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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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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15. 09:43 횃불/1996년

신앙과 삶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나는 바가 있어 여기에 소개할까 합니다.  어떤 사람이 도둑질을 하다 잡혀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셀 수 없이 도둑질을 하다 잡혀 와서 이제는 아예 감옥을 자기 집으로 알고 사는 사람인데 그는 감옥 안에서 정기적으로 금식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를 지켜본 간수는 하도 기가 막혀서 이 사람아 도둑질을 하여 감옥을 내 집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 금식 기도는 무슨 금식기도야!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그 죄수가 하는 말이 더 재미 있습니다. 그는 도둑질은 내 직업이고 금식기도는 내 신앙입니다. 남의 신앙에 관여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답니다.  직업은 직업이고 신앙은 신앙, 즉 직업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 도둑처럼 삶 따로 신앙 따로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앙처럼 그 삶이나 인격도 변화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제 아들이 기독교 재단의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학교에서 매주 예배시간에 기독학생들이 모이면 통성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아직은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는 볼 수 없는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진지함과 깊은 신앙심에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교실에 돌아와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친 말과 욕설, 그리고 신앙을 가진 학생다운 행동들이 아닌 것을 보면서 아이들의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동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의 신앙 생활은 따로 국밥처럼 신앙+생활이 아닌 신앙 따로 생활 따로가 되어버렸을까요? 어쩌면 우리의 신앙교육이 옛날의 영어교육 같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제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수년 전만 태도 우리나라 영어교육은 거의 문법 위주로 되어 있어 10여년 가까이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할지라도 영어권에 있는 외국인들을 만나면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얼굴만 붉히는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경험한 어느 영어교수는 외국인과 영어로 자연스레 대화할 수 없는 자신을 학생들 앞에서 나타내기 싫어서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본적도 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의 가르침이 옛날 영어식의 가르침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영어책은 줄줄 읽고 해석하고 문법은 영어권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잘 알면서 막상 대화에서는 입을 다물고 마는 것처럼 머리 속에 수많은 가르침과 말씀들이 들어있어도 막상 일상생활에 들어서게 되면, 또는 어떤 특별한 환경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전혀 말씀들이 힘이 되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말씀이 하나님 말씀이고 또 능력이 있는 말씀이라면 그 말씀을 붙잡고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과 인격도 그만큼 변화 되어 있어야 정상인데, 우리가 믿는 바가 정로(正路)이고 진리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삶의 인격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주님을 믿은지 수십 년이 흘러도 삶과 인격은 여전히 그대로라면 뭔가 우리의 신앙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 중에 신앙과 삶이 정확히 같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그들은 분명 신앙과 삶이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경우를 보면 그는 참으로·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고 또한 그 삶과 인격이 되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 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광야를 지나 요단 강가에까지 오면서 여러 어려운 일들을 만났지만 그러할 때마다 그는 그의 빛난 인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그를 원망하고 죽이려고도 했고, 때로는 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기도 했고 수없이 그를 대적했지만 그는 그때마다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는 이 세상에서 온유함이 가장 큰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디에서 그러한 인내와 온유함 그리고 그 훌륭한 인격을 갖출 수 있었을까요? 매주일 훌륭한 목사님으로부터 설교를 들은 것도 아니고 어릴 때 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커서는 바로의 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랐는데 어떻게 그는 신앙 따로 삶 따로가 아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모세는 그의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더라고 그는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 원수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의 인격을 알 수 있는데 수 없이 사울왕이 던진 창에 죽을뻔했고 또 그의 추적을 패해 이곳 저곳으로 방황하면서도 막상 사울왕이 그의 손안에 들어 왔을 때에 그는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또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도 사울의 집안 사람인 시므이가 다윗을 따라 가면서 돌을 던지고 티끌을 날리며 저주 하였지만 그를 죽이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을 봅니다. 골리앗을 물리치는 경우에 있어서나, 그의 삶은 확실히 신앙에 따른 삶이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요셉의 경우에도 자기를 죽이려 했고 또 비정하게 애굽으로 팔아버린 형들을 대할 때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울며 그를 그곳에 보낸 것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그 모든 환경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며 오히려 형들을 위로하는 모습을 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그 예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이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며 위에서 부르신 부름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신앙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신앙과 삶이 따로 따로인 유대인들 즉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책망했습니다. 