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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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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19. 20:29 횃불/1996년

고난의 의미와 그 축복(1)

 

우리가 고난의 깊은 뜻을 명상할 때마다 우리의 심령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넘치게 되고 사도들과 더불어 그 고난에 참예한 증인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고후 1:5, 벧전 4:13, 5:1).

만일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빼놓는다면 그분의 짧은 일생도, 붉은 피로 점철 된 십자가의 구속적인 사랑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된 교회를 위해 당하는 것도, 아니 은혜와 진리까지도 무의미할 것이요, 마지막엔 우리의 신앙생활까지도 아무런 목적도, 능력도, 축복도 없이 저주받은 상태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분의 일생에 일관되었고, 그분의 복음의 핵심이요, 그분의 탄생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승귀와 재림과 심판과 모든 영원한 영광의 확증이 되었고, 그분의 몸된 교회도 같이 체험하는 생동적인 간증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주님 자신이 적접 예언하신 바요( 53, 3:14, 8:31), 주님 스스로 실천하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지상에 오셔서 전도하시고 죄인을 부르시고 진리를 증거하시고, 봉사하시고, 교회의 신비적인 태동이 되시고, 마지막엔 한번 몸을 제물로 드려 영원한 속죄의 댓가를 치르셔서 완전한 의를 이루시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분의 사명을 전부 이루신 밑바닥에는 그분의 고난의 쓰디쓴 잔이 계속 흘러 넘치고 있었습니다.

창세 전후로 없었던 그리스도의 유일한 역사적인 고난은 죄악과 허물로 형벌 받을 그 세대”( 53:8)가 알지 못했고, 피리를 불어도 스스로 귀를 막아버린 마지막 이 세대”( 11:16,17)가 가슴을 치지도 않으니 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리요. 우리가 사는 이 마지막 세대야말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망각한 세대요, 생명의 말씀에 나타난 일고의 의미조차 실감치 못하는 둔감한 세대요, 더욱이나 진리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고난이 생명적으로 체험되고 현실적으로 실증되는 많은 유익된 축복에는 전혀 맛도 못보는 패역하고 몽매한 세대입니다.

 

고난의 종류

우리 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보편적으로 두가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죄로 말미암은 고난(벧전 2:20)과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벧전 4:19)입니다.

전자의 고난은 여러가지 죄악으로 당하는 고난으로(벧전 4:15) 하나님을 떠났거나 말씀을 불순종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이나, 음행이나, 술취함이나, 분노나, 욕심이나, 투기나, 분당적인 분리나, 이단으로 넘어가는 것으로나, 재갈 먹이지 못한 혀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것으로나, 형제를 판단하고 업신여기고 지배하려는 것으로나, 교회를 더럽히고 죄를 회개하지 않는 이들을 그대로 용납하는 것으로나, 모든 악행으로 인해 고난을 받지 말 것입니다. 이런 고난은 사단의 유혹과 죄로부터 오는 더러운 것이며 두려운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고난은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거하여 받는 것으로 선하고 아름답고 참된 고난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이요(고후 1: 5), 그리스도인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벧전 4:16). 동시에 이것은 죄없이 당하는 고난이고( 9:23), 의인이 받는 고난이고( 34:19),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고( 1:24), 형제들도 같이 당하는 고난이고(벧전 5:9), 교회를 위해 당하는 고난으로( 1:24), 이런 고난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으로 그 고난을 이긴 성도들은 아버지께 큰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유업의 상과 면류관이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모든 성도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고난은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당하는 고귀한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사단과 죄와 세상이 갖지 못한 성도의 영광이고 생활의 향기며 자랑이며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그분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분의 흔적을 가진 이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그리스도를 통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초대교회 시대에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11:26) 받을 때부터 더욱 더 극심했었으나 약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고난은 계속되고 있으며 그 고난의 의미는 성경을 통해 밝히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고난의 사람들이었고 역경과 환란을 오직 믿음으로 돌파하고 나간 용사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피에서 시작 되었고 피 속에서 자랐으며 피로써만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 구속함받은 성도들로 충만하게 완성된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머리요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서 자기 피로써 교회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20:28),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명상할 때 십자가 위의 비참한 죽음과 그 전야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마셔야만 될 쓴 잔을 앞에 놓고 거의 죽어가게 된 주님의 기도 하시는 고뇌의 모습만을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4:4) 섭리야말로 큰 고난의 시작이라고 생각됩니다. 인생이 고난을 위하여 났다는( 5:7) 것은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1)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안 취하셨고

