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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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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6. 09:59 횃불/1999년

노아, 그의 생애와 그 시대(19)

사무엘 W. 제밍스

19장 그 경건한 사람

 

이 놀라운 사람에 관하여 이미 언급한 사항들을 좀 더 자세히 상고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우리는 그에 관하여 그 주목할 만한 생애를 네 가지 면에서 초점을 맞추어 온전히 설명할 것이다.

 

1. 정력적인 사람

2. 경건한 사람

3. 제사장인 사람

4.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

 

노아는 매우 정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바빴고, 결코 일을 꺼려하여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그 방주를 혼자서 지었을 것인데, 이는 그의 아들들이 도왔다는 언급이 없고 품꾼을 고용했다는 말도 없음을 볼 때 그러하다. 450피트의 길이와 75피트의 넓이의 삼층으로 된 배를 만드는 일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노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매일 그 힘든 일을 했을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고된 일과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아마도 그는 홍수가 일어날 정확한 때를 알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계속 시간을 거슬러 경주했던 것이다.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을 것이지만 그는 인내로 그 생각들을 몰아내고 계속 그 일을 수행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농사 짓기 보다는 옛날 시대에 그러했을 것처럼 저절로 자라난 양식을 모아야 했을 것인데, 이 또한 막대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피난처인 그 방주에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있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1년 혹은 그 이상 그들의 식욕을 만족시키기에는 얼마나 많은 양식이 필요했을 것인가! 그 일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지만 이 사람의 입술에는 아무런 불평도 없었던 것 같고, 그는 계속 그 일을 수행할 정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파할 시간을 가졌다. 그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고 불경건한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어쩌면 그는 방주를 짓는 그를 지켜보고 있는 그 관중들에게 전파했을 것이다.

후일 느헤미야 시대에 사람들은 한 손에 칼을 그리고 다른 손에는 삽을 들고 일했다.

심지어 홍수가 지상에 임했을 때 조차도 그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방주에 있는 기간 동안에도 그는 매일 모든 동물들의 필요를 채우며 보살펴주었고, 그들의 우릿간을 깨끗이 청소하였다. 이것은 일주일 내내 지속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는 그 일에 기꺼이 헌신할 수 있었다. 비록 성경은 이것에 대해 침묵하지만 아마도 그 아내와 아들들이 그를 도왔을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는 마르다와 같은 이들이 많기에 여기 신자들을 위한 하나의 교훈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섬김에 대해 마땅히 받아야 할 사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노아가 그 일을 꾸준히 행한 것처럼 그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노아는 그 일을 끝까지 완수했다. 그 동물들이 마침내 그 방주로부터 나왔을 때, 그들은 의심할 바 없이 건강하고 보기 좋았을 것이며, 새로운 삶을 출발할 준비가 되었을 것이다. 일을 시작하는 것은 매우 쉽다. 하지만 그것을 끝까지 완성한다는 것은 별개이다. 주님은 언제나 그분의 일을 다 이루신다. 예를 들어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뿐만아니라 또한 그 발을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그분은 제자들이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미완성인 채로 떠나지 않으셨다. 또한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리셨을 때, 그분은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넘겨주심으로 그 어머니와 아들 둘다 행복하게 그 일을 마치셨다. 그 원리는 창세기 2장에서 여러번 나오는 다음 단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2:1,2).

이처럼 그 원리는 성경의 초두에 나와있고 성경 전반에 걸쳐 계속된다. 주께서는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했고 그 축복을 다 이루셨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8:30).

현재적으로 우리는 성령의 은사 안에서 그 첫 불입금 같은 보증을 가졌다. 이로 인해 그 완전한 구원을 즐기며 마침내 그분이 이루실 것을 믿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에너지는 제단을 쌓는 데서도 또한 보여진다.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많은 노동이 필요한 큰 건축 일은 아니지만 그는 그것을 행했다. 그 일이 크든 작든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는 자원하는 일꾼이었다는 점이다. 어떤 이들은 오직 큰 일만을 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작은 일을 기꺼이 하고자 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주님은 큰 일 뿐만 아니라 작은 일에도 동일한 신실함이 필요함을 가르치셨다. 그 방주에 비해서는 훨씬 적지만 그 제단을 상당히 훌륭하게 지었음을 주목하는 것은 가치있다. 그 방주는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했고, 그 제단은 미래의 물 심판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했다.

