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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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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손

히로사와 노리

 

요한복음 2:13-17

"13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요한복음에서 특히 오늘 말씀에서는 직접 손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주님의 손을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오전에는 2,6,9장을 통해서 주님께서 손을 가지고 하신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5절에서 주님의 손에 노끈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장에는 주님의 손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게 되며, 9장에서는 땅에 침을 뱉으시고 손으로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른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의 몸에서 손은 어떤 일이라던가 행동을 나타내는 수단이 됩니다. 각각 주님의 손을 통해서 하신 일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시편 19편에는 "하늘이 그 영광을 선포하고 땅이 그 하신 일을 나타낸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하늘도 주님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 모임이 시작되었을 때 "주의 손이 함께 하사"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손은 하나님의 일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이 가까울 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당시 성전에 양상을 보셨는데 좋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두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하나는 유대인의 유월절이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23장에 따르면 유월절은 여호와의 유월절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절기는 주의 것이지만 여기는 유대인의 절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유월절이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16절에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을 찬송해야 될 아버지의 집이 인간의 이익을 위한 집으로 변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이 당시의 유월절이 부패했다는 그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17절에는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집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와 있습니다. 따라서 부패한 하나님의 집을 보고 의분을 느끼셨습니다. 따라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그 채찍을 손에 드셨습니다. 말씀에 있는 그대로 양과 짐승들을 내어쫓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는 것과 같은 관점으로 보는 것과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같은 관점의 생각을 배우게 됩니다. 이 당시의 성전은 헤롯 성전이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약 천 년 전에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습니다. 그 모습은 역대하 5장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솔로몬 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넘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는 일이 있었고 70년이 지난 다음에 백성들은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에스라에 의해서 성전이 재건이 계획되고 이루어졌으며 그리고 방금 읽은 이러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천 년간의 기록들을 약간 살펴보면 원래 모습이어야 할 성전의 모습이 상실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이 성전을 깨끗케 하시고 원래 있어야 할 성전의 모습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이것과 아주 닮은 기록이 구약 성경에 한 곳 있습니다.

 

느헤미야 13:4-9

"4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5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갖추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기명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6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었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7 예루살렘에 이르러서야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하나님의 전 뜰에 방을 갖춘 악한 일을 안지라 8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 9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 놓았느니라"

 