(2)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의 형상을 입으셨고

(3) 마지막엔 자기를 낮추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2:68)는 것은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고난이요, 아니 역사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은 물론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초월하시고 희생하신 절대적인 경륜이요 섭리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세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난의 역사입니까! 거룩하신 분이 저주받은 더러운 죄인의 입장에 처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런 일이십니까? 죄는 하나도 없으신 의로우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여자에게서 태어나셔서 분토와 같은 인간 세상에서 33년 반을 매일 매시간 매초마다 사단과 죄와 사람의 정죄와 시험과 고역을 당하셨으니 이 어찌 크나큰 고난의 연속이 아니리요. 동물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가죽 채찍으로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뺨을 맞고 구두발에 채이고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고 마지막엔 날카로운 가시관을 짓눌러 씌워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양손 양발에는 못을 박히우고 옆구리는 창을 찔려 물과 피를 다 쏟고 심한 목마름과 고통과 저주를 다 받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그 얼마나 우리 주님의 고난이 크셨겠습니까!

아마 어떤이들은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고난의 사실을 너무나 많이 읽고 들어서 면역이 되어 별 관심이 없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아직까지 구원을 받지 못했거나 혹은 처음 사랑과 처음 마음을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것일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영원한 사랑과 깊은 고난의 비의(秘意)는 항상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의 심령과 일상생활을 통해 깨달아 느껴져야 되고 믿음 안에서 뜨거운 감사와 찬양으로 체험되어 나타나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보혈의 십자가 상에서 절정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의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해서 십자가의 구속적인 고난은 계속 되었던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로 다시 영존하신 주님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어 지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동정)하시 고 또 우리가 받을 수 없고 또 받아서도 안되는 속죄적인 고난을 다 담당해 주셨고 앞으로 우리가 받아야 될 고난을 넉넉히 감당케 하기 위해 계속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은혜의 말씀께 우리를 부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요 주께서 몸을 바 쳐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속과 새 생명을 주시는 복음적인 핵심입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고난의 종류가 있겠지만 이런 그리스도의 고난처럼 고귀한 생명적인 고난처럼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고난입니다. 이것은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드리는 고난이요 온 세상을 값 없이 구속하시는 고난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고난입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가?

비록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영생과 완전한 행복,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그 유업의 상이 분명히 주어져 있지만, 그러나 결코, 이 세상에서의 온갖 고난에서 완전히 면제받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15:18, 20).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요 그분의 택하신 자녀들이며 그분의 머리에 붙어 한 몸을 이룬 우리 형제 자매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피할 수 없으며 도리어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기회와 그 특권도 믿음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해야만 할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은 무한한 영광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우리의 육신의 연약함을 인하여 그분의 고난을 피하려 하고 또 피해 온 것은 주님 앞에서 몹시 부끄럽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1:29). “그러므로 예수께 서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3:12,13). 사도 바울은 물론 모든 사도들과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아 평생토록 주님의 고난에 참예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 났고”( 5:4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3:10)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는 고난의 산 본이시고 그분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산 증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고난에 참예할 수 있는 기회와 특권과 은혜와 영광과 믿음과 능력과 축복을 값없이 받았으니 이로 인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한다는 것은 사람으로써 얼마나 큰 영광이며 그분의 자녀로서 얼마나 큰 축복이리요!

(1)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의의는 일반적인 인간의 고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그리스도의 고난에 그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요 의인들이 죄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실로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습니다( 34:19). 성경에 나타난 의인이란 도덕적인 인격 완성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고 값없이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고난을 당합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들은 이미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모든 환란을 당하는 것이요 또 참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16:33에서 너희가 세상에 있을 때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돌무더기 속에서 잠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후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하여 믿음에 거하라고 권하면서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 ( 14:22)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제 중의 한 사람인 사도 요한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섬에서 옥살이를 하면서도 나 요한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 1:9)라고 확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입니다”( 8:17).

(3) 그리스도인은 선행으로 인해 고난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주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입니다. 의를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름답고 복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고 선행으로써 악행을 갚으셨습니다(벧전 2:20, 3:1418), 그리스도의 값지고 귀하고 참된 작은 무리들은 이 세상의 감정과 원한과 장소와 시간에 좌우되지 않고 각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입니다. 복음의 냄새요 사랑의 향기입니다(고후 2:1416). 추악한 사단과 죄는 향기가 싫어서 정죄의 화살을 쏘는 것이요 멸망받은 포악한 세상과 율법도 이 향기를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환난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고난은 선을 행하는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입니다. 