후일에 그는 포도원을 가꾸었다. 이것은 상당히 많은 노동이 필요했다. 그 당시에 그는 상당히 나이가 많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불모지를 개간하는 것은 많은 수고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는 기꺼이 그 일을 하고자 했고 또 다른 일도 할 수 있었다. 포도원에는 지속적인 돌봄과 가지치기 등 많은 일이 끊임없이 필요했을 것이다. 마침내 수확하고 그것을 타작하는 것 또한 힘든 일이다. 그 당시에 원예는 쉽지 않았다. 노아와 같은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이 열 명만 넘어도 오늘날 이 세상은 사도 시대와 같이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다. 주께서 그러한 많은 사람들을 일으켜 주셔서 주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성취 되어야 할 많은 일들이 수행되길 원한다.

주께서 노아와 그의 일을 기뻐 받으신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좋다.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었고, 주께서는 그를 떠나서 다른 이들을 축복하지 않았다.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7:1).

노아는 그 이름에 있어서도 독특하다.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7:23).

창세기 6장 초두에도 같은 부분이 보인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8).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13).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14).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18).

이처럼 모든 축복과 안전이 그와 함께 발견되었고, 모든 것이 노아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노아는 우리 주님의 그림자이다. 사람이 영적으로 갈망하는 구원과 모든 신령한 축복은 오직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발견되고 그분에게서만 주어질 수 있다. ‘그 안에서라는 용어는 에베소서에 나타난 흔한 표현이다. 하나님은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역사하시며, 우리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다. 그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노아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물론 주님이 그를 축복할 수 있기 전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그로 축복받게 한 요인임을 알 수 있다. 주께서는 경건한 자들로 그분께 나아오게 하신다. 시편 1편의 경건한 사람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 같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번성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노아에게 해당될 수 있다. 이 사람 속에서 경건성의 흔적을 추적해 보면 유익할 것이다. 그에 대해 묘사한 다음의 아름다운 말을 상고해 보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6:8).

주께서 그의 생애를 보시는 눈은 상징적이다. 주께서 그를 면밀히 살피시고 그를 보시며 거기서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보셨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34:15).

그 말씀은 여기에 잘 적용될 것이다. 개정역(RV)에 보면 향하시고’(over)…위에, …에게로’(upon, towards)로 되어 있다. 경건한 삶의 향기로움은 주께 주목되어진다.

의심할 바 없이 그 구절에서 언급된 은혜는 주님의 절대적인 선택을 의미한다. 그러나 노아는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들의 사악한 독에 오염되지 않았음이 사실로 남아있다. 또 다른 진술이 9절에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참되다.

그 구절에는 경건함의 세 특징이 있다. 개정역은 그를 그의 동료를 대함에 있어서도 의인이라고 칭했다. “노아는 의인이요”( 6:9). 그 세대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생각해 볼 때, 이 점은 가장 놀라운 일이다. 사업을 하는데서 부정직했던가? 그 당시 주문을 할 때 뇌물을 주며 부패하게 했던가? 이러한 면에서 그는 당시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 사업이나 모든 면에서 그는 신뢰할 만하였다. 그의 정직함은 당시의 암흑한 시대에 희귀한 것이었다.

그는 사람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그 말이 의미하는 대로 아무런 흠이 없이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었다. 개인적인 그의 삶과 습관은 모두 아무런 흠이 없었다. 어떤 사람의 삶의 보다 큰 부분은 그의 동료들에게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밀한 악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 점에서 노아는 달랐다. 이 사람의 내적인 삶은 그의 외적인 삶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당세에 완전한 자라는 말 속에는 보다 깊은 것이 있다. 그 시대를 특징지었던 그러한 끔찍한 폭력과 혼란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는 앞에서 타락한 천사들로 암시되었던 그 하나님의 아들들과의 끔찍한 결합은 없었던 온전한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는 세 번째 진술은 가장 아름답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셔서 그를 데려가심으로 죽음을 보지 않은 사람으로 성경에 처음 기록되었다. 하나님은 에녹의 발자취를 다른 사람들도 따르기를 원하셨을 것이다. 여기 또 다른 사람이 있다. 그는 최초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성경에 기록된 보기 드문 사람 중에 하나였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그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과 동의하여야 한다.

두 사람이 의합치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3:3).

