조차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및 하나님과의 동역은 영원합니다. 그런데도 영원한 것에는 등한히 한채 일시적이고 지나가는 것에 우선순위를 둔다면 얼마나 비극이겠습니까!

미혼자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심사 숙고하여 보고 하나님을 위하여 그 모두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말씀들이 필자의 마음에 오락가락하는데 그 중에 한가지는 에베소서 5:15,16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 세월을 아끼라.”

이 문단에서 바울은 우리 의 지침을 위하여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32~40).

 

방향이 설정된 삶의 모범

바울의 간절한 소원은 모든 성도가 분요함이 없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35). 바울에게 있어서는 독신 생활이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는이점(利點)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에게 있어서는 독신생활이 유리한 점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원칙을 살펴보기 위해 가장

잘 알려진 성경인물들 중에서 몇 사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일생 동안 독신으로 지내면서 훌륭한 삶을 살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결혼 전에 중요한 사건들을 만났었습니다.

접대하면 으례 떠오르는 이름들이 마리아와 마르다인데 이들은 접대로 말미암아 베다니라는 지명을 지도상에 표시하도록 만들었으며, 결국 그곳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마을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2:1). 이 두 자매는 그냥 뒤로 물러앉아서 미래가 열리 기만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필요를 보고 곧 그것에 착수했으며, 주님과 그 제자들을 접대하는 것이 그들의 사역이 되었습니다. 주님과 그 제자들의 모든 필요가 베다니의 그 집에서 충족되었던 것입니다. 그 집에서 제공된 것은 비단식사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마르다는 신체의 필요를 채워 주었으며, 나사로는 사회생활과 교제의 감정적인 필요를, 마리아는 영적인 삶의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 세 사람의 영성에 대한 상대적 평가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접대에 모든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미혼상태가 주님의 백성들을 접대하는 일에나 여러분의 가정을 영적인 항구로 만드는 일에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각자의 생활방식 때문에 이런 일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여하튼 할 수만 있다면 시도해 보십시오. 지혜와 사려분별이 필요하겠지만 기회는 무한하며, 그 보상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비록 사도행전 9:36~43에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을지라도 도르가는 성경말씀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섬김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비이기적인 그녀의 삶은 어찌나 유명했든지 성경에서 제자로 칭해진 여자는 오직 그녀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신 주 예수님의 본을 따랐던 것입니다(2:3~8). 그녀는 다른 일에 분요함이 없었기에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자신을 전적으로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었던 뵈뵈 역시 하나님의 성령의 능란한 필치로 말미암아 성경 속에서 불후의 명성을 날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향한 순수한 관심과 모든 사람들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씨는 자매가 하나님께 부여 받은 영역 안에서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단어들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개인적인 배려와 자기 비용을 쏟아 부음으로써 바울과 겐그레아 교회를 도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혼자는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재정적으로 더 많은 후원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도 기혼자들이 겪는 분요함이 없이 자신의 미혼상태를 활용하여 주님을 섬겼던 것 같습니다. 만일 그들이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들의 많은 시간을 도저히 요구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삶의 본질이 결혼 여하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예시함에 있어서는 이상에서 말씀 드린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자신을 존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일은 결혼과는 무관한, 마음가짐의 문제입니다.

구약성경의 인물들 중 몇 명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미혼자들만이 지니는 독특한 문제들과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생애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7:26에서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고 표현한 말씀을 잘 강해해 주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 예레미야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어떤 이들은 신음소리를 내뱉을지 모르겠습니다. “독신생활과 흐느낌”, “고독과 비탄의 선지자.” 이것은 얼마나 일맥상통하는 적절한 표현입니까! 독신자가 자기 생애에서 얼마나 위로를 받겠습니까!

예레미야 16:1~3을 보면 그는 결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금령을 받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곳에서”, 즉 예루살렘에서는 결혼하지 말라고 하셨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예레미야는 전혀 결혼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사역은 고독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15:17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홀로 앉아있는 자신을 한탄했습니다. 16장에서도 그는 자신이 동일한 말씀을 인하여 홀로 살아야만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온종일 일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따뜻이 맞아주는 아내를 결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거운 짐과 영적인 상태에 관한 슬픔을 돕는 배필과 함께 나누는 특권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고독한 하루와 고독한밤이 날마다 이어졌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환경 가운데서 하나님을 배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5.20,21).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사람의 선구자였습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4:11~13).

다니엘은 독신생활에 관해서도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는 사람의 손으로 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연민과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극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입증했습니다. 그의 생애에서 얻을 수 있는 뚜렷한 교훈은 특히 친구의 중요성입니다. 독신자는 자기 생활에 균형을 잡아 줄 우정을 필요로 하며, 경험과 관습을 함께 나눌 친구들을 필요로 합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이방나라에 사로잡히는 역경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연합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로잡힌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영적인 관심사를 달리하는 사람들과는 친하지 않은 반면, 자기들끼리는 영적인 일들에 관하여 서로의 확신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시기심 따위는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서로를 배려하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다니엘에게는 위기에 처했을 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의 친구들이 모든 면에 있어서, 모든 시련에 있어서 여러분과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각각 자기만이 아는 상황을 통과하도록 그분의 자녀를 이끄십니다.

타국으로 이송된 이 네 명의 히브리 청년들은 그냥 뒤로 물러앉아서 자기 신세만을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 자신이 그런 생활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런 상황을 최대한으로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들의 특징을 가리켜, 지혜로운 전도자가 말한바 다음과 같은 원칙대로 살았다고 평했습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9:10),

미혼자들 사이의 우정이 귀한 것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로는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그들이 십대일 때 싹텄을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상대방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우정이 아니라 오히려 거저 주는 우정이었습니다. 다윗은 우정을 이용하여 어떤 식으로든 요나단에게 농간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오직 무조건적인 용납만이 있었으며, 서로의 명예만을 생각해주었습니다(삼상 20:34, 삼하 1:18~27). 어려울 때의 격려와(삼상 23:16~18)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삼하 1:18~27) 서로 믿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삼상 19:2) 등이 그들의 우정의 특징이었습니다.

미혼의 그리스도인들은 현재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투자하여 우정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인 관심사들과 필요사항들은 양보하고, 죄의식이나 동정심 따위를 교묘히 이용하는 행동은 극구 피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우정은 미혼 성도의 편안한 감정과 영적인 균형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 장성한 성도들은 독신 성도들을 이해하고, 도우며, 격려해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독신 성도들을 동정이나 혐의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대우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혼자들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독신 여성 그리스도인이 기록한대로 독신생활(미혼생활)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될 수도 있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쁨이나 자족(自足)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이 기쁨이나 자족은 결과나 상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분에게 귀중한 존재입니다. 헌신과 교제, 봉사와 성공, 목적 달성과 기쁨은 기 · 미혼을 막론하고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말씀 드린 사항들이 미혼생활 가운데서 겪는 문제와 시련에 대한 모든 해답이 되거나 궁극적인 해답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많은 성도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소망입니다.

 

(1995 9월호)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