(4)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일 뿐만 아니라 주께서 정하신 일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히 주어져 있는 과제요 말씀에 계시되어 있는 은혜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고 하셨고( 16:33) 또한 마땅히 우리는 이런 환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살전 3:3, 새번역). 여기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는 주님의 깊으신 뜻이 있고 신령한 축복이 주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5) 경건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고난을 받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믿고 그 뒤를 따라가는 내가 아무런 핍박도 당하지 않으려고 피하여 간다면 분명히 나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을 뿐 아니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딤후 2:3, 1:8). 이것은 사단과 죄와 율법과 이단과 정욕과 고행으로 인해 받는 고난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고난이요 그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지켜 행할 때 받는 모든 고난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한 자녀로 삼으시고 모든 은사를 넘치게 주사 교회 안에 세워주심은 그분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더불어 고난을 받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심한 고역을 당했고 감옥에도 많이 갇혔고 수없이 맞았고, 여러번 죽을 뻔했던 것도, 몽둥이로 세번씩이나 맞았고, 돌로 한번 맞았고, 세번씩이나 파선당했고, 24시간 동안을 망망한 바다 위에서 헤맸던 것도, 자주 여행했기에 숱한 위험을 당했는데 -강물과 도둑과 동족과 이방인과 도시와 광야와 바다와 거짓 형제의 온갖 위험에 처했던 것도,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리며 여러번 밤을 새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썰고 헐벗었던 것도, 이런 외부적인 일 외에도 약해지고 실족한 이들을 위한 모든 교회에 대한 걱정이 날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을 누르고 있었던 것도 다 주님과 그 복음을 위한 고난의 실상이었습니다(고후 11:2329).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주님의 12제자들이 극심한 고난 끝에 순교당했음을 보게 됩니다. 즉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서 죽었고, 안드레는 X형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죽었고, 야고보는 헤롯의 칼에 목이 잘려 죽었고, 요한은 밧모 섬에 귀양 갔다가 죽었고, 바돌로매는 거꾸로 십자가에서 죽었고, 도마는 인도에서 창에 맞아 죽었고,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목베임을 당해 죽었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림 당해 죽었고, 시몬과 야고보의 동생 유다는 활에 맞아 죽었고, 가롯 유다 대신 택함받은 맛디아는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이 전설의 역사적인 진위를 논하기 전에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최후를 장식했던 간에 그들은 결코 방안에 앉아 편히 쉬다가 운명했던 것이 아니고 세계 각처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주님과 더불어 순교당했다는 엄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사실 거의 뜻이 있는 고난을 당한 일도 없도 또 고난을 당한 일이 있다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당하셨고 과거 성도들이 당한 고난에 비교하면 전혀 아무것도 아님을 절감할 때 죄송한 마음 밖에 없습니다. 

(7)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교회 때문입니다. 그 당시 나타나지 않은 교회의 비밀을 알지 못했던 구약시대의 성도들도 비록 약속은 받지 못하고 증거만 받았으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 11:25)고 했으며, 그리고 약속이 성취된 신약시대에 계시된 말씀을 보면 고난의 의미와 상태가 결코 개인적인 단수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주의해서 조금 살펴보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우리가 받는 것같은 고난을 너희도····좀 더 직접적인 말씀을 찾는다면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1:24).

이 모든 말씀으로 미루어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은 육적이거나 개인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으신 경륜을 따라 그분의 몸된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 고난의 깊이가 있고 계시적인 고난의 의미가 내포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당하는 모든 고난은 주님의 교회가 완전히 완성되어 공중으로 휴거되는 날 끝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각처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형제들이 육체와 심령에 고난을 즐겨 채울 때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속히 끝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는 것은 그분의 남은 고난이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고난을 당할 기회를 만들지 않고 도리어 피하고 때로는 육신으로 안일을 도모하는 죄는 주님의 교회 완성의 가장 큰 장애물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모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즐겨, 자원하는 심령으로 끝까지 짊어질 때 주님의 몸된 교회는 그만큼 빨리 이루어져 갈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그분의 교회가 당하는 고난을 전부 체험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고난은 곧 그리스도의 고난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만난(萬難)을 무릅쓰고 온 힘을 다해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성령님의 구원의 역사를 나타내며 침례를 베풀고 모든 말씀을 다 가르쳐 지키게 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 곧 교회의 고난, 곧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난이 끝이 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고후 1.5)은 참으로 큰 위로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96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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