성경은 종종 세 방면에 대해 언급한다. 디도서 2 12절이 좋은 예이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근신하며살아야 하며, 개인적인 성별을 위해 의롭게살아야 하며, 하나님을 향해서는 경건하게살아야 한다. 마찬가지의 구조가 베드로후서 3 14절에 이렇게 나온다. 동료 신자들을 향하여는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써야하고, 개인적으로는 유다가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였던 것처럼 흠도 없기를힘쓰며, 세상과 주님 앞에서는 비난 받을 것이 없기를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성경은 이러한 삼중적인 권고로 쌓여있다. 그러나 여기 창세기 6장에서 우리는 첫 언급을 보게 된다.

이러한 경건은 그의 순종하는 모습에서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것은 영적인 성장면에서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라고 사무엘은 매우 불순종하는 왕인 사울에게 말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주님의 말씀은 아주 분명하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킬 것이요”( 14:15).

이것은 앞에서 이미 다루었던 노아의 많은 특징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이것은 좀더 확대할 필요가 있는 노아의 위대한 면 중의 하나이다. 바로 거기에 하나님이 그를 취하여 그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위한 축복의 통로로 사용한 비밀이 놓여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께 순종했으며, 그의 의로운 삶으로 그는 훌륭한 전파자가 될 수 있었다. 그가 말하기에 앞서 그는 그렇게 살았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은 그러한 암흑한 시대에도 자신의 증인을 가지셨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고, 주의 다시 오심을 예언했다. 노아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사람들에게 의를 전파했다. 이 두 사람이 다 그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증인이 되었음은 얼마나 흥미로운 사실인가! 이처럼 모든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알리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실상 그는 전파할 뿐만 아니라 주께 순종하면서 동행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노아의 세 번째 놀라운 특징은 그가 제사장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제단을 쌓았고 제사를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온전한 경험을 보충한다. 그는 방주를 지으면서 전파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아주 가깝게 동행했다. 그는 마침내 제사장으로 예배를 드렸다. 그런데 신자의 삶 또한 이 세 요소에 상응한다. 우리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해 종으로 섬기며 일한다. 우리는 증거하면서 행한다. 이것은 그 일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인데, 이로 인해 한편으로는 주의 축복이 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귀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배 드린다. 이 예배를 마지막에 두었지만 사실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며 다만 그를 섬기라.” 이처럼 우리 자신에게서도 노아에게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제사장적인 삶을 살펴보자.

제사장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며 그분과 교제를 한다. 제사장으로서 아브라함은 한층 더 뚜렷한 특징을 가졌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중보를 했다. 아론의 제사장직은 특별히 이 면을 위해 의도된 것으로, 우리 주님은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하셨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아에 대해 상고해 보자.

창세기 6 13절에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혈육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한 친구가 그의 마음을 내려놓는 참된 교제의 모습이다. 주께서는 자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면서 그들을 친구라고 불렀다. 그 동일한 사실이 여기에 적용되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비밀한 계획을 그에게 알려주신 것이다. 또 다시 창세기 7 1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음이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얼마나 놀랍게 자신을 계시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보라! 이것이 바로 교제이다. 그러나 의로운 삶이 필수적임을 유의하자.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성별되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분을 볼 수가 없다( 12:14). 그분과 교제한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8 15절에서 다시 노아에게 말씀하셨고, 이번에는 방주로부터 나오도록 명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이 사람의 행동을 지시하셨다. 마지막으로 9 1절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처럼 그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를 유지하였음은 명백하다. 우리는 그같은 교제의 축복에 대해 상세히 살펴볼 수 있다. 마리아가 주의 발 아래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것처럼 주님의 임재를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 동일한 길이 주님을 아는 지식을 갖고자 하는 모든 신자에게 열려 있다. 다음의 구절은(7:1) 주께서 안전한 곳인 방주 안으로 이끄신 것으로 얼마나 적합한가! 8 16절은 하나님의 시간과 관련이 있는 것인데, 그분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뜻을 알려 주신다. 이제 그 방주를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노아는 그렇게 했다. 그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의뢰하였다. 마침내 9 1절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된 교제가 주어졌다.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것은 매우 큰 유익이 있는데, 이는 제사장의 역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9장의 제단은 이 면에 있어서 절정을 이룬다. 성경에서 제단은 가장 흥미롭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의 제단 배후에 있는 가르침을 상고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제단은 희생의 장소요 후일에 그것은 성막의 향을 사르는 것과 연관된다. 제단은 종종 어떤 경험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념물로도 칭해진다.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이 세웠던 단이 그러한 경우였다( 22). 그들은 그것을 요단 곁에 세웠다. 그것은 희생을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념물에 불과했다. 주께서 요단 동편의 땅을 기업으로 허락하셨던 그들은 전쟁을 도왔고 그들도 여호와를 섬기는 자손임을 그것으로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노아의 제단은 주께서 그 홍수 내내 그를 지켜주신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했다.

