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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 다리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__________ 신앙상담은 asan19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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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 7. 12:26 빛 가운데로 걸으며

저희 중에서 나오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부분적으로만 분리되어 있다. 이것은 타협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타협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타협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과 그것이 주는 쾌락, 모든 세상적인 교제들로부터 완전한 분리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분리할 때에 우리에게 매우 다양한 형태의(일정치 않은) 멍에가 문제로 다가온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멍에들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유용함, 세상에 대한 그의 증거를 파괴하여 그리스도인을 (낮은) 영적 침체로 이끈다. 로마서 12 12절에서 우리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권면을 받는다(고후 4:16; 40:31). '본받는다'는 것은 특별히 일시적이고 바뀔 수 있는 것과 관련지어 어떤 것을 다른 것과 비슷하게 모양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외부적인 것에 강조점을 둔다(Vine's Dictionary of New Testament).

고린도후서 6 14절에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빛과 어두움 사이에는 진실한 교제가 있을 수 없다. 즉 그것들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세상과 세상의 풍조()를 본받는다는 것은 불의와 어두움을 본받고 그것과 짝하는 것이다. 세상을 따르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계속적으로 (영적) 침체를 경험하게 된다.

성도는 또 다른 과오에 빠지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부분적으로만 분리되어 있다. 이것은 타협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타협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타협하는 것이다. 역대하 25 2절에는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치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아마샤와 같은 말을 듣지 않도록 하자. 계시록 3 15절에서 성령이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하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미지근하다고 비난받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지지하는가를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히 보일 수 있도록 그의 백성이 영적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성경에 의하여 인도되고 다스려지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의, 이 세대의 변하는 속도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 불명확하고 변하기 쉽다. 우리는 주위의 믿지 않는 세상과 어느 정도까지 분리되어야 할까? 고린도후서 6 14절은 삶의 모든 영역 - 즉 사회적인 멍에, 사업적 멍에, 종교적 멍에, 그리스도인의 영적 회복을 가장 파괴하기 쉬운 결혼의 멍에 - 에서의 분리를 말한 다. 계명은 포괄적이다. 그것은 일반적인 목적을 위해 우리 스스로를 묶고 있는 어떤 것에도 적용된다. 물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학교나 직장에서 구원받지 못한 자와 섞여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남은 시간이 그들과의 교제에 낭비되어서는 안된다. 즉 그들의 모임들과 조직체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다른 멍에의 영 역들을 각각 살펴보자.

 

사회적 멍에

사회적 멍에는 젊은 그리스도인과 구원받지 못한 자녀를 둔 결혼한 그리스도인 가정에 특별히 중요성이 있다. 회개치 않는 친구들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적인 욕심과 호의에 의해 드러나는 영적 연약함으로 이끈다. 하나님과 세상과의 동시적인 교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 우호적인 신자는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교제를 파괴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4:4). 그리스도인들의 구원받지 못한 친구는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구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그의 거룩한 영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한 친구를 사귐으로써 당신의 하나님 아버지에게 적대하는 세상과 당신 스스로 연합하는 것이다. 젊은 그리스도인이여!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부족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친구들과의 교제에 의지하지(호소하지) 말라. 그 결과는 잘못된 것을 감지하는 우리의 영적 양심을 둔하게 하는 것이다. 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알렉산더 포우프(18세기 영국시인)의 말의 진실을 입증해 왔다.

"악은 너무도 끔찍한 현상을 한 괴물이어서 미워는 할지언정 볼 필요조차 없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자주 보느라 친숙해져서 처음에는 참지만, 곧 가엾어 하고, 그리고는 껴안는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배운다면 결코 (그리스도인)친구를 잃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항상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와 교제를 하게 될 것이다(18:24).

젊은 부모들이여! 당신들의 자녀 특히 10대들이 당신을 따라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인인 부모가 스스로 사회적으로, 구원받지 못한 친구들과 교제를 해오다가 결국 그들의 자녀가 세상과 그에 속한 것에 대한 사랑을 갖게 되어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 강한 우정을 발전시키고 구원받지 못한 세상으로 나가게 되는 많은 경우를 알고 있다. 요한복음 15 19절에서 우리는 세상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알고 있으며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10:24).

세상 앞에서 살 때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서 볼 수 있는 우리의 세상과의 4중 관계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11절에서 우리는 세상 안에 있다는 것을 들으며 그것은 육신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실을 도울 수 없다. 6절에서는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나왔다. 이것은 영적 사실이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3:20).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실재적으로 분리되어야 할 것이 다(14).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떠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세상 속에 보내진 것이다(17:18).

 

사업적 멍에

사업적 내지 상업적 멍에는 신자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불명예를 가지고 온다. 그것은 분명히 성도가 안주해서는 안될 곳이다. 사업상 두 동업자의 흔한 예를 들어보자. 한 사람은 신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불신자이다. 당연히 그들은 서로 다른 행동기준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너희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원칙을 따를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동업자는 그러한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사업은 사업이다' 그들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고 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연합하여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보게 될 것이고 그의 양심을 슬프게 하는 정책에 동의하리라 기대되어진다.

타협은 그리스도인을 재촉할 것이고 필연적으로 그러한 타협은 구원받지 못한 동업자의 불의한 요구에 굴하는 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한 멍에는 하나님의 뜻(고후 6:14)에 어긋나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물질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번영을 가져올 수 없다.