도비야는 이방인이고 느헤미야가 성곽을 재건할 때 방해했던 사람입니다. 엘리아십과 도비야가 이익 관계로 연결이 되어 있었고 엘리아십이 도비야를 위하여 방을 하나 편리를 보아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느헤미야가 8,9절에 나온 행동을 취했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행동과 매우 닮았습니다. 9절에는 "그 방을 정결케 했다"고 말합니다. 도비야의 세간을 밖으로 던졌습니다. 9절에는 원래 있던 물건을 그 자리에 다시 들여 놓았습니다. 말하자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하나님의 지역교회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지역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일컬어집니다. 따라서 여기의 말씀을 하나님의 교회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를 읽으면 지역모임이 원래 있어야 될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도 조금 기억했습니다만 신약성경이 완성되는 단계, 그리고 사도들의 역할이 끝나가는 단계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지역교회가 원래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역모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으면 성경에 나타난 원래의 지역교회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원래 있어야 될 하나님의 지역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는데 약 2000년이 지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성경에 따르면 최초에는 아주 소박하게 성도들이 교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간단하게나마 기독교의 역사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 이후에 교회들은 로마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습니다. 박해를 받던 교회가 로마정부로부터 국교로 인정을 받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국가의 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불신자들도 그만 교회의 일원이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조직과 제도가 생겨나면서 소위 말하는 가톨릭이라는 조직이 생겼습니다. 중세에 이를 때에는 정말로 타락했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에 대한 반발로 프로테스탄트라는 개신교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루터가 한 종교개혁에 대해 배웠습니다만 세 가지 정도가 기억납니다. 하나는 만인제사장을 루터가 주장했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 모두가 제사장이는 진리를 주장했습니다. 또 루터는 의인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전했습니다. 떠한 성경을 믿어야 된다는 것을 루터는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성경의 모든 진리를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 구원받는 사람은 모두 형제라는 사실이 있습니다. 23장에서 주님은 "너희는 모두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형제들간의 교제는 정말로 중요한 교제가 아니겠습니까? 교파들에서는 선생, 또는 성직자와 그 외의 사람들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5: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여기는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로 말한다면 선생님 또는 큰 선생님으로 불러도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라 할지라도, 장로라 할지라도 형제들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방인 형제들에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기억할 때 복음서에서, 사도행전에서, 그리고 서신서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물론 서신서에서도 형제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이 형제들이라는 것을 개신교에서는 실천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신분이든지 어떤 민족이든지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은 모두가 형제라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이 제사장임과 동시에 모두가 형제들입니다. 어제도 보았습니다만 장로들에게 일이 맡겨진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한 지역교회에 장로가 세워지는 것이 지역교회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장로들이 일어나서 목회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창조의 질서, 즉 형제와 자매의 질서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형제들의 역할과 일이 있습니다. 형제와 자매들이 각각의 주어진 역할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네 가지를 기억했습니다. 첫째가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것, 그리고 모두가 형제들이라는 것, 지역교회 복수 장로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창조 안에서 형제와 자매들의 질서에 관한 이 네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지역교회 원래의 본 모습을 생각하면 이 네 가지는 다 모임 안에 실천되는 것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소박한 가르침이 변해버렸습니다. 따라서 이 기사를 본래의 모임이 있어야 될 모습으로 되돌리는데 좋은 기록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노끈으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을 오늘날 지역모임에 회복과 관계를 지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지역모임이 있어야 될 원래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6:1-11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11절에 예수님의 손이라는 말은 없지만 떡을 가지신 예수님의 손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4절까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주님은 때때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엄한 환경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엄한 환경으로 인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산에 오르신 것은 동네로부터 먼 곳으로 주님이 가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가능한 동네로부터 먼 곳으로 주님이 가신 것이며 떡을 살 수 있는 데서 먼 거리로 이동하셨습니다. 마태 14장에 의하면 "저녁이 되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큰 무리라고 반복되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5절에는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라고 하고 있으며 2장에서도 보았듯이 주님께서는 그 상황을 잘 보고 계십니다. 5절을 보면 훈련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빌립을 시험하셨습니다. 문제의 제기는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빌립은 큰 무리를 지목해서 200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안드레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그 상황에 주목한 것이 제자들의 잘못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만 의지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주님만 의지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복된 기사가 있습니다.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린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에 주목하셨습니다. 최근에 제가 기억한 것입니다만 이 아이는 모두를 주님께 드렸다는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 중에 하나도 아니고 두 개를 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깝다고 생각했으면 이것을 남겼을 것입니다. 이 기록에서 두 렙돈 드린 과부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부자들이 드린 것보다 이 과부가 드린 것이 많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과부는 다 드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아이도 다 드렸습니다. 이것을 주님이 사용하셔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역사를 일으키시는 분은 예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오늘날 전도라는 측면에서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저의 일이라서 죄송합니다만 덴노다이 모임은 2005년에 분가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동네는 아비꼬시()입니다. 인구는 약 13만 명 정도 됩니다. 독립했을 때 모임의 인원수는 8명이었습니다. 종종 농담으로 노아의 식구와 같다고 했습니다. 8명이 13만 명에 대하여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요나도 생각이 났습니다. 요나는 12만 명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혼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온 세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요나는 혼자였고 제자들은 열 한 명이었습니다. 여기서 이 아이가 주님께 드린 것도 작은 것이었습니다. 큰 무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들의 전도에 적용한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작아도 주님의 손에 드리면 주님께서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매우 격려가 되는 기록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다른 관점에서 적용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있을 때 축복이 되고 쓰임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성경에 많은 사람들이 손을 가지고 일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단히 유명한 것은 골리앗과 다윗의 기록입니다. 다윗은 시냇가의 매끄러운 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상대했는데 그 돌은 매끄러운 돌이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옛날에 제가 배웠습니다만 강이나 냇가의 상류의 돌은 거친 돌입니다. 하류로 내려올수록 돌은 맨들맨들 해집니다. 이것을 형제자매들의 교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피차간에 거친 돌 같은 육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어떤 때는 충돌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피차 서로 용서합니다. 점점 겸손하게 되어집니다. 이제 매끄러운 상태가 되어갑니다. 그래서 이런 측면에서 교제의 소중함을 교훈 받게 됩니다. 이 매끄러운 돌이 다윗의 손에 들려서 골리앗을 무찌릅니다. 우리들의 것을 주님께 맡긴다고 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삼손과 나귀 턱뼈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구약에 사람들의 손에 든 것을 가지고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기사를 통해서 모임의 수가 적더라도 주님께 맡겨서 주님을 증거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복음 9 1-7