17절에서부터 보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의지했습니다. 아주 적은 것들이라도 율법을 따라 구분했고 율법을 세분화 시켰으며 또한 율법에 능해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율법에 대해 물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선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자랑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에 대해,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에 대해, 그리고 모세의 제자인 것에 대해 그 정통성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율법을 깊이 공부해서 그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구분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것에 해방하는지, 영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들의 마음 또한 선한 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또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에 대하여 형식을 갖춘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19). 오늘날로 말하면 그들은 성경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자들로서 보지 못하는 자들의 안내자요 어두움 속에 있는 자들의 빛이요 어린아이들의 선생이라고 자신했습니다(20).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교훈과 진리 그리고 깨달음과 삶은 서로 달랐습니다 그들의 믿음, 그들의 할례는 헛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할례자가 율법의 의를 지킨다면 그의 무할례를 할례로 여길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판단 기준이 외형적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건의 모양이 있을 때 그것은 경건으로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있는, 또는 우리 나라라 할지라도 잘 모르는 모임을 방문 할 때 그곳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외형을 보고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모임 분위기는 어떤가? 예배가 얼마나 풍성한가? 숫자는 어느 정도인가? 잔은 하나를 사용하는가, 아니면 분잔을 사용하는가? 빵은 누룩을 넣은 것을 사용하는가, 아니면 누룩을 넣지 않는 것을 사용하는가? 자매들의 복장은 어떠한가?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가, 아니면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드리는가? 악기를 사용하는가? 어떤 악기를 사용하는가?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가? 그들의 삶을 지켜볼 시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것들로 사람들을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제가 외국에 있는 어떤 교회를 방문했을 때 자매님들이 너울 대신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 교회는 주님의 진리를 지키지 않는 세속적인 모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혼돈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들 중에 상당히 많은 분들의 삶이 너무나도 신실했고 헌신적이었으며 또한 그 인격들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주님을 자기 가족이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저는 그들을 보면서 마치 우리의 모습이 성경에서 말하는 바리새인과 같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리를 따라 사는 우리의 삶이 우리가 진리를 떠났다고 말하는 그들의 삶보다 더 못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그들의 삶보다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전에 율법 가운데 살면서 그 가운데서 너무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곳에서 나와서 그리스도의 율법 (고전 9:21) 가운데로 들어가야 하는 데 그만 무율법주의자들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돌이켜보면 지난 30여년동안 저는 제가 어느 교회들보다도 성경적이고 진리를 따라 산다고 믿는 교회 안에서 하나의 어떤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교만이겠지만 다른 교단들은 많이 세속화되고 타락되어 가는데 우리만이 누구보다 진리에 가깝게 살아가고 있다는 자부심이 저의 마음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제가 주장하는 진리만큼 제 자신의 삶이 이를 따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더 마음 아픈 것은 제가, 진리에서 떠난 그래서 타락한 자들이라고 정죄하는 자들의 삶이나 인격보다 더 못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러번 변론을 할 때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상 그때마다 먼저 분개하고 화를 낸 것은 제 자신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서로 다른 견해들로 인한 반목들을 수없이 지켜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의 대부분 자신이 더 진리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더 빨리 분개하고 소리를 높이며 교제를 단절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이치상으로는 그들이 생각할 때에 더 세속적인 사람들이 더 빨리 분개하고 화를 내야 맞는 것인데 결과는 그 반대라는데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경우나 사도 바울 그리고 그동안의 종교 개혁자들의 역사가 또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신앙만 가지고는 충분치 않습니다. 생활만 가지고도 충분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신앙+생활 즉 신앙에 따라 그에 합당한 삶을 살며 인격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지나간 우리의 삶을 한번 돌이켜 봅시다. 일상생활에서 그리고 크고 작은 문제들로 다른 사람들과 대립되었을 때에 더 먼저 분개하고 교제를 단절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혹시 진리에 속했다고 자부한 내가 아니었습니까? 이것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내가 믿는 바가 정말 진리 이고 정로(正路)라면 내 삶과 인격 또한 그에 맞도록 성숙해 있어야 우리가 가진 진리가 참인 것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요?

 

(1996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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