 

종교적 멍에

종교적 멍에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나쁜 사례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백성들이 그들 주변의 거짓 종교적 악에서 떠나 하나님께 예비하고 헌신하면서 성별되는 것이다(14:2, 벧전 2:9). 종교인, 회개치 않은 사람, 악한 교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집에 대한 책임과 특권을 차지하고 나눠가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모임은 거룩하고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혐오하는 거대한 종교적 바벨론인 기독교국을 선언하는 빈껍데기를 가지고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거기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 종교적 멍에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매우 위험하고 영적 파선을 확실히 하는 길이다.

 

결혼의 멍에

결혼의 멍에는 삶의 기간 때문에 다른 멍에들 중 가장 심각하다. 주님은 항상 불신의 세계에서 분리 즉 가장 거룩한 모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길을 원하신다(7:3). 고린도전서 7 39절에서 결혼은 "주 안에서만" 허락된다. "이것은 불신자와의 결혼에 대한 명백한 금지이다. 그러한 결혼은 결코 '주 안에서' 일 수 없다. 그러나 그 말은 보다 광범위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인 미망인이 그녀의 새로운 남편이 신자이기만 하면 단순히 그녀의 선택에 따라 결혼하는 것이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단계는 주님의 뜻의 명백한 확신 안에서 취해져야 한다. '주님 안에서'라는 구절은 신자의 삶 속에서 지상의 모든 관계와 환경에 부합되는 책임들을 다스린다. 그것은(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영적 연합의 친밀감을 표현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와 대조적이며 하늘의 관계와 지위를 언급하는 것이다"(W.E. Vine) "아마 결혼한 후에 내 동반자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 우리는 그것은 사단의 거짓말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눈을 뜨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불신결혼을 한 신자는 비록 긍휼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을 지라도 하나님이 그의 동반자를 돌이키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그러한 단계를 취한 사람은 "그들이 심은 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6:17). 불행 한 세월을 가정 내 분열, 하나님께 대한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함 속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불신결혼은 비극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 쪽은 하늘에 속한 성령의 전인 하나님의 자녀인 반면 다른 쪽은 불순종의 자녀에게 역사하는 영에 의해 지배받는(2:2) 사단의 자녀이다(2:3).

잃어버린 죄인들 이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자녀가 태어나면 가정 안에서 슬픈 분열이 나타난다. 한 부모는 자녀의 구원을 원하지만 다른 부모는 무관심하다. 즉 아이들은 두 영향 사이에서 찢겨질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권위에 덧붙여서 그들의 죄악된 속성은 회개치 않은 부모의 인도를 따를 것이다. 주님이 오실 때 또는 만일 부부가 죽게 될 때를 상상해 보자.

한 사람은 주님의 집에서 안주할 것이고 다른 사람은 영원한 파멸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 안에 남게 된다. 결혼의 멍에의 실재는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그의 준엄한 계획의 준수에 의해, 즉 모든 구원받지 못한 동료들과 친지들과의 분리에 의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

 

성별의 또 다른 측면

우리는 성경에 의거한 성별의 다른 측면을 살펴보아야 한다. 성별이 우리 주위의 불신세계로부터의 분리만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믿을만한 대답은 절대 '아니다'이다. 시편 119 63절에서 우리는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와 주의 법도를 지키는 자의 동무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적어도 사회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한 뜻 - 법도를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경외함을 명백히 보여주지 않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분리해야 할 것이다(우리는 이 점에서 오해해서는 안된다. 우리와 교제하며, 주 안에서 어리거나 교파에 가입하여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진리 위에 명백치 않은 사람들이 있다. 만일 그들이 진리를 알고자 하는 순수한 소망과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명백히 드러낸다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주는"(18:24)차원에서 그들과 교제할 수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나 모임에서 우리가 귀중하게 생각하는 진리에 대한 무시 를 명백히 선언하고, 그들의 주안의 지체들을 결코 섬기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자들과 교제해서는 안될 것이다. 종파주의는 비성서적이다(2:42). 우리는 "항 상 여호와를 경외하라"(23:17)는 권고를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귀는 동료와 같아진다.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그리스도인과 계속 교제할 때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행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로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3:3). 비록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계시된 모든 말씀에 굴복할 준비가 되지 않은 자와 어찌 우리가 교제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굳게 잡지 않은 자와 무슨 진실한 교제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2:25).

그러나 그러한 교제가 부정적인 악만은 아니다. 그들과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비성서적인 그들의 행위들을 묵과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잘못된 행위들로 돌아갈 때, 또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하면서 내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 18절에서 이 사실을 명백히 밝힌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비성서적인 그리스도인들로부터의 분리는 성서에 근거한 명령을 따르지 않는 모임, 기독교국을 공언하는 이 세상의 교파와 종파에 속한 자들, 다른 교리를 가진 자들, 데살로니가전서 514절에서 나타난 자들, 규모없는 그리스도인(무질서하게 행해서 다루기 힘든 자) 그리고 그들의 삶 가운데 세속적이고 단정치 못한 이유로 성서적 원칙에 반대로 행하는 자들을 포함한다. 실재적인 분리가 우리의 유용성을 적게 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 주장을 지지하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3:18). 어린 그리스도인이거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분리의 길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라. 이 세상에서는 자연적으로 세상을 따라 사는 것이 더 쉽다. 당신은 조롱받을 것이며 심지어 슬프게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도 조롱받을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명심하라. 용기를 잃지 말라. 젊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이같은 격려의 말을 썼고, 그것들은 오늘도 동일하게 사실이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하나님은 누구의 채무자도 아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길 것이다"(삼상 2:30). 분리의 길을 택한 성도는 행복한 사람이다. 즉 주님께 순종하는 법을 알고 있는 종이다. 거룩한 영감의 글에서 한번 더 하나님의 부름과 그의 약속을 들으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7,18).

 

 

posted by 징검 다리