경험은 아브라함의 네 제단에서 놀랍게 보여질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제단은 그 사람의 영적 경험의 총체며 그 경험으로 인한 용량의 크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당시의 제단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처럼 주님의 계시에 근거하여 세워져야 했다. 이것이 바로 여기 노아의 경우였다. 어쩌면 아벨은 아무런 제단을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그에게는 주께서 나타나신 기록이 없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노아는 매우 교제를 많이 했는데, 그러기에 그와 관련하여 제단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각 제단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내며, 어떤 면에서 그분의 축복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을 나타낸다. 인간은 그에 감사하여 제단을 세우고 감사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이 그분의 길들을 알려주실 때, 그 사람은 놀라며 예배드리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24 26절이 이에 대한 좋은 예이다. 그 때 아브라함의 종은 자신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주님 자신을 보이심에 대해 머리 숙여 경배를 드렸다. 그렇다면 제단에 대한 주 요점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인간이 그 계시로 인해 나오는 축복을 감사하는 것이며, 바로 그분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믿음은 주님께 굳게 두며, 그 제단은 예배를 상징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제단의 사람이 되었다. 노아는 제단을 만들기 시작했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크게 하였다. 물론 제사장은 이 모든 것을 대하게 되며, 후일에 그들은 제단을 섬기도록 지명되었다. 그렇다면 노아는 성경에서 나오는 첫 제사장인 것 같다.

그의 제물들은 또한 가장 교훈적인 것 같다. 첫째, 제단을 지은 것은 자발적인 것이었다. 그 제단을 세우도록 주께로부터 아무런 명령이 없었다. 그는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줄을 알았다. 그래서 그 제단을 세운 것인데 그것은 아주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주께로부터 아무런 지시도 없었지만, 그는 부정한 짐승 중에서 정결한 짐승을 구분하여 정확히 드렸다. 이것은 바로 그의 영적인 분별력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후일에 이스라엘은 부정한 짐승과 정결한 짐승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다( 11). 그러나 노아에게는 그러한 가르침이 필요 없었다. 그는 주님의 마음을 알아서 행함으로 주를 기쁘시게 하였다.

말라기 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께서 받으실 수 없는 제물을 드렸다. 그들은 레위기 11장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흠있는 부정한 것을 드렸다. 노아는 그러한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가! 그의 마음은 주님과 아주 잘 맞추어져 있었기에 그러한 가르침이 필요 없었고, 그는 주님의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께 가장 최선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에게 질문해 보라. “왜 정결한 짐승인가?” 그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은 거룩하시다.” 그는 홍수 심판 때에 그것을 증거했다. 그는 알았고 경배했다. 그는 어쩌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또 다시 그에게 물어보자. “왜 그토록 많은 제물을 드리는가?” 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주님은 선하시다.” 그분은 그분의 놀라운 자비하심을 나타내셨고, 최상의 가치가 있으신 분이시다. 또한 번제로 드렸음을 주목하자. 주께서 모세를 통해 레위기의 제사에 대해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번제 또한 속죄제로 사용되었다. 그것이 그러하다 해도 이것은 또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의미와 그분을 향한 깊은 감사의 제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가진 모든 것과 우리 자신을 다 가지시기에 충분하신 분이시다.

많은 제물들이 사람들에게서 올려지는데 그것들이 받아들여질 것인가? 말라기 1장의 부정한 제물과 창세기 4장의 가인의 제사를 생각해 보자. 그러나 여기 성실한 마음을 가진 노아는 참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께 처음으로 전적으로 드려진 진정한 번제였을 것이다. 그는 최상의 것을 드렸고, 그러기에 풍성했을 것이다. 그것은 전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 제사장으로서 노아는 우리 모두를 위한 놀라운 본이다.

다음 장에서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자로서 그에 대해 상고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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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