"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6절에서 주님의 손에 진흙이 있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주님의 일은 우리들의 마음의 눈이 열린다는 것을 가르침 받을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에는 소경에 관한 기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18장에는 여리고성으로 들어가는 길가에 소경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그 소경의 소원에 따라 주님께서 한 말씀으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으며 말씀만으로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9장에는 두 소경에 관한 기사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 소경의 소원에 따라 주님께서 소경의 눈에 손을 대시며 믿음대로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8장에는 벳세다에 있는 소경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 때는 주님이 침을 뱉으시고 양손을 소경의 눈에 대었으며 두 번이나 그 소경의 눈에 대었습니다. 첫 번째는 눈이 열리기는 했는데 사람이 나무처럼 보였으며 두 번째는 사람을 분명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눈이 뜨여지는 다른 기사들이 있습니다. 말씀에 비추어서 그 뜻을 알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나 어려움이나 환난을 겪는 과정을 통해서 중요한 것을 볼 때도 있습니다. 서로간에 가르침을 주고 받으며 서로 격려할 때에 영적인 눈이 열릴 때도 있습니다. 금방 아는 것도 있고 시간이 걸려서 아는 것도 있습니다. 처음에 희미하게 알다가 나중에 분명히 알 때도 있습니다.

9장에서는 보기 위해서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도 진흙이 발라진 다음에 그 진흙을 씻은 다음에 보게 되었습니다. 진흙이 발라진다는 것은 어쩌면 부끄러움을 받는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진흙이 발라지고서 주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굳이 진흙을 바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의 순종을 요구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으로 가서 그 진흙을 씻을 때까지 시간이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들도 그 진흙이 발라지고 그 진흙을 씻을 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도중에 실로암으로 가지 않는다면 눈이 뜨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흙을 씻어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시련, 즉 진흙이 발리우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순종이라는 믿음을 살려서 어느 지점까지 가서 그것을 씻을 때 해결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구약의 욥의 인내는 유명합니다. 욥은 폭풍우 같은 많은 시련을 당했습니다. 가족도 재산도 잃었고, 온 몸에 헌데가 났습니다. 욥의 몸에 난 악성 종기인 헌데는 마치 발리운 진흙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때가 왔을 때 그 시련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욥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욥은 고백했습니다. 물론 자신에게 그런 시련을 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욥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욥에게 그것이 필요한 것을 판단하신 하나님께서 욥에게 시련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욥은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시련이 뭔지를 몰라도 하나님은 좋게 결론을 내려주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가시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세 번이나 그 가시를 없애달라고 주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바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이 기사를 보게 되면 우리들에게도 주님이 어떤 것을 보게 하시기 위해 진흙을 바르신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때는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면 복될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9:35-38

"35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이 소경이 눈을 뜨고 최초로 본 것은 유대인 사회의 모순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주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37절에 "네가 그를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복스럽게도 38절에서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눈이 뜨여진 다음에 예수님께 절하는 것, 즉 예배하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10:11절에는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9장과 10장은 연결되어 있는 기록입니다. 35절에서 추방된 이 사람을 주님께서 찾으셨습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10장에서는 "내가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1장에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눈 뜬 소경은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더욱 더 깊이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 생활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시련과 고난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마음의 눈이 열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움을 더욱 더 알아가며 주님에 대한 예배의 마음으로 인도를 받습니다. 오전에는 이 세 가지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 2015 12 26일 강서모임 -

 

posted by 징검 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